집의 필요충분조건에 대하여: 작지만 작지 않은 집 ‘파이팅 하우스’

발코니와 욕조를 갖춘 8개의 서로 다른 원룸, 수납장으로 침대 가려 공간 분리+사생활 보호
대학가 원룸촌에 새로 들어선 ‘파이팅 하우스’는 8개의 방이 모두 발코니와 욕조를 갖췄다. 출입구에 수납장을 세워 현관에서 침대가 보이지 않는 분리형 구조를 채택했다. 거주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생활의 쾌적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Narsilion
글_매거진브리크 편집팀/ 사진_류인근, 나르실리온

건축가들이 가장 기피하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최신식의, 매우 거대한, 그리고 복잡한 기능과 구조가 공간에 얽혀있는 건축물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괴하거나 복잡하거나 큰 건축물, 또는 문화사적으로나 예술적, 기술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건축물일 것이라는 게 보통의 선입견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 건축가들이 어렵다고 입을 모으는 건축물은 ‘집’이다. 여기서 십중팔구는 “집이라고? 내가 사는 집?”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규모도 작고,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늘 우리 곁에 있는 그 집 말이다.

집이 어려운 이유는 작은 공간에 많은 기능을 담아야하기 때문이다. 또 안전해야하고 안정적이어야한다. 24시간 사람이 살아야하는 이유에서다. 큰 평수든, 작은 평수든 집이라면 화장실이 있어야 하고, 냉난방이 잘 돼야하고, 튼튼해야한다. 맨발로 다녀도 다치지 않아야하고, 아기들이 바닥을 기어다녀도 될만큼 독성이 없는 자재들이 사용돼야한다. 책을 보거나 업무를 할 수 있는 서재, 휴식을 위한 휴게실, 잠을 위한 침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실과 응접실, 식사를 위한 주방과 식당, 의류와 기타 생활용품을 보관해야 하는 수납공간까지 집은 이 많은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서두가 긴 것은 작은 집이라고 필요한 기능이 제거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대학생이 혼자사는 대학가 원룸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Inkeun Ryoo

서울 사근동은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다. 인근 대학과 개천, 야산이 동서남북 세 방향을 막고 있어 외딴 섬처럼 격리돼 있다. 지하철에서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이 동네가 부동산 광풍의 수혜를 입지 못하고 수 십 년간 대학의 베드타운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집의 이름은 ‘기운집’이다. 여러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지붕 모양새가 기울어서 기운집(Slanted House), 기와 운이 모인다해서 기운집(氣運集), 영문으로는 ‘파이팅 하우스(Fighting House)’다.

기운집을 만나러 간 골목 초입에는 담벼락에 초록색 칠판이 걸려져 있었다. ‘사근동 스토리길’이라는 명패를 단 낙서판이었다. 흰 분필로 여자친구 이름에 하트를 새긴 것도 보였고, 낙서판 주위에는 동화 속 아기돼지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아마 누군가의 장난으로 시작된 것이 이 동네의 ‘그래피티(graffiti)’ 문화가 된 듯했다.

집은 골목 가운데 있었다. 붉은 벽돌 담벼락으로 이어지는 다세대주택 사이로 하얀 몸체에 은색 모자를 둘러쓰고 한 쪽 눈만 뜬 모양새의 건물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마치 SF영화에 등장하는 이족보행 로봇이 1980년대 동네에 타임머신을 타고 내려 온 것 같았다.

ⓒInkeun Ryoo

건물의 내부도 남달랐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1층 필로티 기둥 사이로 난 계단실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낯선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이 파란색 벽이었고 머리 위로는 태양처럼 붉은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끊임 없이 이어져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갈수록 좁아졌다. 하늘로 이어지는 ‘좁은 문’을 향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층한층 올라가서 만난 세대의 현관에는 커다란 숫자가 표기돼 있었고 계단마다 소모 칼로리 량이 명기돼 있었다. 5층까지 엘레베이터가 있는데 세입자들에게 전기절약이라도 하라는 건가?

ⓒInkeun Ryoo

“재미예요. 이 집에 사는 학생들에게 뭔가 좀 다른 것, 특별한 경험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 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차별화된 경험과 감성이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면 더 좋을 것 같았구요.”

집의 안내를 맡은 이는 건물주인 노부부의 딸이었다. 기운집의 건물주는 이 자리에 있던 2층 단독주택에서 30년간 살다가 임대수익을 목적으로 4년 전 이를 허물고, 원룸 다세대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공사 과정에서 부딪힌 여러 난제들에 노부부는 이 작업의 진행을 딸에게 맡겼다.

“부모님이 처음 도움을 청했을 때에는 건축 허가에 관한 문제였어요. 이후 협력할 건축가를 찾고 집의 전체적인 방향을 정하고 실제 공사까지 다 떠맡게 됐죠. 지금은 아예 여기에 살면서 이 집의 운영도 맡았습니다.”

젊은 감각의 그가 젊은 건축가와 호흡을 맞춘 것이 기운집이 남다른 외관과 내부 구조를 갖게 된 바탕이 됐다.

기운집은 노부부가 사는 4층을 빼면 나머지 8세대는 모두 원룸이다. 그런데 이 원룸들은 하나같이 발코니가 있었고 욕실에 욕조도 있다. 발코니에는 빨래대를 두고 젖은 옷을 바람에 말릴 수 있고, 의자에 걸터 앉아 책을 볼 수 있다. 한 켠에는 작은 화분도 키울 수 있다. 흡연자라면 이 공간이 너무도 매력적이겠지만 공동 주택인만큼 자제는 기본 매너일 듯하다.

ⓒNarsilion
ⓒNarsilion

이 집의 장점은 내부 구조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각 방의 출입문을 열어 젖히면 깔끔하게 정리된 수납장만 보이지 너저분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왼쪽 코너에 주방, 오른쪽 코너에 침대를 배치하고 입구에 키 큰 장을 세워 공간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주방의 싱크대와 침대 머리는 최대한 멀리뒀다. 냄새 나는 설겆이 거리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조리시 냄새가 방 가득 퍼지는 것을 막았다.

욕실을 보면 더 깜짝 놀란다. 상대적으로 공간이 크기도 하지만, 몸 전체를 담글 수 있는 욕조가 각 방에 모두 있다. 샤워 커튼만 달면, 세면대와 공간을 분리해 쓸 수 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다. 원룸이 아니라 방 두 개, 욕실 하나를 갖춘 전세집 같은 느낌을 줬다.

또다른 특이한 점은 이 집의 원룸 8개가 모두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다. 각 방에 일조량을 늘리기 위해 계단실을 건물 가운데에 배치하고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뒤로 밀어 남향이 접하는 면을 늘렸다. 지붕의 사선 모양과 위로 갈수록 계단실의 크기를 좁혀 각 층마다 최대한의 면적을 확보했다. 덕분에 기운집은 상대적으로 방이 크고 기능별로 공간이 분리돼 있다. 대학가 자취촌에 있는 원룸으로는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Narsilion
ⓒNarsilion
ⓒNarsilion

건물주는 “작더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이 되길 원했다”면서 “건축가가 원룸에 필요한 기능들을 아주 꼼꼼하게 설계에 반영해 가능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건축가는 “평면이 다 달라 비용과 공사기간이 늘어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축가의 영역을 인정해줘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운집은 작지만 작지 않은 집, 원룸도 제 기능을 갖춘다면 엄연한 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또 작은 배려가 함께 사는 이들을 행복하게 할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Inkeun Ryoo
You might also like

스테이 창업 전, 반드시 두드려보아야 할 돌다리 ‘스테이 스쿨’

스테이 스쿨 강사진으로부터 미리 들어보는 생존 전략

일상의 웰니스 라이프 큐레이터에게 묻다

[Wellness Lifestyle] ⑧ Life Curators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Portrait] 호텔을 만드는 사람 한이경

‘왜 홀리스틱 웰니스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Interview] 상하 리트릿 CCO & 총괄 건축가 — 캘빈 싸오Calvin Tsao

짓기 전에 꼭 넘어야 할 스무고개가 있습니다

[다시 만난 브리크의 공간] ① 서교동 카페 ‘콤파일Compile’ 황지원 대표

우리나라 아파트 디자인의 이면

[정해욱의 건축잡담] ⑨ 건축가가 발견한 디자인 특이점에 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