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이영은 학생인턴 글 & 자료. 제로리미츠 건축사사무소 Zerolimits Architects
울산에서 엔지니어와 아티스트로서 삶을 일구어왔던 건축주 부부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숨 가쁘게, 또 치열하게 인생이라는 레일을 달려왔다. 자녀들을 대학까지 진학시켜 놓고 잠시 숨을 돌려 뒤를 돌아본 부부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도시를 떠나 그간 마음속에 그려왔던 제주에서 집을 짓고 인생의 제2막을 올리고자 결심했다.
서귀포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중산가의 마을에 대지를 마련한 건축주는 ‘땅을 닮은 집’을 짓길 원했다. 아무리 아름답다해도 존재감을 드러내느라 혼자 이질적으로 불거지기보다는 건축주가 사랑한 이 풍경과 마을에 집도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바랐다. 그 덕분에 고즈넉한 마을에 차분한 인상의 주택은 조용히 자리를 찾았다.
주택이 위치한 곳은 바다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산간 지역에 전원주택용으로 조성된 필지다. 가까이로는 귤 농장과 굽이굽이 꺾인 마을 길을, 멀게는 한라산과 오름들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였다. 기본적인 매스의 형상은 이런 오름을 모티브로 했다. 오름이 보여주는 완만한 라인과 배치되지 않도록 일방적으로 뾰족한 박공이나 박스스타일은 지양하면서 곡선보다는 도시적인 직선의 조합으로 균형점을 찾아 지금의 입면을 갖춰나갔다.
형상과 함께 깊이 고민했던 이슈는 마감재였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제주 경관과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는 컬러, 그리고 제주도라는 환경 조건을 염두에 두었다. 많은 비, 강한 바람, 소금기 섞인 해풍 등 육지와 비교했을 때 무척 가혹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 육지 기준으로 예상된 내구성이 실제로는 상당히 못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천연 석재보다는 도시적인 감각의 소재를 원한 건축주의 의향도 고려됐다. 여러 소재를 두고 건축주와 건축가의 긴 논의 끝에 호근동 주택에는 제주의 땅과 같은 색인 블랙, 그리고 물과 기후에 강하며 유지관리 요소가 적은 세라믹 타일을 낙점했다.
규모는 30여 평의 비교적 콤팩트한 2층으로, 외부보다는 실내 지향적인 건축주에게 맞춰 중정을 중심으로 두르듯 공간을 배치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주방에 이어 식당, 거실, 안방으로 긴 동선을 이루며, 대부분의 기능을 1층에 집약시켰다. 오랫동안 지내온 아파트 평면에 급격히 변화하는 대신 익숙하고 안정적인 실 배치를 의도한 결과다.
거실은 천장을 오픈해 2층 작업실과 면하는 보이드 공간을 만들어 공간감을 극대화하면서도, 1층은 도장, 2층은 자작나무 합판으로 마감해 소재에 따른 구분감을 줬다.
자작나무 합판은 단순히 목재 질감을 주는 것 이상으로, 각 합판끼리 만나 생기는 선은 물론 지붕면의 꺾임까지 고려해 판재를 재단하거나 각도를 고려해 적용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땅을 닮은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한 호근동 주택은 현지 천연 소재로 지역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땅과 잘 어울릴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좋은 선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