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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집에 얽힌 두 남자 이야기

[QnA] skimA의 ‘DP9131’
ⒸSkim-A
글. 이현준  자료. skimA

 

2016년 여름, 런던에서 돌아와 갓 사무소를 차린 건축가에게 한 남자가 집을 의뢰해왔다. DP9131. 좌표로밖에 알 길 없는, 군 초소에서 꽃 핀 브로맨스냐 오해말 것. 하남시 덕풍동 검은돌 주택에 얽힌 두 남자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 남자 : 건축주 이야기

 

유능한 디자이너를 빌어 폼 나는 집을 짓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남시의 단독주택지는 향후 환금성이 괜찮다고 판단했다. 임대와 부동산 시세차익을 통해 수익을 내고, 괜찮은 집을 지어 몸소 거주하며 아파트의 타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한 건축가를 소개받았다. 꽤 오랜 기간 영국에서 공부한 인재라는 데다 적극적인 추천이 곁드니 한결 믿음이 섰다. 딱히 나무랄 데 없이 무난한 현대식 주택을 ‘찍어내는’ 여느 건축사무소의 포트폴리오를 마음에 담아두긴 했지만, 종내에 남자가 집을 맡기기로 선택한 쪽은 이곳이었다. 남자의 주머니 사정은 박하다 할 수 없었다. 그가 일생 동안 모은 돈을 모조리 집 짓는데 쏟아붓는 형국은 아니었단 얘기다. ‘일단 해보자’는 의지가 앞서자 남자의 결단은 익어갔다.

 

DP9131 중정의 모습 ⒸskimA

 

그 남자의 사정

 

어머니를 모신다. 토끼 같은 자식 둘이 초등학교에 다닌다. 직장생활을 하는 남자의 시간은 소란스럽지 않다. 여가시간에 손수 나무를 가공해 드론 따위를 만든다. 소모임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초대하고 쾌적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널따란 지하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패러글라이딩 같은 취미도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건대 이따금 남자는 답답한 가슴이 되기도 하나보다.

남자는 모던한 땅콩집의 사례들을 살폈다. 분리된 두 채를 두고 한쪽엔 남자와 식구들이 살고 다른 한쪽은 임차인에게 내어줄 요량이었다. 집 안쪽으로는 각 실의 배치, 색 선정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세팅에 남자가 직접 관여하며 그의 생각이 하나 둘 현실이 되었다. 이를테면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1층에 머무르며 모든 생활을 꾸릴 수 있도록 내부를 구조화하는 것, 그의 가족에 최적화된 주방을 꾸미는 것 등은 전적으로 남자의 몫이었다. 두 아이의 각방, 어머니의 방, 남자의 방, 손님 방 해서 모두 다섯 개의 방을 원했지만 손님방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신 두 아이가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다락을 확보했으니 밑지지는 않은 셈이다. 아이들의 방과 다락이 곧바로 연결되는데다가 채광과 전망이 워낙 좋아, 애써 마련한 다락이 창고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에겐 집에 대한 바람만큼 사념도 있었다. 지어서 남주는 집일뿐 아니라 내 편도 들어가 살아야 하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적잖은 세월동안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온전한 주택에 살아보고자 하는 소망은 변함 없었으나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임대에 대한 걱정도 컸다. ‘집 안이 전형적인 아파트처럼 생기지 않아도 임대가 원활하게 이루어질까?’ ‘방 크기, 부엌 구조를 이렇게 해도 정말 괜찮을까?’같은 의문들이 남자를 괴롭혔을지 모를 일이다.

 

그 남자의 태도

 

DP9131의 3D 모델링 이미지 ⒸskimA

 

‘남자는 블랙이지!’ 와는 조금 다른 결이다. ‘검은색이 난 좋아’ 쯤의 담백함인 것만 같다. 건물의 외관을 두고 검토한 수 많은 선택지 가운데 끝내 남자는 검정 석재를 선택했다. 벽돌이 아닌 다른 재료를 쓰고 싶었고, 현무암에는 남자가 늘상 보던 벽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는 여유로웠다. “이런 것도 나오는군요” 수긍하거나 “그럼 이런 건 어떻게 하죠?”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건축가가 보여주는 시안, 모형을 보며 즐거워했고, 자연스럽게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다. 하얀 톤과 검은 톤이 조화된 인테리어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직접 모은 자료 사진들을 가져와 건축가와 상의했다. 건축가 역시 처음의 염려와 달리 매끄럽게 동행하는 건축주를 더 신뢰하게 됐다. 임대료, 건축주 지인들의 입김, 세대 분리 문제, 시공사 선정 등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장애물도 있었지만, 그 남자의 태도엔 분명 집 짓는 이들을 편안하게 아우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건축주의 취향이 반영된 인테리어 ⒸHyosook Chin

 

덕풍동 R6 36-2 : 집 톺아보기

 

R6 36-2는 하남시 주택 지구단위계획 당시 대지에 할당된 고유번호다. 아무 맥락도 없던 빈 대지 위에 DP9131을 지은 건축가로부터 집 이야기를 들어본다.

 

완공 당시 주변은 꽤나 휑했다 ⒸHyosook Chin

 

3 X 3

 

건물 평면을 3 X 3 그리드로 나누어 9개의 네모로 구획하는 ‘나인 스퀘어’ 방식을 채택한 한 가장 큰 이유는 대지의 형태가 거의 정방형이라는 점에 있었다. 착공 당시 주변은 잡초만 무성한 벌판이었다. 주변 맥락이라는 것이 있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서양 건축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공간을 짜며 가장 효율적인 결과물을 내보려 마음먹었던 것도 있다.

 

‘나인 스퀘어’ 방식을 적용한 건물 콘셉트 ⒸskimA

 

나인 스퀘어 방식은 단순히 모양을 조작하는 형태적인 논리가 아니라 굉장히 기능적인 논리에 의거한다. 실제로 내부 공간이 어떻게 기능적으로 계획되느냐에 따라 발코니, 테라스, 절삭면 등이 정해진다. 이를테면 그리드에서 돌출된 건물의 부분은 그저 멋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채광, 조망, 환기 같은 기능적 측면에 입각한 형태 조작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건축가 입장에서 집을 지을 때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에는 환기와 채광이 빠질 수 없다. 외부에 면하는 면이 많아질수록 좋은 것이다. 아홉 개의 네모를 만든 뒤 일부를 삭제시킴으로서 남은 네모들이 두 면 이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중정을 내면서 모든 실이 네 면을 통해 외부에 면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예다.

 

두 집 말고 세 집

 

DP9131의 초창기 계획은 두 가구가 ㄱ, ㄴ형태로 서로 맞물리는 구조였다. ⒸskimA

 

DP9131은 계획부터 허가까지 두 집이었다. 투룸 임대가구와 쓰리룸 주인가구로 진행을 하던 중에 건축주는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부동산 중개사의 조언을 듣게 된다. ‘주변 아파트의 평수와 비교해서 너무 크다’ ‘이렇게 큰 집은 절대 세가 안 나가니 임대 가구를 한 번 더 나누어서 원룸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 말에 마음이 기운 건축주는 결국 두 가구가 아닌 세 가구집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인허가와 감리 과정에서도 느꼈지만 개발 전부터 관계를 맺은 하남 원주민 간 유대는 워낙 끈끈했다. 지금이야 하남 신도시가 생기고 개발이 이어지며 좀 덜할 수 있지만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이웃사촌처럼 연결된다는 하남 토박이 네트워크가 있다. 건축가 입장에서 처음의 디자인을 고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반론을 제시했지만 설득에 끝내 실패했다. 계획대로라면 한 가구가 오롯이 쓸 공간을, 다시 쪼개다 보니 1층과 지하를 연계해 쓰는 가구와 2층만 쓰는 가구를 위한 공간으로 분리되었다.

 

DP9131의 최종 평면도. 두 가구가 세 가구로 바뀌니 출입구도 세 개가 되었다 ⒸskimA

 

어쩌다 이퀄라이저

 

영롱쌓기로 마감한 파사드가 이퀄라이저 그래픽을 연상시킨다 ⒸHyosook Chin

 

건축주와의 의견 상충이 가장 컸던 부분은 도로를 면한 메인 파사드에 창을 내는 이슈였다. 남향인데다가 도로를 면하고 출입구도 있는 면이었는데 건축주는 이쪽에 큰 창을 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건축가 입장에선 결코 창을 내어 건들고 싶지 않았다. 이쪽 면은 아주 단단하고 무게 있는 모습이 어울렸다. 계단에 오르면 발코니창을 통해 시원한 조망이 가능했고, 중정 쪽에 깊게 굽어보는 커다란 창을 내어 채광도 충분한 상황이어서 기능적인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영롱 쌓기’라는 대안이 나왔다. 외벽 안쪽에 환기 가능한 통창을 두되 외벽에 쌓은 돌로 빛과 시선에 제한을 두는 거다. 다양한 영롱 쌓기 패턴을 마련해서 제안하니 설득이 수월해졌다. 결국 흩뿌리기 방식을 최종 선택됐는데 걱정과 달리 아주 밝고 흥미로운 채광이 연출되면서 외관의 전반적인 형태와 비례가 어그러지지 않았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누군가가 이걸 보며 이퀄라이저 같다는 말을 했다. 이퀄라이저의 그래픽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정말 비슷했다. 모르긴 해도 동네 사람들이 이미 이 집에 ‘검은 집’ 또는 ‘이퀄라이저 집’이란 이름을 붙여 부를 수도 있겠다. (웃음)

 

메인 파사드 영롱 쌓기에 대한 스터디 ⒸskimA

 

현무암을 아시나요

 

외벽에 대한 스터디 ⒸskimA

 

착공 당시 지구단위계획상 대지에 적용되는 특별한 법규나 제한은 없었다. 다만 한가지 지침은 외장재의 색상이 지나치게 어두우면 안 된다는 것. 완성된 집의 외벽 재질은 현무암이었다. 현무암이 지닌 밝은 잿빛 색상으로 허가 심사를 통과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현무암에 후처리를 하면서 검은 빛이 짙어져버린 경우다. 건축주에게 희거나 붉은 돌로 마무리한 외벽의 모습을 제안했는데 역시 검은 돌이 고급스럽다며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검은 철판도 옵션 중 하나였지만 무게감 있는 매스의 느낌과 땅에서 융기하는 콘셉트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페터 춤토르의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무암을 빼곡히 적층했다. ⒸskimA

 

블랙이 가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택 외관에 입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제트 블랙 아이폰의 리치한 광, 아니쉬 카푸어의 벤타 블랙 등 검은색 하나를 표현하는 데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했다. 그러다 검정 현무암이 떠올랐다. 이걸 벽돌처럼 잘라 페터 춤토르의 작업처럼 적층하면 건축에서의 고급스러운 검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현무암으로 재료를 확정 짓고 폴리싱을 여러 번 해보니 은은한 검정 광택이 살아 있으면서 다공이 지닌 빈티지한 텍스처도 겸비한 결과물이 나왔다.

 

집 위의 마당, 루프 테라스

 

옥상에 위치한 루프 테라스 도면 ⒸskimA

 

단독주택지역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절대적인 대지의 크기가 작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독주택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마당’이란 공간을 확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DP9131에는 마당의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외부와 적극적으로 맞닿는 풍경을 선사한다는 것에 방점을 두었을 때 해답은 옥상이었다. 마당의 경험을 대신 의도한 루프 테라스지만 실질적인 공간 활용은 건축주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려고 했다. 조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에 추후 화분을 놓거나, 어떤 용도로든 활용할 수 있도록 타일을 깔아두었다.

 

루프 테라스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싼다. ⒸHyosook Chin

 

입주자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집에 입주했는지 궁금할 법도 하다. 제일 먼저 나간 2층에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젊은 여자가 산다. 1층에는 공인중개사를 통한 어떤 사람이 머지않아 입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중적이진 않아도 이런 형태의 집을 선호하는 젊은 층이 분명 존재한다. 웃돈을 얹어서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수요자층이다. 건축주는 속된 말로 이미 집 공사비를 ‘다 뽑았다’고 전해왔다. DP9131이 기존 설계대로 두 가구만 사는 듀플렉스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학군 수요층이 들어왔을 것 같다. 집 근처 미사중학교는 인근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초등학교 고학년 자녀를 둔 젊은 부부가 들어왔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입주자들은 메인 창을 통해 완충녹지를 바라볼 수 있다. ⒸHyosook Chin

 

DP9131?

 

아무리 고심해도 집을 위한 적합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구단위계획구역이라 정식 주소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R6 36-2란 기호로 시작을 했고 준공 후 나온 주소를 활용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DP는 ‘덕풍’의 알파벳 초성이고 9131은 대략 이렇다. ‘나인 스퀘어(9)’ 방식으로 계획한 집이 하나(1)의 건물로 태어났고, 도합 세(3) 가구가 한(1) 집에 산다. 번지수와 맞물리는 절묘한 의미를 찾고 나니 이렇게 이름을 지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니 대번에 와닿는 이름이 아니라 사실 조금 후회 중이긴 하다.(웃음). 아, 개인적으로 ‘OO재’, ‘OO현’ 같은 이름은 식상하다고 느껴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Hyosook Chin

 

이 남자 : 김세진이 짓는 집

 

ⒸMAGAZINE BRIQUE

 

남자의 완성은 ‘책임감’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건축가의 기본적인 생각이 있다고 해도, 건축주에게 가능한 한 포괄적인 스펙트럼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남자에게는 중요하다. 건축주로 하여금 가용한 모든 색상과 재료를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도록 한 땀 한 땀 렌더링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옵션의 망망대해에서 패닉에 빠질 수도 있는 건축주들을 위해 그 자리에서 이거, 저거, 요거 추천을 시전하면 거의 100%의 확률로 건축주들이 수긍한다고.

DP9131을 설계하면서 이 남자는 100장 남짓의 도면을 그렸다. “이 정도 규모의 주택에 도면 100장이면 많은 것 같긴 해요. 근데 제대로 하려면 100장 정도는 필요해요. 쓸데없이 많은 도면을 그릴 필요는 물론 없지만, 이 정도 양은 있어야 설명이 된달까요.”

 

ⒸMAGAZINE BRIQUE
ⒸMAGAZINE BRIQUE

 

사랑은 미련을 싣고

 

채광에 대한 스터디 ⒸskimA

 

이 남자가 집을 지을 때 ‘채광’은 사뭇 중요한 이슈다. 두 집이 세 집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한 가구의 복도를 만들기 위해 지하까지 내려가는 풍부한 채광이 상당히 희생됐다. 지하에 이르는 빛의 수직 통로가 시원하게 뚫리지 않고 중간에 한 번 끊긴 까닭이다. “채광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있죠. 그리고 충분히 길게 만들었던 임대 공간이 한 번 더 쪼개졌잖아요. 처음에 기획한 대로 두 가구만 들어가서 충분히 잘 사셨을 텐데 굳이 나눴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죠.”

 

이 남자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설계와 시공은 엄연히 주체가 다른 영역이다. 시공사 선정에 앞서 건축가들은 원활한 소통과 집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안면이 있으며 신뢰관계가 돈독한 시공사를 추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만찮은 비용 차이가 발생한다. 몇천만 원도 아니고 1-2억에 달하는 시공비 격차다 보니 처음 집을 짓는 건축주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DP9131도 시공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곳의 견적을 받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비용 절감을 우선순위로 올리자 이 남자는 건축주에게 진솔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공감한 건축주 또한 시공사와 ‘무조건 도면을 기준으로 시공한다’는 서약을 통해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했다. 남자의 의지를 덥힌 건 여기 있다. 건축주가 시공과정상의 권한을 건축가에게 일임한 것이다. 으레 현장에서 건축가가 시공사 측에 한 이야기들은 다시 건축주에게 전달된 후에야 최종 검토와 컨펌이 이루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을 일축하며 건축주는 시공사에 일렀다. “건축가 의견을 따라주세요.” 시공 과정상은 물론 감리 때에도 전적인 믿음을 등에 업고, 남자는 계획했던 원형의 집 모습을 최대한 보존해내며 완공했다.

 

ⒸMAGAZINE BRIQUE

 

건축가의 고민 : skimA 김세진 대표가 말하는 한국의 집

 

주택 or 아파트

 

어쨌든 주택은 아파트와 다른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첫째로 주택은 층고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고, 둘째로 집에 하늘을 적극 들일 수 있다. 셋째로 앞뒤 두면 뿐인 아파트와 달리 주택은 네 면을 모두 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장점이다. 넷째로는 동선을 늘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네 가지는 체크하듯 하나하나 주택의 요소로 채택된다기보다 전반적인 주택 디자인에 버무려지는 것, 네 가지 요소들이 병합적으로 프로세스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아파트의 통상적인 층고가 2.3m인데 이보다 더 높은 층고를 주거 공간에서 경험한다는 건 아파트 공화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퍽 독특한 경험이다. 더구나 주택의 층고는 공간마다 높낮이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 이런 다이내믹한 공간을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은 참 중요하다.

주택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의 종류는 한정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눈높이에서 바라다보는 창이 아니라 넌지시 올려다보는 창일 수도, 머리 위에서 빛을 떨어뜨리는 창일 수도, 발코니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창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그처럼 창과의 다양한 경험, 외부와 조우하는 다채로운 방식을 선사하는 공간이 바로 단독주택이다.

주택의 모든 면에 난 창은 밖을 바라보는 역할에 그치기 않고 채광을 통해 공간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무실에는 크기와 모양이 아주 적절한 창이 남향으로 나있지만 옆 건물 벽을 곧바로 마주하고 있어서 실제 조망용 가치가 없다. 하지만 조망 여부와 채광 양에 관계없이 공간에 창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사람은 큰 영향을 받는다. 창의 유무로 공간의 분위기가 180도 변하기 때문이다. 이 사무실의 다른 창은 도로를 향하고 있고, 역시 남의 집 담벼락이 보인다. 하지만 시시각각 공간이 수용하는 풍광은 태양의 위치, 날씨에 따라 천태만상이다. 구태여 창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DP9131은 도로 반대편으로 완충 녹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주인 세대가 뒤 쪽의 완충 녹지를 은근히나마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창을 냈고, 뒤쪽 임대 공간에서도 남쪽 채광을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같은 방법으로 창을 냈다. 얇고 긴 슬롯 창이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파트는 가장 효율적인 평면으로 삶의 편의를 극대화한 집의 형태지만 주택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파트에서의 천편일률적인 경험을 되려 피하기 위해 주택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가능하면 가장 긴 동선을 만들어 멋진 공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동선을 길게 하는 것은 평범한 공간을 전이시키려 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다른 느낌의 공간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고, 건축가라면 응당 그런 대안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DP9131은 아파트와 달리 4면을 모두 운용해 외부와 하늘을 집 안으로 들인다. 동선을 길게 만들어 공간을 누비는 경험을 제공한다. ⒸskimA

 

명료한 집

 

정면에서 본 DP9131 ⒸHyosook Chin

 

한국에 귀국한 뒤 가장 먼저 들른 곳이 판교 주택가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역시 이런 주택을 짓는 일일 거라 생각했다. 4-5년 전 판교 주택지엔 거의 대부분 땅콩집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트렌드이긴 했으나, 그 많은 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 건물로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형태로 병치되어 있는 풍경에 아쉬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건물을 디자인할 때 건물이 갖는 ‘명료성(clarity)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 그대로 건물이 명쾌하게 보이는 거다. 이는 네모 모양, 박스 모양 등 형태적인 명료함을 뜻하진 않는다. 작동하는 구조물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될 때 풍기는 명료함이다. 그래서 두 집이든 세 집이든 살고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명료함과는 차이가 있다. 단독주택이 아니라 두세 가구가 사는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결핍이 나타나는 것 같다. 단독주택 두 채가 병치되면서 건물의 완결성과 명료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두 가구가 산다고 해서 집을 따로 떼어서 각자 2층 집을 갖는 게 아니라, 거주 동선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대안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건물의 명료성을 높이는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래야 건물 자체가 갖는 완결성을 획득할 수 있다.

 

우리네 ‘허가방’

 

허가방은 집을 디자인하기보다 허가를 목표로 운영하는 사무실이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저 ‘정성’을 다하지 않는 설계 사무소란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도면 20페이지로 공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은 아무런 상세 정보가 없는 도면으로 공사를 진행시킨다. 집과 사람, 대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과거에 이미 사용된 평면으로 단가만 맞춰서 납품하는 모양새다. 아마 그렇게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이쪽의 생태계일 수도 있겠다.

대중의 취향을 얕잡아보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동조하는 건축주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이런 허가방 시스템이 굴러간다고 생각한다. DP9131의 평면도를 보고 시공사에서는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늘 이중창으로만 시공하고 시스템 창호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다. 현장에 들를 때마다 질문을 받았다. ‘평면이 이러면 임대가 나가요?’ 이 집은 준공 직후에 주변 평균보다 높은 시세로 젊은 사람들이 임대를 했다. 쏟아지던 의심과 질문 세례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아, 이게 바로 나가네요.’. 허가방 세계에도 그들만의 마켓이 있다는 건 자명하다. 그러나 건축가가 지녀야 할 진실함과 정성을 거기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렇게 짓는 것보다 허가방을 통하는 것이 공사비도 큰 폭으로 절감되고 환금성도 배가된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면 값만 비싸진다고 피하는 건축주들이 많은가 보다.

 

DP9131이 남긴 것

 

건축주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건물인 건 분명하다. 남들보다 비싸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을 만들어 주니까.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주택 유형을 시도해보았다는 데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앞서 언급했듯 귀국 후 판교 주택가를 기웃대며 일을 시작했다. 지구단위계획에서 우후죽순 생겨나는 병치된 형태의 땅콩주택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대안을 고민해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나 혼자 고민한 건 아니지만.

DP9131을 지금 가서 보면 그 외형적인 의미가 조금 더 확연히 드러나는 것 같다. 왜 단단한 모습을 만들고 싶었는지, 왜 무게감 있는 모습으로 자리하기를 바랐는지 말이다. 준공 사진에서는 이 집 혼자 우두커니 서 있지만, 지금 주변 환경은 보다 다이내믹해졌다. 다채로운 상황에서도 묵직함을 지키는 모습에서 계획 당시의 의도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에디터의 표현처럼 ‘기념비’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과한 것 같다. 다만 이 집이 다소의 차이와 변주를 빚어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Hyosook Chin

 


skimA    www.skim-a.com

skimA(스키마)는 형태, 또는 계획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schema’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환경을 조작하는 지식과 기술’을 의미한다. 2014년 김세진이 설립한 스키마는 건축 디자인과 구조 디자인의 방법론 탐구를 통해 효율성과 환경의 조화를 갖춘 건축의 순수한 기능을 회복하는 데 의의를 둔다.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따듯한 배려를 모토 삼아 일상 속에 작은 울림을 전해주는 건축을 지지한다. 김세진 대표는 영국 AA스쿨에서 디플로마를 취득하고 이후 8년간 런던의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Foster + Partners)에서 어쏘시에이트로 근무하며 세계 곳곳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14년 한국으로 돌아와 스키마를 세웠다. 현재 고려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구조 디자인 수업과 건축 설계 강의를 하고 있다. 영국왕립건축사이며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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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가 담은 한국, ‘루이비통 메종 서울’

도포자락을 흩뿌리는 학춤의 선과 찰나, 수원 화성의 견고함을 담다

‘이름 없음’의 가능성

[Interview] 무명씨의 집 짓는 방법, 네임리스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