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Heritage is _____.] ③ 삶터로서의 을지로를 담아낸 ‘을지다락’
ⓒYongjoon Choi
에디터. 윤정훈  사진. 최용준  자료.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의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오늘날 을지로 위엔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두텁게 쌓여 있다. 을지로가 ‘힙지로(유행과 개성을 뜻하는 영어 힙hip과 을지로의 합성어)’로 불리기 시작한 건 불과 몇 해 전, 스마트폰을 든 젊은이들이 셔터가 내려진 어둑한 골목을 기웃거리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진흙으로 된 언덕길이던 을지로 일대는 햇빛을 받으면 구리처럼 반짝인다 해서 ‘구리고개’라고도 불렸다. 옛 지명은 구리와 같은 각종 금속, 목재, 유리 등의 원자재가 이곳을 채우며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계승됐다. 1960년대부터 건축 자재 관련 업종이 몰리며 을지로는 도시 제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세상을 이루는 작고 단단한 것들과 그 위에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실핏줄같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가득 채웠다. ‘을지다락’은 이같은 을지로의 풍경과 정신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플래그십 스토어다.

 

ⓒYongjoon Choi

 

을지로4가의 낡은 건물을 개조해 다양한 세대에게 을지로의 가치를 공유하자는 코오롱FnC의 제안에 따라, 임태희 소장은 ‘을지로다운’ 공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해답은 기존의 건물이 놓인 골목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을지다락은 인스타그래머블한 분위기의 카페와 음식점을 연상케 하는 힙지로의 이미지와는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다면 눈을 크게 뜨고 골목을 잘 살펴야 한다. 언뜻 보기엔 을지로의 여느 건물과 다를 바 없어 그냥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Yongjoon Choi

 

시간과 추억이라는 유산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을 잇는 큰길, 조명 가게들이 즐비한 대로에서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도로의 소음은 잦아들고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전후 서울을 일으켜 세운 근대 제조업의 산실 을지로의 속살이다. 그 가운데 자리한 을지다락의 원형은 1960년대 지어진 낡고 투박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긴 시간을 품고 있지만 역사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 보강이 필요해 보존보다는 철거가 옳은 상황이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 쓰임과 가치를 잃은 공간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어떤 것을 유산으로 봐야 할까.

오늘날 도시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임태희 소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결과물’과 ‘공동의 경험’을 꼽았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무형의 기억이나 추억 또한 보존할 만한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오래된 건축물뿐만 아니라 동네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 많은 사람이 이용한 길이나 마을 또한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을지다락은 을지로에서 살고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을 담는 곳이어야 했다.

 

ⓒYongjoon Choi

 

노동의 가치
임태희 소장은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역할은 ‘침묵하고 듣는 일’에 가까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졸업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을지로를 찾았던 대학생 시절을 회상했다. 머릿속 형태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을지로의 작업자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 제작을 의뢰하던 중 그들의 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계속된 고된 노동 탓에 새까매진 손가락과 반밖에 없는 손톱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땀 흘려 일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노동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는 이 시대에 기억되어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을지로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행위가 빚어낸 결과물을 다채로운 디자인 요소로 치환해 노동의 신성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Yongjoon Choi

 

원자재들이 만드는 풍경
디자인에 앞서 주변 환경을 분석하던 중, 대상지 주변으로 다양한 제조업 관련 가게와 작업장들이 업종별로 모여 있는 모습에 주목했다. 철물·앵글·프로파일, 조명, 금속·유리, 아크릴, 미싱 분야가 저마다 하나의 구획을 이루는데, 디자이너를 매료시킨 것은 이러한 가게들이 만들어내는 골목의 정경이었다. 작고 남루한 건물 위에 덕지덕지 붙은 오래된 간판과 그 속의 글자, 각종 자재가 산처럼 쌓인 비일상적인 풍경이 임태희 소장에게는 을지로만의 독특한 미감으로 다가왔다. 지역의 역사와 산업 및 문화를 일군 이들을 향한 존경심을 담아 구조 보강을 제외한 건축적 개입은 최소화하고, 을지로의 본질을 이루는 자재와 기술을 공간에 녹여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프로파일, 거울이 공간 곳곳을 채우는 집기로 재탄생했다.

 

ⓒYongjoon Choi

 

을지로의 문화, 자재의 진화
을지다락은 1층의 카페와 2층의 플래그십 스토어로 이루어진다. 공간이 무척 협소했기에 한쪽 벽면에 전면 거울을 배치해 공간이 확장되어 보이는 효과를 꾀했다. 무엇보다 패션 기업의 플래그십 스토어임을 드러내면서 을지로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을지로가 품은 시간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공간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부각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고민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스테인리스로 제작한 ‘원단 걸이’다. 1층 카페 카운터에 설치된 원단 걸이는 다양한 색감과 패턴의 패브릭을 통해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을지로의 원자재와 패션 기업 코오롱의 이미지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카운터의 수납장과 원단 걸이는 시스템 가구처럼 제작되어 손쉬운 조립과 탈착이 가능하다. 추후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속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공간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절곡된 금속을 켜켜이 쌓고 그 위를 유리 진열장으로 덮은 선반을 통해서는 원자재 날것의 거칠고 독특한 질감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외에도 섬유 아티스트 정희기 작가, 산업 자재로 가구를 만드는 최원서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오브제를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배치해 두었다. 을지로다움을 드러내는 다양한 장치를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Yongjoon Choi
ⓒYongjoon Choi

 

다시 쓰이는 삶의 흔적
리노베이션 이전 공간에는 과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47㎡ 면적의 1층을 세 개의 상점이 나눠 썼는데, 특히 가정집인 2층의 구조가 독특했다. 테라조 바닥 너머로 보이는 세 개의 방 중 두 개 방의 바닥 높이가 60cm가량 높았다. 그아래 구들장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온돌은 차갑게 식은 지 오래지만 한때 이곳을 채운 소소한 일상이 그려지는 곳이었다. 다락 아래 부뚜막에서 지핀 불로 훈훈하게 데워진 방, 밥 짓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지는 풍경이었다.

구조 보강 단계에서 하중을 줄이기 위해 구들장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흔적은 그대로 남겨 이곳에 방이 있었음을 암시했다. 온돌을 해체하면서 거친 표면이 드러난 벽은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지층처럼 보이게 됐다. 목재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다락 아래에는 지금은 보기 어려운 디자인의 모자이크 타일, 부뚜막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사소한 생활의 자취를 보존하면서 공간을 개선하는 일은 무척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방문객들이 근대사의 사소한 면면을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길 바랐다.

 

ⓒYongjoon Choi

 

2층에는 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한 장롱이 남아 있었다. 무척 낡았으나 누군가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사물이기에 문과 몸체를 분리해 계단 아래 창고로 들어가는 문, 1층 카페의 테이블, 2층의 진열장으로 활용했다. 먼지 속에서 오랜 시간 서 있던 장롱 문은 레진이 부어진 채로 눕혀 고풍스러운 테이블로 재탄생했으며, 한때 누군가의 옷이 걸렸던 몸체는 예스러운 느낌의 디자인 소품으로 다시 채워졌다.

 

ⓒYongjoon Choi

 

일상을 해치지 않는 법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또 한 가지 유념한 점은 건물이 놓인 주변 환경과의 조화다. 플래그십 스토어 특성상 많은 방문객을 유입시켜야 했지만 동시에 주민들에게도 친근한 곳이 되길 바랐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고 골목의 정경을 크게 해치지 않도록 건물 외관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작은 창호와 간판 두어 개를 새로 달았을 뿐, 복잡하게 엉킨 전선과 간판이 떨어진 흔적, 언제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그라피티, 심지어 다른 가게의 위치를 안내하는 간판이나 쓰레기 투기 경고문마저 그대로 두었다.

 

ⓒYongjoon Choi

 

을지다락은 주말엔 색다른 매력의 공간을 찾는 방문객으로 가득하지만 외부인의 발길이 뜸한 주중에는 동네 작업자들이 방문해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 마음속에 을지로의 어떤 면면이 남게 될까. 한국의 산업화를 지탱한 생산의 현장과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풍경이 공존하는 을지다락은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모습으로 오래된 골목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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