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공간

[스페이스 리그램] ⑥ 공간의 마음, 시테의 일지들
나의 해방일지 ⓒJTBC
글. 김은산  자료. JTBC

 

‘기억극장(아트북스, 2017)’, ‘애완의 시대(문학동네, 2013)’, ‘비밀 많은 디자인씨(양철북, 2010)’ 등을 통해 사회적인 분석과 미학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작업해온 김은산 작가가 ‘스페이스 리그램space regram’이라는 연재로 <브리크brique> 독자와 대화의 문을 엽니다. 인문학과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한 그는 인문서점 운영과 사회주택 기획, 지역 매체 창간 등을 통해 공간과 사람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한 컷의 사진을 매개로 도시인의 일상을 돌아보는 그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짧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은 유럽에서 도시가 건설되던 초기 기독교 시대를 돌아보며 도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도시’와 ‘신의 도시’가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이후 물리적 장소로서 ‘빌ville’과 행동, 신념으로 편집된 도시인 ‘시테cite’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으로 자리 잡았다.

‘시테’는 일종의 집합적 장소의식으로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정서, 생각을 표현한다. 도시는 건물과 거리, 도로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과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공간을 채우고, 떠돌고, 때로 물리적인 환경만큼이나 강력하게 응집되어 가시화되기도 한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사전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추앙’이라는 단어를 꺼내 관계와 감정의 새로운 차원을 펼쳐 보인 것처럼, 도시와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던 감정이 발화되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다. 사람들이 언젠가 느꼈을 감정과 무심코 떠올린 상념들이 그들을 둘러싼 공간에 쌓일 만큼 쌓여 이제 공간 스스로가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세넷이 말한 ‘시테’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라 말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의 해방일지 ⓒJTBC

 

<나의 해방일지>는 산포에서 살아가는 삼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가족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공간적인 비유와 상징을 통해 변두리, 청년, 가족, 주거, 독립 등 공간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어떤 데이터나 통계수치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수원 근처 가상의 도시로 설정된 ‘산포’는 지명에서부터 ‘중심’과 ‘산포’를 연상시키며 서울이라는 강력한 중심의 영향 속에 살아가는 수도권에 대한 은유로 읽혀진다.

삼남매가 서울로 향하는 출퇴근길은 그들의 실존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간들이다. 무심히 차장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무표정하고 공허한 얼굴은 매일 아침과 저녁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그 누군가의 얼굴과 겹쳐진다. 이동과 환승으로 넘나드는 경계는 때로 넘을 수 없는 한계로, 보이지 않는 벽으로 다가오고, 그 경계를 늘 의식해야 하는 일상이 그들을 조금씩 지치게 한다.

삼남매의 대사는 수도권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는데, 거듭 확인되는 것은 공간적 거리감이 연애의 거리감, 기회와 자원으로부터의 거리감과 일치한다는 인식이다.

 

“매일 길바닥에 서너 시간을 버려가며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서울 것들보다 빠르게 늙는다고.” – 첫째 염기정
“동네에서 연애할 수 있는 건 서울 애들이야.” – 첫째 염기정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서울은 노른자이고.” – 둘째 염창희

 

그러나 삼남매 중 유일하게 막내 염미정은 그런 통념에 의문을 품으며 “서울에 살았으면 우리 달랐어?” 라고 질문을 던진다. 추앙과 해방이라는 문어체의 향연을 이끌어내며 중심의 영향력과 산포된 위치의 관계를 흔드는 인물로 설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해방일지 ⓒJTBC

 

세넷은 빌과 시테의 불균형과 모순이 그 도시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도시와 공간에 관한 관심은 물리적 환경으로서 ‘빌ville’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영끌 아파트’와 ‘부동산’에 담지 못하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시테’를 말하는 더 많은 언어, 다른 시선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저녁이 되면 이쪽에서 바람이 들어와. 밤이면 풍향이 바뀌는 집도, 달이 보이는 집도 여기가 처음, 창문에 달 뜨는 집은 동화책에나 있는 줄 알았지.” – 구씨

 

미정과 함께 해방을 꿈꾸는 이방인 구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산포라는 공간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구씨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품은 욕망의 끝을 달리다 튕겨져 나온 인물이라는 것을. 드라마에서 산포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은 미정과 구씨의 산책길 그리고 구씨의 시선을 통해서다. 추앙과 해방은 여전히 멀지만 적어도 그 순간 관계와 공간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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