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Heritage is _____.] ⑥ 낡은 골목을 끌어안는 건축가의 재치, '전봇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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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정훈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자료. 구보건축사사무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기억을 더듬어보면 뛰노는 게 힘들지 않았던 유년 시절엔 골목 곳곳 커다란 회색 기둥들이 서 있었다. 길을 따라 띄엄띄엄 놓여 전국 각지에 전기를 실어나르던 전봇대는 도시민의 일상을 뒷받침하는 필수 기반 시설이었다. 근대의 목제 기둥에서 현대의 철근 콘크리트 기둥으로, 전력선에 전화선과 인터넷 연결선이 추가되며 오랜 시간 사람들 곁을 지킨 전봇대는 이내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각종 안전 사고의 원인이 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원형 기둥과 허공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선은 땅속에 매몰되어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최첨단 기반 시설로 깨끗하게 정비되는 아파트 단지가 보편적 주거 개발의 해법으로 활용되는 이 시대에 도시 골목 한 켠에 놓인 전봇대는 이제 오래된 동네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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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와 오래된 동네
‘전봇대집’은 지난해 서계동에 마련된 구보건축사사무소(이하 구보건축)의 새 보금자리다. 1972년 완공된 2층 건물을 사무실로 쓰기로 했을 때 건축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건물 모서리 쪽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전봇대였다. 덕지덕지 얽힌 케이블을 힘겹게 받친 전봇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지만, 편리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에게는 건물 외관과 동네의 미관을 저해하는 큰 골칫거리로 다가왔다. 없는 셈 치고 리노베이션을 구상하기엔 전봇대가 갖는 시각적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도시적 차원에서 일대의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 건물은 계속해서 전봇대와 함께 할 운명이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 그 존재를 인정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조윤희·홍지학 소장은 전봇대를 되레 긍정하는 방식으로 건물에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렇게 전봇대는 디자인 초기부터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전봇대라는 외부 요소를 건물의 일부로 여기기 시작하니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서계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 특유의 분위기나 정취가 남아 있지만 그만큼 낙후된 동네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건축적 개입을 통해 낡고 침체된 동네 풍경에도 활기를 더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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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 자리에 있던 ‘도시 조직’처럼
사무실을 차리려던 구보건축이 건물 앞 전봇대와 동네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이 주목하는 도시의 헤리티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 조직’이다. 사람들의 걸음걸음을 따라 자연스레 형성된 골목길과 그 위에 놓인 공간은 다수의 기억과 경험,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이 땅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는 대규모 재개발보다 기존의 도시 조직을 유지하며 길은 계속 길로, 집은 그 흔적을 남기며 불량한 기반 시설과 미관을 개선해 나가는 느린 재생을 지향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전봇대집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기보다 ‘본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개선됐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혹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 주는 안정감이 있어요. 일상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건축물이 90%, 독특한 조형성이 돋보이는 건물이 10% 정도일 때 사람들이 도시를 더 편안하게 느낀다고 생각해요. 제각기 목소리를 내는 건물들로 도시가 꽉 찬다면 너무 산만하고 답답하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전봇대집은 오히려 동네의 배경이 되는 담담한 형태여야 했죠.”

 

 

골목에 활기를 더하는 열린 공간
기존 건물의 외관은 전봇대는 물론 전선, 배관, 셔터 등이 한데 얽혀 산만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주변 환경 또한 무척 어수선했기에 전봇대집의 외관은 최대한 단순하게 디자인했다. 오랫동안 붙어 있던 불필요한 시설과 폐전선을 정리하고 흰색 페인트로 외부를 마감했다. 가스 배관을 제거하면서 드러난 외벽의 요철은 건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소라고 판단해 평평하게 메우지 않았다. 이렇듯 의도하지 않은 불완전함은 결함처럼 보이는 부분을 하나의 특색으로 재치있게 치환하고, 공간을 좀 더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기존의 낡은 건물에 새 숨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부각하려던 부분은 50년 전 건물을 축조하며 쌓인 흔적을 다시 수면 위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골목과 단절돼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던 저층부는 주요 구조만 남기고 외장재를 최대한 덜어냈다. 조적으로 둘러싸인 기둥의 거친 면을 드러내고 이를 유리 벽으로 감싸 동네를 향해 열린 풍경을 연출했다. 이 취지를 살려 1층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갤러리와 카페로 활용했다. 흰색으로 도장한 철판으로 만든 긴 화단 배치는 이곳에 새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부족한 녹지를 더하려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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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즉흥성과 현재의 유연함이 만나면
전봇대집은 컴퓨터 도면과 모델링을 통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건물이라기보다,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마주침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디자인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랜 시간의 속살을 전봇대집 디자인의 정체성으로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존 건물의 기본 도면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구보건축은 직접 실측에 나섰다. 건물의 평면은 논리에 기반한 그리드가 아닌 사다리꼴 형태였다.

본래의 건축은 완벽한 설계도서를 따라 시공된 것이 아닌, 현장에서 그때그때 여건에 맞게 준 변화가 만든 엉성한 형태였다. 두 건축가는 일반적인 건축 설계법으로는 나오기 어려운 이 오묘한 형태에 매력을 느꼈다.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평면은 다루기 어렵고 난감하지만 무척 흥미로운 구성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레이아웃을 가능한 따르는 기준으로 설계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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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시간의 디자인화
주방을 포함한 거실과 네 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전봇대집의 2층은 사무 공간으로 변모했다. 건축가들은 이곳을 사무실로 고치면서 기존의 집이 지닌 기억을 새로운 장소에서 전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작업 과정에서 기존의 천장을 드러내면서 몇몇 벽이 천장과 맞닿아 있지 않음을 확인했는데, 이 또한 전봇대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소음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을 슬라브까지 높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구획만 할 뿐 구조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이 벽체들은 사무 공간을 분리하는 파티션으로 활용하고, 천장과 벽 사이 틈에는 선형의 간접 조명을 더해 생경한 구조를 도리어 강조했다. 이로써 한때 누군가의 방은 벽 사이로 빛과 소리가 흘러가는 열린 사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건물이 축조된 과거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공간화하는 동시에 여러 개의 벽으로 잘게 나뉘어 공간이 협소해 보이는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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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과 마찬가지로 2층 벽 또한 표면을 겹겹이 감싸고 있던 도배지와 미장을 모두 제거하고, 가장 깊숙이 자리한 조적벽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누런빛이 돌고 벽돌 입자가 커 그 표면이 울퉁불퉁한 벽은 그대로 살려 시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요소로 삼았다.

전봇대집과 같은 정방형 건물의 경우 외벽에 난 창만으로는 공간 중심부까지 빛이 도달하기 어렵다. 밝은 사무실을 만들기 위해 상판 한쪽에 작은 천창을 냈는데, 천장 타공 과정에서 드러난 철근으로 인해 바닥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무척 아름다웠다. 이 철근 또한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아 ‘건물이 지닌 시간을 주요 디자인 요소로 전용한다’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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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에 대한 존중,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그것과의 실질적인 공존을 생각하면 현실적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것들’에 담긴 시간을 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차적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전봇대집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특유의 재치와 순발력으로 끌어안았다. 골목길에 놓인 전봇대와 낡은 건물 뿐만 아니라 오래된 동네를 아우르는 넉넉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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