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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나그네의 ‘출근하는’ 집

[People] ‘해방촌 해방구’ 건축주 한재훈 씨의 집 이야기
ⓒBRIQUE Magazine
에디터. 김윤선  사진. 최진보

 

한재훈 씨는 매일 아침 집으로 출근을 한다. 재택근무라도 하는 거냐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집에서 집으로 출근을 한다. 읽고, 쓰고, 요리하는 그의 두 번째 집으로.
서울 도심 한복판 해방촌에 지은 세컨드하우스, ‘해방촌 해방구’에서 그의 집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해방구 건축주 한재훈 씨  ⓒBRIQUE Magazine

 

서울 도심 한복판에 지은 세컨드 하우스second house. 아직은 좀 생소한데요. 집을 짓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35년간 직장 생활을 하고 몇 년 전에 은퇴했어요. 옛날과 비교해 요즘은 자기 나이의 70~80% 젊게 산다고 하죠. 수명도 길어졌어요. 지금 제 나이가 환갑을 훌쩍 넘겨 총기야 떨어졌지만, 아직 젊죠. 게다가 걷는 거 하나만큼은 젊은 사람들보다 더 잘 걷거든. (웃음) 그럼 이렇게 팔팔한 사람이 은퇴한 다음 뭘 할까? 회사밖에 모르던 남편의 은퇴 후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할 것인가가 제 아내의 큰 고민이었어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대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건설회사에서 사외이사로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보다 업무량이 훨씬 적어요. 하지만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하길 좋아하는 제 성격을 아내가 잘 알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어요. 그런 목적이라면 살림집이 있는 서울 안에서 아무 때나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위치여야 했던 거고요.

 

집을 지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나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책이나 신문을 읽고, 메모나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인문학, 음악, 음식,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책 여러 권을 펼쳐놓고 읽곤 해요. 신문 스크랩도 열심히 하고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초대해서 제가 직접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싶었어요. 우리 말에 ‘밥 한번 먹읍시다’ 하면 본인이 밥을 사겠다는 거잖아요? (웃음) 요즘은 밥을 같이 먹더라도 돈은 각자 내는 게 자연스럽다더군요.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선 내가 초대해서 밥 한 번 대접하는 집이 되었으면 했어요.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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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농촌에 살았어요. 가끔 친구 네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각자 집에 놀러 가면 그 집에서 지어주신 밥도 먹고 하룻밤 자고 다음 날 같이 등교를 했죠. 또 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일주일씩 머무르기도 하고. 그런 경험과 정서에 대한 아련한 향수라고 할까. 솔직히 요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드물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따뜻한 음식을 함께 먹으며, 사람 사이의 정과 온기, 교제와 소통, 공유와 경험. 그런 것들을 나누고 싶었어요. 그게 이 집에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자, 집의 출발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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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그런 생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네요. 살아보니 어떠세요?

하지만 그 생각들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고,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게 우선이에요. 선의로 손님을 초대한다 해도, 누군가는 제가 밥해주는데 생색을 낸다거나, 집을 과시하는 거로 느낄 수도 있거든요. 또 남의 집에 초대받으면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부담이 될 수도 있고요. 한 번은 지인을 초대하는데 해방촌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이 집 주소를 알려준 적도 있어요. 식당 이름이 뭐냐고 묻는 통에 적잖이 당황했었죠. (웃음) 그렇게 무방비로 오면 서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 배려가 없으면 선의가 되레 부담이 되고 말아요. 여기 온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게 제 목적인데, 그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으면 제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거거든요. 사람을 대접한다는 건, 그렇게 낮은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더군요. 제겐 그게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숙제가 됐어요. 올해는 그걸 어떻게 풀어볼까 고민을 많이 하죠.

저는 회사에서 CFO(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재무책임자), CEO(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경영자) 생활을 오랫동안 했어요. 그래서 직설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게 익숙해요. 한마디로 ‘지적질’의 대가죠. (웃음) 물론 회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일하는 이익 집단이지만, 제 언행으로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이제는 그런 걸 좀 풀어 보려 해요. 그게 제가 이 집에서 하고자 하는 목표 중 하나예요. 그러기 위해 이 집이, 이 공간이 일종의 수단이자 도구가 되는 것 같아요.

 

ⓒBRIQUE Magazine

 

그동안 어떤 분들이 이 집에 왔다 가셨나요?

저처럼 은퇴한 분들을 많이 초대했어요. 현역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여기가 아니라도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 많잖아요? (웃음) 제가 회사에 다닐 적에는 일과 관련이 없는 주변 지인들과는 바빠서 밥을 잘 못 먹었어요. 대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도 도통 시간이 없었지요. 그분들을 초대해서 대접하니까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학교 후배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면담하러
찾아오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동네 이웃 할머니도 한 번 모셔서 점심을 대접했어요. 작년 3월에 입주한 이후로 16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들렀어요. 한 달에 서너 팀 초대하는 게 목표였는데, 결과적으로 대여섯 팀이 왔다 갔으니 아주 호황이죠. (웃음)

한 번은 조카가 집을 이사하는데,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 이 집을 며칠 내주기도 했어요. 제 딸들이 지인을 초청해서 1층에서 행사를 하기도 하고요. 출입구가 분리되어 있어 다른 사람이 1층을 쓰고 있어도 저는 다른 층에 있으면 되니까, 집을 두 채처럼 쓸 수 있다는 게 아주 좋은 점입니다. 3층에 돌 상을 차려서 손주 돌잔치도 여기에서 했어요. 사돈을 초대해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고요. 사돈을 집으로 초대하긴 어려운데, 이 공간은 그런 부담이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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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많은 동네 중에서도 어떻게 해방촌을 선택하게 되셨나요?

그야말로 우연이었어요. 아내와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연을 맺은 거예요. 물론 계속해서 서울 도심 속에서 은퇴 후 시간을 보낼 공간을 물색하고 있던 터라, 결정이 더 빨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살림집이 아니라서 규모가 작은 집을 찾고 있었는데 이 집이 적격이기도 했고요. 이희승 님의 수필 중에 ‘딸깍발이’라고 있어요. 저는 교과서에서 그걸 보고 자란 세대라 그런지 남산 밑에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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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가진 매력도 상당해요. 매력을 알아본 젊은 친구들도 은근히 많이 살고요. 동네 사람들도 대체로 온화해요. 언젠가 2층에 올라가는 길에 대문 밖에 일면식도 없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는데, “밖에 바람이 세게 부니 모자를 써야 해.” 하시더군요. (웃음) 푸근하죠? 동네의 정서가 제가 평상시에 갖는 정서와 비슷해서 더 와닿았죠.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이곳저곳 살펴보는 걸 좋아해요. ‘나그네’와 같은 마음으로 동네 곳곳을 걸어 다녀요. 남산도 가고요. 해방촌 오거리 주변과 신흥시장을 비롯해 순댓국집, 국숫집, 떡볶이집… 구석구석 샅샅이 구경하면서 눈요기를 해요. 아주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푸근하고 걷는 재미가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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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면서 건축가에게 요구했던 사항은 무엇이 있었나요?

설계에 앞서 원하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달라고 요청하시더군요. 그래서 ‘해방촌 해방구 단상’이라고 이름 붙여서 집의 용도와 고려 사항을 비롯해 제가 집에 대해 생각하는 단어와 문장을 적어 봤습니다. 일본 가정집의 작은 정원인 ‘쓰보니와(坪庭)’, 안도 다다오의 4X4 House, 르 코르뷔지에의 오두막 등 작은 집에 대한 사례도 조사했죠. ‘작지만 우아한’ 집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mundoehoje

 

제 아내와 두 딸이 디자인과 라이프스타일 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한 달에 한 번 설계 미팅을 할 때마다 네 가족이 모두 참석해 서너 시간씩 대화를 나누면서 설계를 완성하는데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어요. 저는 공간 감각도 별로 없고, 복잡한 건 질색이거든요. 설계 과정에서 미리 모형도 봤지만, 솔직히 이 집이 완성되고 나서야 정확한 모습을 알았을 정도니까요. (웃음) 결국 이 집은 아내와 딸들이 만들어 줬어요. 특히 아내의 열정과 깊은 고민이 없었다면 이 집은 절대 지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요즘 주말에 가끔 아내와 함께 이 집으로 와요. 살림집에선 주로 아내가 요리하지만, 여기에선 무조건 제가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다 합니다. 제 나름의 감사 표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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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1층에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에요. 마치 식당이나 카페처럼요.

처음부터 주방과 서재 공간을 분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사실 엄청나게 고민이 많았죠. 신발 신고 들어오는 집을 본 적이 없으니까. 공간을 효과적으로 분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2층을 출입구로 해서 거기에서 신발을 벗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었고요. 작은 집이라 자칫 옹색해질 수가 있으니까 작은 공간을 어떻게 우아하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안 그래도 공간이 좁은데 신발 벗는 현관을 두 개나 만드는 건 역효과가 날 것 같았고, 차후에 혹시라도 1층 공간을 다른 용도로 쓸 것을 고려하면 외부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으니까 현재 모습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죠.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웃음) 아주 특별한 공간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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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모습을 가진 집이든 결국 집은 사람이 만들어가는 곳이에요. 아무리 근사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따라 집의 쓰임새와 가치가 달라지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침에 눈만 뜨면 여기에 오고 싶어요. 그래서 매일 회사 출근하듯이 이 집으로 출근을 합니다. 그러니까 집은 ‘오고 싶은 장소’, 또는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거기엔 안온함과 푸근함의 정서가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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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회사에서 일한 경험 때문에 저는 직업병처럼 무엇을 보든 ROI(Return On Investment, 투자수익률)에 대한 생각이 몸에 배었어요.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집을 지으면서도 이렇게 돈을 쓰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ROI는 꼭 돈으로 환산할 게 아니라, 본래 추구했던 가치를 획득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집을 투자로 보고 돈으로 따지는 수익만 생각한다면 제가 이런 집을 지을 이유가 없죠. 그렇지만 제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가 사람들과 밥을 나눠 먹는 거라면,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둔다면 이 집은 충분한 ROI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10년, 그러니까 일흔다섯 살까지는 여기에서 밥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후에 제가 이 집을 활용하지 못하더라도, 게스트하우스로 쓰던 1인 식당이나 공유 주방으로 만들던, 상황에 맞춰 집을 다르게 쓸 수 있는 장치들을 공간적으로 다 만들어놨으니, 이후에도 충분히 지속해서 가치가 유지될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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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 이 집에서의 꿈이 있다면요?

지난 연말에 친분이 두터운 지인으로부터 연하장을 하나 받았는데 한 문구를 보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신 말씀인데,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문장입니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며 사랑을 베풀라는 의미겠죠. 우리가 참 욕심도 많고, 다툼도 많고, 증오도 많은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말씀을 새해를 맞이하면서 제 삶의 좌표로 삼아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 내가 오늘도 밥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더 열심히 밥을 해줘야겠다!’ 오늘 저녁에도 밥 먹으러 오는 손님이 있어요. 인터뷰 마친 다음에 어서 준비해야 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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