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가는 가족

[Story] 빛의 우물 '정, 은설 井, 銀雪' #1
ⓒYoon, Joonhwan
에디터. 윤솔희 객원에디터  사진. 윤준환, 윤현기  자료. 정영한 아키텍츠 YounghanChung Architects

 

정: 건축가가 만든 빛의 통로
건축가는 132m2(45평) 남짓한 크기의 땅에 우물 정(井)자를 그렸다. 서로 포개진 네 개의 획을 기준 삼아 공간을 나누어 개구부를 내고 창을 만들었다. 중앙의 네모는 물을 가두는 우물처럼 오로지 빛을 담는 통로로 삼았다. 다시 말해 이 빛나는 통로를 내어 지붕 아래 모든 공간에 오늘의 날씨와 자연의 섭리를 가장 먼저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이는 건축가가 2010년 초반부터 연구해 온 실험주택의 정신이자 거주자 스스로 일상을 감지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바람에 근거한다. 이 우물 정의 건축이 바로 부산시 민락동에 자리 잡은 4층짜리 단독주택 ‘정, 은설’이다. 정영한 아키텍츠의 어젠다인 실험주택에서 나온 새로운 제안이자 4인 가족과 2마리의 반려견이 함께 사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다. 실험에는 응당 ‘왜 무엇이 어느 때에 옳았고, 또 무엇이 어째서 기능하지 못하는지’와 같은 해석과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Yoon, Joonhwan
ⓒYoon, Joonhwan

 

은설: 은준과 설아의 집
‘은설’은 은준과 설아 두 아이의 이름에서 음을 하나씩 따온 단어다. 공교롭게도 빛날 은銀 자에 눈 설雪 자가 모여 영롱하게 빛나는 알루미늄 파사드에 백설기같이 하얀 실내 모습과도 딱 어울리는 이름이 됐다. 정슬기와 설윤형 부부,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은준과 설아, 4인 가족은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홀연히 부산의 단독주택으로 사는 곳과 사는 방식을 바꿨다. 정, 은설에서 꾸려가는 삶이 아파트에서의 삶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이들 부부는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느끼는 게 많아요. 이곳에서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저희가 오히려 배워요.” 일단 거주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탐구 의지로 비치어 봤을 때 실험은 꽤 순항 중인 듯하다.

집에서부터 차로 10분이면 신도시 마린시티에 훌쩍 갈 수 있고 도보로 15분이면 광안리 해수욕장이 나온다. 백사장을 따라서는 요즘 ‘힙하다’는 브런치 카페나 베이커리 숍이 줄지어 등장하므로 동네 마실 돌기에도 충분한 환경이다. 대지 동쪽으로는 백산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주위로는 준공된 지 40년 정도 된 저층 단독주택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으니 아늑하고 조용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2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정슬기 씨가 땅을 보러 간 날 그 옥상에 올랐는데 탁 트인 동네 전경과 해안가 고층 빌딩 사이로 빠끔 난 틈에 광안대교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토지 가격도 예산 범위에 들거니와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환경이라고 여긴 그는 곧 정, 은설의 터로 이곳을 결정하게 이른다.

 

ⓒYoon, Joon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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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바닥
비탈진 골목과 평행하게 뻗은 계단 10개 정도를 오르면 정, 은설만의 포치에 들어서게 된다. 사람이 들어가고 나가는 모습이 골목에서 바로 보이지 않게끔 살짝 가린 막이다. 여기서 은빛 알루미늄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몸을 돌려 고개를 들면 커다란 공간 여기저기에 네모난 슬라브가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정영한 아키텍츠의 ‘부유하는 바닥’이라는 제안이다. 똑같은 크기의 바닥을 차곡차곡 쌓는 식으로 층을 구분하는 대신 서로 다른 크기의 바닥을 이어 붙이거나 높낮이를 달리하는 식으로 공간을 구분해보자는 뜻이다. 그 제안처럼 2층 거실 위에 자녀의 놀이방, 아이 침실, 공부방, 테라스, 서재, 정원 욕조, 부부 침실이 이어진 듯 분리된 듯 관계를 맺고 있다. 실내의 열린 틈 사이로 갖고 간의 시선과 대화가 이어진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만 보이지는 않는 공간의 오묘함도 이곳의 재미다. 1층의 차고와 여가실 동선으로는 현관문 말고도 건물 둘레에 샛길을 따로 내두었다.

 

단면도 ⓒYounghanChung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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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골 구조라는 해법
벽도 없고 문도 없는 집 모형을 본 정슬기, 설윤형 부부의 첫 마디는 “지어질 수 있나요?”였다. 이렇듯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구조를 실현한 해법은 철골 구조에 있었다.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하기에는 자칫 구조체가 비대해져 공간 활용도가 떨어질 것이었다. 정영한 아키텍츠는 구조 기술사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우물 정자 형상을 기준 삼아 기둥의 위치를 정하고, 방 중간에 들어설 기둥의 존재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재 단면을 최대한 세장하게 설계했다. 기둥의 두께는 150X150mm이다. 또한 슬라브 단면이 모두 보인다는 점, 그간 주거공간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철골이라는 구조체가 등장한 점 등을 고려해 각 부위의 마감 퀄리티를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냉난방 설비의 합리적인 유지 관리를 위해 남쪽과 북쪽으로 피트PIT(건축 설비나 배관 등을 설치하기 위해 만든 공간)를 만든 것 역시 정, 은설만을 위한 솔루션이었다.

둘도 없는 놀이터
부유하는 바닥은 아이들의 둘도 없는 놀이터로 톡톡히 기능하고 있다. 2층 거실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를 따라다니며 놀던 아이들은 때가 되면 놀이방에, 침실에, 공부방에 올라 또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탐험한다. 공간마다 층고가 다르고, 눈에 맺히는 집의 장면이 다르고, 창문 너머의 동네 풍경이 다른 것이 사는 이들에게 색다른 재미다. 그러니 정, 은설은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신비로운 동굴이자 놀이터다.

 

ⓒYoon, Joonhwan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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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필요충분조건, 빛
‘빛의 우물’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이 10m에 이르는 보이드 공간을 말한다. 이 길을 따라 집에 빛이 드나든다. 덕분에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 동이 트고 달이 뜨는 하루의 흐름을 거주자는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집이다. 사실 천창은 측창을 많이 두지 않고도 빛을 충분히 실내로 들이려는 전략으로 설계했다. 사방으로 주변 건물이 빼곡히 서 있는 터라 측창을 내더라도 거주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사용 빈도 자체가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에 다른 건물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쪽으로만 측창을 내고 최대한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정, 은설 가족에게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물었더니 ‘ㄱ’자 측창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주방의 식탁, 빛의 우물 바닥인 거실 중앙, 4층 테라스 등을 꼽았다. 모두 하늘을 끼고 있는 자리다.

고정된 벽과 문 대신 가변형 블라인드
정영한 아키텍츠는 앞서 ‘9X9 실험주택'(2013)에서 실내를 유리벽으로 구획하고 사용자가 블라인드를 조절해 공간을 가변적으로 쓰도록 한 실험을 했었다. 이번 정, 은설은 그 실험주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정, 은설은 다른 집처럼 솔리드한 벽과 문은 없으나 빛의 유입을 조절하고 경우에 따라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서 전동식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스위치 몇 개를 누르면 금세 측창과 천창에 커튼이 생기고 실내에 벽이 등장한다. 보통 아이들이 잠을 잘 때 침실을 아늑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린다. 수동 블라인드보다 비용은 좀 더 드는 선택이었지만 몸을 편하게 해주는 투자였다.

 

ⓒYoon, Joon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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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 있는 집
흑자는 건물 파사드에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보고 폐쇄적인 집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알루미늄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집이라 하기에는 차가운 인상이라고 말할 테고, 계단이 많아 번거롭고 벽과 문이 없어 살기에 곤란할 것이라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 은설 내부로 직접 들어가면 이 모든 것이 성급한 우려였음을 온몸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껍질은 닫혀 있어도 속으로는 활짝 열린, 충만한 빛과 하늘로 열린 길이 난 따뜻한 집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 은설은 여러 개의 층이 일상을 여러 개로 구분하고 또 이를 합하고 곱하여 하루를 더욱 풍성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다. 계단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이 집은 4층짜리 단독주택 아니던가

실험은 진행 중
건축가 정영한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건축주 직영 시공이었기에 건축가의 세심한 지원과 관리가 더욱 필요했다. 이에 전반적인 공정관리, 시공관리, 공정별 업체 선정 및 매니징까지 맡아 일주일에 3일은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건축주도 마찬가지다. 골조가 올라가는 날 드론 촬영을 직접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현장에 붙어있을 만큼 집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다. 그만큼 잘 지어보자고 다들 중지를 모은 결과다. 성급하게 실험의 성패를 가리기에 정, 은설은 아직 두고 봐야 할 것이 많다. 살면서 이 공간이 좋으면 왜 좋은지, 불편하면 왜 불편한지, 왜 그간 이 사실을 몰랐는지, 소중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일단 두 아이는 달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비가 떨어지는 모양을 발견하며 곧잘 자신만의 유레카를 외치기 시작했다.

 

ⓒYoon, Joon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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