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의 새로운 문화코드를 담다

[Place_case] ⑤ 애프터 저크 오프After jerk off
저녁시간에 본 5층 ©Place_case
글 & 사진. Place_case (플레이스 케이스)

 

일상에 영감과 풍요를 더하는 공간을 찾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p.lace_case 운영자이자 <브리크 brique> 애독자인 플레이스 케이스 Place_case님을 전문 기고자로 초대했습니다.
실내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공간 디자인PM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장소들을 큐레이션하여 주변 이들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펼치는 공간 이야기를 따라가며 여러분도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이름이 뭐라고? 뭐 하는 곳이야?” 이곳을 약속장소로 보내면 지인들이 흔히 보내오는 반응이다. 소셜미디어SNS시대, 대부분의 장소들은 ‘미리 보기’가 가능하다. 상호명과 위치, 사진과 메뉴를 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분위기가 있어 방문 전에 기대 포인트들을 짚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이러한 미리 보기에 쉽사리 짐작의 여지를 내어주지 않는 곳이다. 을지로3가 뒷골목에 자리했다는 이유로 여느 ‘힙지로’ 카페처럼 레트로하고 인더스트리얼한 감성의 공간을 생각했다간 큰코 다친다. 리뷰 사진 속 잉어가 헤엄치는 바, 거대한 불상과 세미누드 아트워크를 보면 예측이 빗나갔음을 금새 깨닫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의 조합이 독특한 이 복합공간은 이름도 아방가르드한 ‘애프터 저크 오프After jerk off’다.

 

4층에 위치한 바의 전경 ©Place_case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액자 속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출입문이다. ©Place_case

 

영어 속어인 ‘애프터 저크 오프After jerk off’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현자 타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무념무상의 시간,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현자와 같은 상태 혹은 현실을 자각하는 시점을 뜻한다.

이 이름은 브랜드를 총괄하는 황인섭 대표가 클럽을 다니던 시절 가졌던 불만을 투영한다. 그는 많은 클럽이 성적 욕망 충족을 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음악과 춤, 좋은 술을 온전히 즐기기엔 아쉬운 환경이라고 느꼈다. 그럴 바에야 다들 스스로 만족한 뒤(?) 모인다면 이러한 문화적인 요소들을 조금 더 편히 즐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현재 브랜드의 모태가 되었다.

따라서 애프터 저크 오프의 공간은 다양한 문화코드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편집샵과 카페, 다이닝바가 함께 있는 이곳은 ‘Neo-Asian, New Stance, New Generation 네오 아시안, 뉴 스탠스, 뉴 제너레이션’ 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공간과 음식, 음악을 소개한다. 넓게는 국적을 넘나드는 범아시아적 스타일을, 좁게는 LGBT(성소수자)와 Vegan(채식주의)과 같은 서브컬처를 조명하며 새로운 세대를 위한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낮에 본 5층 공간의 전경 ©Place_case
저녁시간에 본 5층 ©Place_case

 

“이곳에서는 조금 불편해서 외면했던 것들을 들여다보고, 고정관념처럼 내재되어 있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허물고 싶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일상 속에서 접해 자극을 받고 보다 넓은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랐습니다. – 황인섭 대표

 

인상적인 것은 선정적인 이름과 달리 공격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심볼과 시각적 요소들이 파격적이지만 과격하지 않게 충돌하고 중첩되어 현시대의 아시안 코드와 서브컬처를 대변한다.

공간의 공통적인 오브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상이다. 목재, 석재, 금속을 사용한 인도와 태국식 불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현자인 부처는 이곳에서만큼은 종교적 의미를 벗고 인센스 향과 전자음악 속에 미적 요소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한국 전통 민화와 MZ세대 아티스트들의 세미누드 사진 작품들도 한 공간에 배치된다. 그리고 동남아를 연상시키는 열대식물과 1990년대 홍콩 스타일의 갓 등, 붉은 네온 조명과 푸른빛의 잉어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낯익은 듯 낯선 분위기를 연출한다.

 

4층의 수족관으로 제작된 바테이블 ©Place_case
저녁시간의 4층의 모습 ©Place_case

 

현재 개편 중인 3층의 편집샵과 카페 위로는 대조적인 분위기의 다이닝바가 두 개 층에 거쳐 펼쳐진다. 4층 바는 세기말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에서 영감을 받았다. 특히 수족관으로 제작된 바테이블은 신비로운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하는데, 푸른 네온 조명을 받아 유영하는 잉어들이 붉은 네온빛 벽과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4층이 비밀스러운 지하 벙커와 같다면 5층은 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인 유리의 섬 같다. 삼 면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삭막한 도시 풍경을 대치하는 것은 2층 높이의 버려진 유적지 형상의 니치niche 벽체이다. 역시나 크고 작은 불상들로 장식된 이 벽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태국의 아유타야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벽의 중앙에 자리잡은 비키니 입은 여인은 낮에는 자연광으로 밤에는 네온조명으로 점철되는 이곳을 늘 내려다보고 있다.

 

을지로 도심이 보이는 5층의 뷰 ©Place_case
버려진 유적지에서 모티브를 얻은 5층의 벽 ©Place_case

 

“이 공간들처럼 마구 뒤섞인 것이 현재 아시안 MZ 세대들의 정체성이 아닐까요? 서양 문화를 익숙하게 소비하고 접해왔지만 동시에 동양적 사상과 지역적 취향이 혼합된 문화처럼요. 이곳을 통해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서양의 시선으로 보는 동양이 아닌 ‘동양이 바라보는 동양’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 황인섭 대표

 

공간처럼 음식 또한 퓨전이다. 시즌별로 바뀌어 온 메뉴로는 고수 페스토 골뱅이, 잠봉햄을 곁들인 인도식 로띠번, 레몬 버터 성게알 파스타 등 다양한 나라의 레시피와 식재료가 혼용된 메뉴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폭넓은 내추럴 와인 셀렉션을 보유하고 있어 생경한 메뉴들과 페어링하면 뛰어난 미식 경험을 선사한다.

애프터 저크 오프에 방문하는 이들은 처음에 놀라움과 어색함을 느끼지만 어느새 전자 음악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익숙하면서도 이국적인 요리를 맛보며 처음 보는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사무실과 상점이 즐비한 서울 도심의 뒷골목,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이 비밀스러운 공간은 새로운 아시아의 현주소가 아닐까?

 

After Jerk Off.

서울 중구 수표로 42-21, 3층 ~ 5층
17:00 ~ 21:00 매주 월, 화 휴무
www.instagram.com/after_jerk_off

*3층 편집샵과 카페는 현재 개편 중(2022년 상반기 오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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