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음의 의미

[Place_case] ⑥ 힙지로의 숨은 예술 공간 ‘갤러리 엔에이N/A’
©Place_case
글 & 사진.  Place_case (플레이스 케이스)

 

일상에 영감과 풍요를 더하는 공간을 찾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p.lace_case 운영자이자 <브리크 brique> 애독자인 플레이스 케이스 Place_case님을 전문 기고자로 초대했습니다.
실내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공간 디자인PM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장소들을 큐레이션하여 주변 이들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펼치는 공간 이야기를 따라가며 여러분도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공업사들로 즐비한 을지로4가의 뒷골목. 한 금속가공소 옆 흰 철문에 A4용지 한 장이 붙어있다. 녹슨 문을 밀면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끼이익’ 소리와 함께 위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난다. 갤러리 엔에이 N/A 입구이다.

엔에이는 ‘not applicable, no answer’의 이니셜로 만든 약자로 해당 없음 혹은 유효하지 않음을 뜻한다. 갤러리의 공동 운영자이자 사진작가인 오진혁 대표는 엑셀Excel 프로그램에서 종종 사용하는 N/A라는 글자가 마음에 들어 갤러리의 상호명으로 택했다고 한다. 그는 심오한 뜻은 없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을지로의 예술생태계에서 엔에이는 의미 있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갤러리의 출입문 ©Place_case
계단을 올라오며 난간 너머 보이는 갤러리 전경 ©Place_case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든 생각은 ‘여기에 이런 곳이?’라는 놀라움과 ‘몇 년 뒤에도 이 자리에 있을까?’라는 노파심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철공소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은 이곳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을지로를 탐방하는 젊은이들이 우연히 들어오기엔 중심 상권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그야말로 작정하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만 효용이 있는 곳인 셈이다. 이렇게 애매한 위치에 간판조차 없는 곳이 4년째 성업 중인 데는 어떤 비결이 있는 걸까?

엔에이의 전시를 살펴보면 관람객과 작품 간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갤러리는 상업화랑으로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고 주체 또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그 공간의 역할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작품을 가까이에서 세밀히 살펴보고, 때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며 다각도로 감상하고 교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엔에이는 이에 탁월한 것 같다. 다소 투박한 공간이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인 설계로 관람객을 작품의 세계로 이끈다.

 

©Place_case
벽의 개구부를 이용한 착시 효과를 통해 전시 주제인 ‘Another Depth’를 표현한 모습 ©Place_case

 

외부 출입문과 직결된 계단을 올라와 만나는 2층에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벽체가 있다. 세 개의 큰 개구부가 있는 벽체인데, 하나는 문이 없는 게이트이고, 두 개는 창이 없는 창틀이다. 얼핏 보면 지나가는 통로, 혹은 무언가를 얹어두는 일차원적인 기능만 가졌을 것 같은 개구부들은 이곳에서는 작품 감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창 뒤쪽 벽에 작품을 중첩시켜 착시 효과를 통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하거나, 창틀에 쿠션을 올려두어 앉은 눈높이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하거나, 때로는 무언가를 관통 시키고 사람이 그 위를 건너가게 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저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는 벽인데, 엔에이는 매 전시마다 이것을 변용시켜 작품 감상 경험을 고도화시키는 프레임으로 활용한다.

 

검은색 플랫폼을 설치해 개구부 아래를 통과하며 작품을 바라보도록 설계된 전시 ©Place_case
©N/A

 

개구부의 테두리 또한 인상적인데, 시간의 적층을 보여주듯 기존의 벽돌 벽체의 단면을 노출시킨 채 흰 벽을 앞뒤로 샌드위치처럼 붙어있다. 이 개구부가 난 벽은 창문을 막아 설치한 반대편의 새로운 벽과 마주한다. 양 옆으로는 바랜 옥색 계단 난간과 오래된 페인트 흔적을 남겨둔 벽이 평행을 이룬다. 네 개의 면이 옛것은 옛것끼리, 새것은 새것끼리 대치하고 있어 공간 내 균형감을 부여한다.

2층 뒤편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 마주하는 3층은 아래층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느낌이다. 20년 넘게 비어있던 가정집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박공형태의 오래된 목재 천정이 전체 공간을 덮고 있다. 새로 들어선 흰 벽체들은 기존 구조턱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 인해 마치 벽이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묵직한 천장 아래 중력에서 벗어난 듯한 수직의 면들, 그리고 그 면에 걸린 작품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흑백의 출입구를 연출한 삼 층 전시실 입구의 전경 ©Place_case

 

삼층에는 출입구가 나란히 배치된 두 개 전시실이 있다. 기존 건물의 틀을 유지하다 보니 좌측에 작은 전시실이, 우측에 큰 전시실이 자리한다. 오 대표는 작품 설치의 편의를 위해 하나의 커다란 실로 통합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종종 하는데, 아직까지는 두 개로 나뉜 공간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보고 있다.

한 전시에서는 왼쪽을 암실로 만들고, 오른쪽은 조명을 환하게 켜 두어 드라마틱한 흑백의 입구를 연출하기도 하고, 날이 좋은 여름에는 창문 옆에 그와 비슷한 액자로 맞춘 풍경 사진을 걸어 실재와 이미지를 함께 감상하게 하기도 한다. 공간의 구조를 활용한 작품의 디스플레이는 그 자체로도 작품이 된다.

 

창문의 풍경과 액자의 풍경을 나란히 연출한 작은 전시 ©Place_case
작품의 무게중심에 따라 배치의 높낮이를 달리한 큰 전시실의 전경 ©Place_case

 

채광이 잘 드는 베란다로 나가면 옛 부엌의 흔적과 함께 PB 제품, 그리고 사진집과 도록들을 볼 수 있다. 독립출판사이기도 한 엔에이에서 출간한 서적들이다. 엔에이는 오픈 이후 다양한 행보를 밟아왔는데 초창기에는 카페 겸 바로 운영하며 커피, 와인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문화를 장착시키고자 했었다. 그러나 식음이 우선시 되고 작품은 사진 촬영의 배경이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지속되자 과감히 수익을 포기하고 갤러리로만 운영 중이다.

 

“음료 판매는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쉬어갈 수 있는 자리들은 여전히 남겨두었어요.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오래 머물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영감을 얻어 가길 바랍니다. 구매도 하시고요! (웃음)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누리는 즐거움을 알아가길 바래요.” –오진혁 대표

 

굿즈와 서적을 판매하는 베란다 공간 ©Place_case

 

올해로 4주년을 맞이하는 엔에이는 사진 작품에서 점점 확장해 회화, 공예, 설치미술까지 아우르는 전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해진 작품에 따라 더욱 다채롭게 변모중인 공간은 엔에이만의 개성과 매력을 담아내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두 층을 합쳐 약 45평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지만 폭넓은 경험을 선사하는 이곳에 봄날의 영감이 가득하다.

 

엔에이 N/A.
서울 중구 창경궁로5길 27,  2-3층
화~토  12:30~19:00 (일, 월 휴무)
https://www.instagram.com/nslasha.kr/

 

You might also like

낡은 여인숙의 재탄생

[Place_case] ⑦ 아름다운 소생蘇生의 공간, 카페 '레레플레이'

생활 가구를 잘 만드는 사람들

[Uncommon Living] ⑦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 스탠다드에이

낡은 기술이 완성한 디자인 조명

[Uncommon Living] ⑥ 디자이너와 산업 장인의 상생 도모하는 아고

취향을 담아 고쳐낸 집

[Story] ‘이치 하우스’ 공간 이야기 #1

패브릭 아틀리에의 한 끗

[Uncommon Living] ⑤ 섬세하고 견고한 직물 제품을 만드는 일상직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