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시간의 발견

[스페이스 리그램] ③ 베란다와 발코니에 대한 생각
ⓒGettyImagesBank
글. 김은산  자료. Getty Images Bank

 

‘기억극장(아트북스, 2017)’,  ‘애완의 시대(문학동네, 2013)’, ‘비밀 많은 디자인씨(양철북, 2010)’  등을 통해 사회적인 분석과 미학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작업해온 김은산 작가가 ‘스페이스 리그램space regram’이라는 연재로 <브리크brique> 독자와 대화의 문을 엽니다. 인문학과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한 그는 인문서점 운영과 사회주택 기획, 지역 매체 창간 등을 통해 공간과 사람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한 컷의 사진을 매개로 도시인의 일상을 돌아보는 그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짧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공간과 건축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건축가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세 명의 건축가(윤한진, 한승재, 한양규)가 함께 하는 ‘푸하하하프렌즈’는 그 이름만큼이나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멤버 중 한승재 건축가가 건축 설계와 함께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이채로웠는데, 또 다른 멤버인 윤한진 건축가가 이번에 독립출판으로 작품집 <우리는 무엇을 더듬었나>를 발표한다기에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윤한진 건축가의 독립 출판물 <우리는 무엇을 더듬었나> ⓒ김은산

 

세 편의 글이 담긴 작품집이었는데, 첫 번째 글 ‘지옥에서 온 베란다’는 건축가들의 신체적 기억과 일상의 자의식이 공간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평소 멤버 중 한 명(한승재)이 다른 멤버(한양규)를 베란다에 가두는 장난을 즐겨 했고. 그 일로 벌어진 해프닝이 이후 이들이 설계한 건물의 베란다 공간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관찰한 이야기였다. 친구를 필사적으로(?) 가두었던 한승규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한 연희동 골목집 주택의 베란다를 동네와 집을 연결하는 장치로 적극적으로 이용한 반면, 매번 갇힌 채 꼼짝할 수 없었던 한양규 건축가가 작업한 디스이즈네버댓 사옥의 베란다는 특별한 기능이나 응시하는 시점이 없는 공간이지만 주변의 풍경을 흐릿하게 만드는 매우 시적인 공간으로 등장한다.

 

푸하하하프렌즈가 설계한 연희동 단독주택 ‘집 안의 골목’ ⓒ Kyung Roh

 

윤한진 건축가의 글을 읽으며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마니아의 소설가 헤르타 뮐러Herta Müller의 글이 떠올랐다. 소설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벨상 수상 연설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뮐러는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치하 기계공장에서 번역가로 일하다 비밀경찰의 협조를 거부한 일로 해고의 위협과 동료들의 냉대를 견디던 시간을 회고한다. 사무실에서 쫓겨난 뮐러는 구석진 층계로 내몰렸고, 층계 계단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두꺼운 사전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수압 기계에 대한 설명을 번역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차가운 기운을 면하기 위해 바닥에 깐, 어머니가 주신 작은 손수건이 그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자 사무실이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 <사진=위키피디아>

 

그렇게 또 다른 갇힌 시간 속에서 뮐러는 공간의 숨겨진 얼굴과 언어를 발견한다. 무심코 내딛던 층계라는 낱말의 요모조모를 사전에서 찾아보며, 층계의 첫 계단과 마지막 계단은 그 명칭이 다르며, 발을 디딜 수 있는 평평한 부분의 양옆 받침대를 ‘층계 뺨’이라 부르고, 계단 사이의 빈 공간을 ‘층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눈여겨 보지 않는 공간과 사물에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엮어 넣으며, 그런 은밀한 다정함을 통해 자신들이 하는 험한 일을 견뎌냈다는 것을 읽어낸다. 공장의 구석진 층계 계단에 갇힌 시간 동안 뮐러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 맞서 삶의 욕구로 반응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발견한 공간의 낱말을 찾는 행위는 삶을 향한 욕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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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코로나 이후 몇 년간 갇힌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된 것 같다. COVID-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유럽의 학교와 박물관, 영화관들이 문을 닫고 도시 전체가 봉쇄되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고 연주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우며 소통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로 공유되었다. 집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장치로서 발코니라는 공간의 의미를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베란다 공간에 자기만의 홈카페를 만들고, 식물을 키우는 작은 정원을 꾸미거나 홈트레이닝 공간으로 활용하는 인스타그램 피드들이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이를 단순히 또 하나의 트렌드로 읽어낼 수도 있지만, 삶의 욕구를 공간에 투영하는 다양한 시도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갇힌 시간을 통과하며 공간에 대한 자의식과 욕구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의식과 욕구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의 이름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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