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공간의 헤리티지를 묻다

[Heritage is _____.]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글. 임진영 건축 저널리스트·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의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브리크brique> vol.8 ‘Heritage is ____.’ ⓒBRIQUE Magazine

 

헤리티지heritage는 자연, 사회, 문화 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류의 유산을 말한다. 전통, 언어, 건물처럼 특정 사회의 문화에 속하는 특징으로, 과거에 만들어져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들로 정의한다. 1972년 세계유산협약을 결의한 유네스코는 헤리티지를 정의하면서 역사상, 미술상 ‘현저한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보존해야 할 유산의 특징으로 강조한다. 이 헤리티지의 다양한 사전적 정의를 관통하는 핵심적 의미에 대해 임종현 미국 헤리티지스마트컨설팅 대표는 “누군가로부터 남겨진 특별한 것”에 있다고 인용한다.

한동안 우리에게 유산은 국가적인 보호를 받는 문화재에 머물러 있었다. 그로 인해 보존의 당위성을 충분히 얻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근대 유산은 복원과 철거라는 첨예한 대치에서 소극적이고 쉬운 선택에 머물곤 했다. 반일 감정의 정점에서 연출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부터 시작해, 구조 안정성을 이유로 입면만 살려낸 서울시립미술관, 그리고 충실한 복원에 이르지 못한 문화역서울284가 그 사례다. 근·현대 산업 유산 역시 보존이나 재활용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쉽게 사라지곤 했다.

그 사이 2000년대 전후로 런던의 테이트모던, OMA와 일본 건축가 듀오 사나SANAA가 참여한 촐퍼라인 탄광의 재생 프로젝트 등 산업 시대의 유산을 문화 공간으로 재활용해 지역 재생을 이룬 해외 프로젝트들이 등장하면서, 국내에서도 산업 유산 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직접적인 활용에 이른 것은 최근 십 년 사이의 일이다. 문화비축기지, 서울로7017 등 관 주도의 인프라와 산업 유산 재활용 사업은 방치된 산업 유산을 문화 공간으로 바꾸어 나갔다.

 

<브리크brique> vol.8 ‘Heritage is ____.’ ⓒBRIQUE Magazine

 

흥미롭게도 오래된 건물을 활용하는 방식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오히려 상업 공간에서였다. 인스타그래머블 아키텍처와 레트로 열풍의 미묘한 틈새에서 시간의 흔적을 지닌 공간의 가치는 눈에 띄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간혹 ‘공사장 인테리어’라는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낳기도 했지만, 오래된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에 대한 매력은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 잡은 듯하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축적하지 못하고 상실한 오리지널리티, 즉 진정성에 대한 갈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간의 흔적은 강력한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덕분에 개발의 바람 앞에 철거 대상이 되었던 근대 유산과 산업 유산은 활용 가능한 매우 특색 있는 원전이 되고 있다. 흉내낼 수 없는 시간의 흔적, 내력을 지닌 건물을 두고 민관 모두 활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유산의 복원 혹은 재활용에 대해 논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원형 보존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또 재활용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건물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근대 유산을 활용하기 위한 기준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전문가 참여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개별 프로젝트의 자의적인 해석에 기대게 된다.

문화재처럼 원형 그대로 보존할 것이 아니라면, 전문가들은 역사적인 건물의 쓰임을 고려하는 것은 개발 압력을 버틸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다만 역사적 건물을 활용할 때 건물의 역사적 진정성과 완전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방법은 이미 역사보존학에서 정립한 여러 가지 국제적인 가이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것과 새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게 한다는 유네스코헌장에서부터, 원형을 복원하고 물리적 변형이 없는 디자인을 권하는 미국 국립공원 관리청의 권고도 결국 역사적 특징은 유지, 보존하되, 최소한의 변형을 통해 새로운 용도로 쓰도록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역사적인 건물, 산업 유산을 감성적 배경이나 시각적 오마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한 시대의 재료, 구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지할 것과 재현할 것, 그리고 덧댈 것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브리크brique> vol.8 ‘Heritage is ____.’ ⓒBRIQUE Magazine

 

한편 최근의 재활용 프로젝트는 산업 유산에서 보다 일상의 풍경으로 확장하고 있다.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최근 리모델링·리노베이션 프로젝트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 풍경을 긍정하는 제스처다. 오래된 적산가옥에서 1970‒1990년대에 집장사가 지은 집, 각 세대의 면적과 용적률이 최고의 가치였던 저층형 다세대주택까지, 우리의 도시 풍경을 만들었던 어수선하고 복잡한 요소를 다루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작업들은 시대적 상황이 비합리적으로 생성한 요소들을 차용하거나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쓰임을 읽어내고 있다.

물론 이 리모델링 과정이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축보다 경제적이지도 않고, 구조적 검토와 외장재를 털어냈을 때에야 드러나는 건물의 실제 상태로 인해 엄청난 변수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기계적인 구획으로 만들어진 1970‒1990년대 집장사 집들에도 그 시대의 산업 재료와 구법, 흔적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조건 가운데 새로운 쓰임과 공간 구성을 기획해 시간의 흔적은 남기고, 더 나은 공간을 조직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가장 보편적인 풍경에서 새로운 공간 활용과 재구성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지금의 건조 환경을 긍정하고 기억을 이어가기에 충분해 보인다. 일상의 풍경을 긍정함으로써 시대의 흔적이 축적되는 과정은 도시 환경의 시간적 연속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유산을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특별하지 않은 가치’에서 오늘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발굴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이 작업이 바로 오늘의 유산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브리크brique> vol.8 ‘Heritage is ____.’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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