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지 않고도, ‘함께’ 사는 집

[Space] 'Not Shared but Together Whom' 풍년빌라의 공간 이야기
ⓒBRIQUE Magazine
에디터. 김윤선  자료. 착착 건축사무소 CHAKCHAK STUDIO

 

집 짓기를 위한 기틀이 어느 정도 다져지자, 기획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를 구현해 줄 건축가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임태병 소장이 기획자도 건축가도 아닌, 거주자 대표이자 건축주 대행으로 나설 차례였다. 그가 단번에 찾은 이는 김대균 착착 건축사무소 소장. 둘은 오랜 시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지지해온 지인이자 동료 사이다.

풍년빌라는 과연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을까?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왼쪽)과 김대균 착착 건축사무소 소장 ⓒBRIQUE Magazine

 

집 짓기의 시작은 동네와의 관계 설정으로부터

집은 개인의 사유재산이지만 집이 모여 동네가 되고, 지역이 된다. 개인이 이기적인 생각으로 집을 지으면 지역에도 이기성이 드러난다. 결국 집은 동네를 만들고 동네는 지역을 만들며, 집과 지역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집 짓기의 시작은 집과 동네, 그리고 지역과의 관계 설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풍년빌라 역시 그 관계 설정이 설계의 실마리가 됐다.

 

ⓒDonggyu Kim

 

옛 풍경이 남아있는 동네, 응암동

우리나라에 다가구주택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주택 100만 호 정책이 실현되면서부터다. 그때 지은 주택의 원형이 우리가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1층 필로티에 주차장이 있고 2층부터는 주거 공간이 있는 4~5층짜리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이다. 하지만 1층을 주차장으로 내어 주고 나니 마당도 사라지고, 거리 풍경을 만들던 상점들도 없어졌다. 자연스럽게 골목길을 오가며 형성되었던 동네 커뮤니티도 소멸되었다. 응암동 역시 1990년대부터 지어진 다가구,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된 동네로, 주변 지역이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면서 상대적으로 저개발되어 아직까지 옛 풍경이 남아있는 곳이다. 지척에 있는 불광천은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유동 인구가 많고, 천변으로는 작은 가게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동네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동네와 관계 맺는 공간으로서의 집의 역할을 생각하며 설계를 시작했다.

 

ⓒDonggyu Kim

 

자루형 부지의 흥망성쇠

풍년빌라가 자리 잡은 곳은 도로에 접한 출입구가 자루의 입구처럼 좁게 생긴 일명 ‘자루형 부지’다. 네모반듯한 땅보다 공간 활용도가 낮아,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오는 땅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 법. 좋고 나쁨을 떠나 상황의 앞, 뒤를 고루 살펴보는 태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입구에서 부지 끝까지는 20m 남짓. 40여 평의 크지 않은 땅에서 이만큼 긴 공간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긴 공간 덕에 1층 카페 앞에는 재미있는 외부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도로와 바로 면하지 않고, 담벼락으로 위요된 공간이라 아늑하고 한적해 날씨 좋은 날이면 커피 한잔하기도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단점이라고 여겨졌던 부지 모양은 오히려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동네 커뮤니티로서 가능성도 갖게 해주었다.

 

배치도 및 1층 평면도 ⓒCHAKCHAK STUDIO

 

따로 또 같이, 세 가족의 ‘경계가 느슨한’ 삶을 위해

 

거주자의 특성을 반영한 입체적인 평면 계획

4층 건물에 세 가구와 카페를 배치한다고 하면 1층은 카페, 2층부터 4층까지는 층마다 한 가구를 배치해 평면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로 지인 관계인 세 가구가 모여 살면서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결국 각 세대를 1~2층, 2~3층, 3~4층으로 복층 형태로 입체적으로 조합한 평면 계획을 제안했다. 입체적인 공간감을 가지며 세대 간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계획이다. (이하 1~2층 건축가 임태병의 집: A세대, 2~3층 일러스트레이터 허현경의 집: B세대, 3~4층 드라마 작가 오수진의 집: C세대로 칭함.)
또한 이로 인해 침실과 거실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싶다는 A세대의 요청사항에 부합했고, B세대는 작업실과 주거 공간이 다른 층으로 분리되어 만족도가 높았으며, C세대 역시 요청했던 넓은 테라스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세 가구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조합했다. ⓒCHAKCHAK STUDIO

 

‘공유 공간’ 말고, ‘함께 하는’ 곳

세 가구의 공간이 입체적으로 엮여 있다 보니, 자연스레 접하는 공간도 생겼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풍년빌라에는 계단 외에는 공유 공간이 없다. 건축가가 아무리 공간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실제로 작동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주인이 없는 공간은 죽은 공간이 되기 쉽다. 따라서 각 세대의 개인 공간이자 집 주인에 의해 관리되는 공간이지만, 필요하면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공간들을 마련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전 세대의 커뮤니케이션 장소가 되는 1층이다. 이곳은 집과 카페 운영의 헤더 역할을 하는 A세대의 거실 공간이기도 하다. 2층은  A세대의 침실 및 개인 공간과 B세대의 작업실 사이가 그런 공간으로 꾸며졌다. 현관을 맞대고 있지만, 문을 열었을 때도 내부가 노출되지 않고 벽이 보이게 해 서로의 생활에 방해가 없도록 했다. 그럼에도 문을 완전히 열면 두 현관 공간이 연결되면서 흡사 골목길 같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3층 B세대와 C세대 침실 및 개인 공간 사이도 문을 열었을 때 거주자들끼리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마련했다.

 

ⓒDong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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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평면도 ⓒCHAKCHAK STUDIO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 현관의 확장

이 공간들은 거실, 주방 등 각자의 용도가 있는 공간이지만 그와 더불어 각 세대의 현관 역할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관은 경계의 공간이다. 벽과 문으로 구획된 물리적인 경계의 개념을 떠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이자, 안과 밖 온도 차의 경계, 소리와 빛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또한, 신발을 신고 벗는 행위가 일어나는 전환의 공간이기도 하다. 즉 현관이란 아주 많은 행위가 한꺼번에 압축된 장소이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 현관을 연결해 경계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의미 있는 확장이 일어나도록 했다. 이 공간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고, 미닫이문을 적용해 필요에 따라 완전히 개방되는 구조로 만들었다.

 

ⓒDong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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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생활의 디테일 다섯

 

끝에서 끝까지, 시선이 트인다

계단을 빼면 한 층이 17평 남짓, 작은 공간에서 심리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해소할 수 있도록 공간의 끝에서 끝까지 시선이 닿도록 설계했다. 좁은 공간에서도 건물의 끝 선이 보이니까 시선이 길어지고, 공간이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3층이 그 효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곳인데, 가로 9m, 세로 8m의 건물의 끝과 끝을 한 지점에서 볼 수 있다. 양쪽 집의 문을 열어 놓으면 그 공간감이 더욱 극대화된다.
그다음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눈높이에서 보이는 공간의 풍경이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풍경,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의 시선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풍경에는 창과 문, 빛과 재료, 가구와 사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이 결합해 조화를 이룰 때 공간의 질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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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창을 내겠소

골목 안으로 들어와 있는 북향의 자루형 부지로 무려 6개의 건물에 둘러싸여 있어 채광을 얼마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기존 건물의 창과 마주 보지 않는 곳에 창을 내는 것 또한 중요했다. 기존 건물과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사이 활용 가능한 틈을 찾아내야 했다. 주변 건물과 부딪히지 않는 틈이 있는 곳마다 환기창을 내고, 불광천이 보이는 틈새 공간도 찾아냈다. 건물로 둘러싸인 환경을 십분 활용, 앞 건물의 햇빛 반사판 역할을 기대하며 불투명 유리로 된 창을 내자 북향이라도 결코 어둡지 않은 공간이 됐다. 창의 크기도 공간마다 다양하다. 600×600mm 크기의 환기창은 앉아 있을 때 가장 최적의 풍경을 보여주는 높이에 배치했다.
조명은 조도가 항상 일정하지만, 자연광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동서남북 방향과 시간, 온도와 습도, 구름의 양에 따라서 빛이 달라진다. 그러니 단 하루도 같은 빛이 있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이치. 매일매일의 미묘한 다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집에 담고자 했다.

 

ⓒDong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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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두움으로부터

공간에서 빛을 설계하는 일은 어두움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장 어두운 상태에서부터 빛의 레이어를 하나씩 밝혀 나간다. 그렇게 해서 자연광이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보고 창을 낸 다음, 전체 조도를 간접조명으로 맞췄다. 그러고 나서 특별한 행위가 있는 곳에만 그에 맞춰 국부조명을 썼다.
간접조명은 특히 가구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빛을 발한다. 반사되어 다시 내려오는 빛이 가장 좋은데, 그때 반사체가 가구가 되면 좋다. 똑같은 조도라도 그 각도가 전체를 다 밝히기 때문이다.

 

ⓒDong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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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구체화하는 것은 가구(家具)

모든 물건은 각자가 있어야 할 위치가 있다. 물건이 제자리에 있을 때 그 쓰임새나 행위가 자리를 잡고 비로소 집의 모습이 완성된다. 그리고 가구는 물건의 위치를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즉, 집을 구체화하는 것은 결국 가구다. 범위를 좁혀보면 우리가 매일 쓰는 컵과 휴대전화도 일종의 가구다. 소파 위에 10cm의 작은 받침대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다. 풍년빌라는 가구로부터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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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재료

창, 빛, 조명, 그리고 가구···. 집의 모든 것들은 결국 어떤 재료와 만나느냐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도, 다른 공간에서 같은 분위기를 내는 것도 최전선에는 그 모든 것의 결정자인 재료가 있다. 풍년빌라는 세 가구지만 바닥과 천장재, 그리고 마감재를 통일했다. 공간마다 재료의 구분 없이 따뜻한 빛깔의 너도밤나무로 마감했다. 보통은 현관 공간을 다만 5cm라도 낮춰 바닥에 높낮이 차를 두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풍년빌라에는 높낮이 차가 있는 바닥이 없다. 입면도 마찬가지다. 창과 벽도 같은 높이로 매끈하게 떨어지도록 설계했다. 공간의 분위기를 유사한 톤으로 맞춰 공간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세 가구지만 전체가 한 공간으로 인지되도록 했다.

 

ⓒDong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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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풍년빌라 전체 스토리 담은 <브리크brique> 종이잡지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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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자세히 보기           https://brique.co/book/brique-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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