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김윤선 자료. 문도호제
‘건축, 기획, 운영.’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의 명함 한편에는 세 개의 단어가 적혀 있다. 건축가로, 기획자로, 때로는 운영자로.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홍대 카페 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비하인드B-hind를 운영했었고, 이후 단독주택을 개조해 개성 있는 작은 가게들의 안정적인 장기임대를 보장하는 플랫폼인 ‘어쩌다 가게’를 기획했다. 실체가 없는 아이디어들을 공간을 통해 실현하며 동시대 사람들이 공감하며 누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온 것.
우리 앞에 또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 2020년, 그의 집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해방촌 해방구’는 소장님이 지속해서 탐구하고 선보여 온 ‘중간주거’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최초의 결과물로 보입니다.
해방촌 해방구는 애초에 건축주가 주방과 식당, 서재를 분리해서 쓰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간주거의 개념이 녹아들 수 있었어요. 집의 일부가 집과 동네의 접점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실험해볼 수 있는 프로젝트였죠. 아마 온전한 살림집이 아니라서 부담이 덜 되었을 수도 있고, 단독주택이라면 다른 형식으로 나타났을 거예요. 최종 결과물에 따라서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해방촌 해방구를 시작으로 해서 현재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인 다른 프로젝트 중에도 중간주거의 개념을 반영한 집들이 있어요. 지인 공동체인 세 가족이 함께 사는 ‘풍년빌라’, 근린생활시설과 게스트하우스, 주택이 복합된
‘여인숙’ 등 앞으로 계속해서 중간주거의 구체적인 적용과 그 변화 양상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중간주거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중간주거는 영어로 하면 ‘Metaphase House’인데, 여기에서 ‘Metaphase’는 세포분열의 중간 단계를 말해요. 중간주거는 노년기를 시작하기 전 중년의 마지막 시기에 접어든 세대, 그러니까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의 집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로선 5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현실적으로 집을 지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거의 유일한 세대예요. 그들의 주거에 관한 고민을 다른 형식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였고, 2017년부터 준비 중인 하우스 비전HouseVision1에서 제안한 ‘홀가分(분)하우스’로부터 생각이 구체화되었죠. 자녀들의 독립으로 인해 증가하는 중년 세대의 집에 대한 물리적 부담을 덜어 줄, 조금 더 가벼운 형식의 주거를 상상해봤어요. 집과 호텔, 집과 상업시설, 혹은 집과 동네의 경계에서 유연하고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한 공간을 확보해 그 운영과 조합 방식에 따라 집의 일부가 동네의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확장될 여지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에요. 그러다 해방촌 해방구에서 이 개념을 현실화하면서 주거의 영역에만 한정하지 않고, 집과 도시의 접점을 다루자는 생각으로 확장되었고요.
*하우스비전
하우스비전은 2011년 ‘집을 통해 도시에 창조성을 불어 넣는다’는 목표 하에 일본디자인센터의 하라 켄야 대표가 기획했으며, 미래의 라이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춰 커뮤니티와 땅, 건물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작업이다. 하라 켄야를 비롯해 쿠마 켄고, 반 시게루 등 유명 건축가와 파나소닉, 도요타 등의 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수십 차례의 세미나와 심포지엄, 전시회를 개최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미래의 주거 환경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하우스비전’이라는 이름으로 각국의 미래 주거 환경에 대해 토론하는 심포지엄과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2017년 2월 서울디자인재단이 일본디자인센터와 업무협약을 맺은 후, 건축가와 디자이너로 구성된 ‘하우스비전-서울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2017년 한 해 동안 20여명의 위원들이 10여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서울의 주거 환경이 당면한 과제를 진단하고 미래의 주거 환경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도시에 사는 중년 세대의 고민으로부터 중간주거가 시작된 것이군요.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나요?
연희동에 큰 단독주택이 꽤 많은데 매물로 나와 있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어떤 집인가 보면 1층은 중년 세대 혹은 노년의 할머 니, 할아버지가 거주하시고 2층은 자녀들이 살다가 독립해 나가서 창고로 쓰고 있죠. 정원은 거의 방치 상태고요. 나이가 들수록 집이 크면 관리가 어려워지고 공간에 대한 부담이 커져요. 현실적으로 관리가 불가능한 집을 떠안고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집이 팔리면 대부분 적당한 평형대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고, 남는 비용을 노후 생활비로 사용하게 되고요. 하지만 그런 단발적이고 닫힌 구조를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집의 남는 공간 일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부담을 줄이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공간으로 바꿔보자는 거죠.
예를 들면, 집에서 보통 주방과 식당은 하루에 서너 시간 외에는 거의 비어있거든요. 비어있는 시간 동안 그 공간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빌려주는 개념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젊은 청년들이 와서 카페를 하는 등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고요. 또 다른 집은 거실을, 또는 서재나 침실을 그렇게 활용할 수도 있겠죠. 집의 일부가 동네에서 함께 쓸 수 있는 카페, 작업실, 미팅룸
등으로 변화해 동네의 플랫폼 역할을 하면 집이 동네 전체로 확장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공간의 가치는 꼭 돈이 아니더라도 재화와 노동으로 교환할 수도 있고요. 일종의 블록체인Block Chain인 셈이죠.
해방구는 그 구조를 실험해보기에 적합한 집이었군요.
하우스비전에서 제안했던 이야기의 진척이 지지부진하던 중에 운 좋게 이 프로젝트를 만나게 되었어요.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의 집이었고, 건축주가 원하는 부분과 중간주거의 개념이 상당히 닮아있었거든요. 대지가 작아서 1층은 주방과 식당이 독립된 형태로, 나머지 층은 서재와 거실 및 침실로 분리해 각각 다른 집처럼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죠.
독립된 1층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차후에 판단할 일이겠지만 모든 구성과 평면 계획, 법적인 상황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또 동네로 확장될 여지와 틈을 남겨두었으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요즘은 소유나 점유가 아닌, 새로운 형식을 갖춘 다양한 집들이 생겨나고 있죠. 어떻게 보고 계세요?
이전에는 집이 소유와 임대,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면, 이제는 대기업이나 큰 건설회사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주거 공간을 개발하고 있어요. 최근 활발하게 생겨나고 있는 공유 주택도 그것들 중 하나죠.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은 ‘운영’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여태까지 운영이라는 영역이 없었기 때문에 시도 자체가 딜레마일 수도 있죠. 이제는 운영이 필요조건이 되었고 기업들이 그걸 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온 것 같아요. 공유 주택에서도 누구나 쓰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봐요.
흥미롭네요. ‘공유 공간’의 존재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요. 그렇다면 소장님이 생각하는 ‘공유 공간’은 어떤 곳인가요?
‘공유 공간’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공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마트를 찾는 사람들의 불만 사항 중에 70~80%가 쇼핑 중 호객 행위나 시식 권유였대요. 혼자서 조용히 장을 보고 싶다는 거죠. 심지어 계산원과도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중국에서 실제로 아무도 접촉하지 않고 혼자 장을 보고, 무인계산대에서 계산할 수 있도록 구현한 마트를 만들었는데, 결과가 참담했어요.
손님이 별로 없대요. (웃음) 여기에서 중요한 게 뭐냐면, ‘내가 필요할 때만 접촉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아예 접촉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렇게는 못 살아요. 다만 내가 필요할 때 접촉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 놓아야 하죠. 공유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내가 필요할 때 열 수 있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에선 이 개념이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것 같아요. 공유의 개념이 오독 혹은 오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공유가 일어나려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확보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첫 번째는 감수성에 대한 훈련이에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가 깔린 상황에서 개인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완전히 확보해야 해요.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율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하죠. 이게 불가능하다면 두 번째는 공유를 위한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야 해요. 하지만 아무리 법규나 제도로 시스템을 만들어도 인간의 삶을 시스템이 규정한다는 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럼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한국은 그렇게 되기엔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공유에 대한 거부반응과 부적응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개별성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사회에서 공유를 들이대면 서로 피곤하거든요.
요즘 공유를 내세운 여러 사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데, 사실 건축적으로나 콘텐츠로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용한 게 많아요. 누가 점유하고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데 공간만 마련하는 건 의미가 없죠.
해방촌 해방구에서 1층 공간도 주인이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못 들어오지만, 주인이 이 공간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동네 주민도 들어올 수 있어요. 커뮤니티가 확장되는 거죠. 집과 동네 사이에 버퍼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제3의 공간이 될 수도 있죠. 이런 공간이 집마다 있다면, 그리고 그 프로그램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면, 그걸 다 연결하면 동네에서 재미있는 구조가 될 것 같아요.
다른 나라는 어떤가요?
공유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람이 일본 건축가 리켄 야마모토예요. 그는 ‘집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동네 커뮤니티의 일부일 뿐’이라고도 말했어요. 그가 설계한 1991년 완공된 일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호타쿠보 제1단지 주거 계획은 거의 충격적이에요. (웃음) 주택 단지 세 개 동과 주민공동시설인 집회소 한 동을 중앙 광장을 둘러싸도록 배치한 단지 계획인데요. 이 중앙 광장은 거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이 중앙 광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각 집을 통하거나 집회실을 통해야만 하도록 설계했어요. 공적인 공간마저도 사적인 공간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거죠. 평면 계획에서는 주방과 식당, 그리고 침실과 거실을 완전히
분리했는데, 침실과 거실은 도로 쪽에서의 출입구로, 주방과 식당은 중앙 광장 쪽으로 두어 두 개의 출입구를 갖도록 했죠. 아마 저였다면, 그 출입구 위치를 반대로 바꿨을 거예요. 중앙 광장은 공적 공간이기는 하지만, 입주민들끼리의 반(半)사적 공간의 느낌이 강하고 도로 쪽은 완전한 공적 공간이니까요. 하지만 그 개념을 뒤집어 생각한 거죠. 이곳은 지금도 일본의 건축가나 평론가들 일본의 주거문화를 바꿔놓은 획기적인 주택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합니다.
올해 열릴 하우스비전을 준비 중이시죠. 미리 조금만 소개해주시겠어요?
‘현관’ 공간의 확장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해방촌 해방구에서 시도한 것처럼 단순히 주방과 식당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주방과 식당 ⅓, 침실과 거실 ⅓, 현관 ⅓, 이렇게 현관을 집의 다른 공간과 동일한 면적으로 확장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중이에요.
올해 열릴 하우스비전은 기존 서울에서 그 장소를 바꿔 진천에서 ‘농촌’을 주제로 진행될 예정인데, 저는 농촌형 중간주거를 제안하면서 거기에 현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반영하게 될 것 같아요. 우리나라 농촌의 최대 문제는 고령화와 외부 인구 유입 부재라고 봐요. 젊은 사람들 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인구가 유입되지 않으면 고령화된 농촌은 자연소멸로 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다면 외부 인구가 유입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가를 찾는 게 답이 되겠죠. 하지만 아이러니한 건 농촌에 사는 원주민이 외부 인구 유입을 엄청난 위협 세력으로 느낀다는 거예요. 외부 인구가 그들의 생계 수단을 뺏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죠. 그러면 원주민이 위협으로 느끼지 않아야 할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뭘까 고민하고 있어요.
예전에 공주의 한 시골에 주택을 설계했는데, 인상적이었던 점이 출입 보안장치를 반드시 설치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시골 동네를 보면 거의 다 문을 열어 놓고 사는데, 웬 보안장치인가 했더니 도둑이 들지는 않지만,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는 거래요. 112를 부르면 30분이 걸리지만, 보안 업체는 10분 만에 출동을 한다고요. 다들 연세가 많으시니, 그 20분 차이가
골든타임이거든요. 그런 현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농촌형 중간주거에서는 현관을 크게 독립하고 그 공간에 젊은 사람이나 외국인 노동자가 살면서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집을 제안해볼까 해요. 그렇게 되면 원주민도 외부 인구 유입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농촌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동안의 중간주거 이야기가 정리되고 확장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기대되네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궁극적으로 집은 어떤 장소가 되어야 할까요?
집은 아무리 개인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결국 사회적인 산물이고 실물로 구축되는 순간 환경의 일부가 되어 공공적인 성격을 갖게 돼요. 사회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죠. 공공성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다니는 길에 이상한 건물이 있으면 공공성에 피해를 보는 거거든요. 또 불특정 다수가 쓸 수 있게 열려있다고 해서 공공성을 갖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집과 건축이 가져야 할 공공적인 역할이나 사회적 책임은 생각보다 그 영역이 넓고 섬세한 조율이 필요해요.
집이 모여서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여서 도시가 돼요. 그러니까 집이 동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동네가 변하고 도시가 변하고 결국 사회가 개선될 수 있어요. 골목에서 열 개 중에 두세 개의 집만 바뀌어도 동네의 표정이 바뀔 수 있죠. 그래서 집과 동네가 만나는 접점의 한편에 동네에서 사회적인 역할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동네와 만나는 접점들을 만들어 두는 것. 그런 여지가 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집의 그런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