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Heritage is _____.] ⑦ 변화가 아닌 발견,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 SOULGRAPH/ Sungkee Jin
에디터. 박지일  사진. 쏘울그래프/ 진성기 SOULGRAPH/ Sungkee Jin  자료. 디자인스튜디오 마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학창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필요한 학용품을 사거나 군것질을 하던 경험은 누구나 가진 보편적 기억이다. 시대가 흘러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바뀌고, 화방이나 문구점이 대형화되면서 우리가 문방구라 부르는 많은 곳이 자취를 감추거나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은 흔히 발견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가끔씩 발견되는 풍경은 우리의 추억들을 되살리기도 한다.

경기도 안성의 재래시장 안에 ‘재건사’라는 이름으로 1968년 개업한 이곳은 매일 아침 7시에 셔터를 올리고 밤 10시면 셔터를 내리며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마주했다. 휴무인 날이 1년에 이틀 뿐일 정도로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한 덕분에, 1960‒1970년대 안성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름만 보고 건축 관련 회사가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워낙 많아 개업한 지 5년 만에 ‘재건문구사’로 상호를 변경했지만, 인근 주민들은 지금도 ‘재건사’로 부른다. 1998년 주인장의 딸이 이 공간을 이어받아 2019년까지 5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역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당시 안성에는 재건문구사를 비롯해 비교적 큰 규모의 문구사 5곳이 있었지만, 오직 재건문구사만 홀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 SOULGRAPH/ Sungkee Jin
© SOULGRAPH/ Sungkee Jin

 

‘재건문구사’에서 ‘재건사커피’로
2018년, 재건문구사는 공개적인 점포 정리를 통해 사업 철수를 알렸다. 이전 같지 않은 판매량에, 쉬고 싶다는 주인장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창업한 지 50년이 넘는, 안성에서 가장 오래된 문방구 재건문구사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정리가 마무리된 2019년부터 잠깐의 공백을 거친 2020년의 끝자락, 재건문구사는 익숙한 문구들과 예전의 모습들을 대부분 간직한 채 ‘재건사커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새로운 주인은 안성 토박이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대기업에 다니다 귀향을 결심한 30대 바리스타다. 건축주는 재건문구사의 폐업 소식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즐겨 마시던 커피를 직접 내리고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임을 직감했다. 평소 재생 건축에 관심도 많았고 인근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곳을 카페로 바꿔 운영한다면 사업적으로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살리면서도 안성에는 없던 분위기의 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 SOULGRAPH/ Sungkee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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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계승’의 고민
건축주는 재건문구사의 공간만을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것인지, 기존 재건사의 흔적을 그대로 계승할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 설계를 맡은 디자인스튜디오 마움은 시간의 흔적이 담긴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 선명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스튜디오로, 평소 대상지의 과거 흔적이나 이를 이어 나가는 콘텐츠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마움은 ‘‘재건문구사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와 공간의 흔적이 다른 콘셉트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각인이 되어 있었다”며 새로운 콘셉트의 개발 없이, 재건사가 가진 고유의 브랜드를 계승해 나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민들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돼 온 시간을 이어받아, 커피를 사랑하는 안성 토박이 청년과 함께 시간의 흔적을 존중해 그 가치를 보존하려는 생각이 디자인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 SOULGRAPH/ Sungkee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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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들에 주목하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시간을 이어 나가야 하는 과제는 어렵지만 특별하다. 건축주에게는 자칫 고루할 수 있는 콘셉트의 재현이라는 위험 요소가 있었고, 디자이너에게는 오래된 장소에서 시간성을 연결하는 공간 연출이라는 쉽지 않은 과정이 이어졌다. 우선된 것은 단순히 이 장소에서 무엇을 남기고 어떤 철학과 디자인을 결합할지보다는 ‘그곳에 남겨져야 할 흔적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50여 년간 지켜온 공간에는 한눈에 보더라도 오래되고 낡았지만 튼튼하고 짜임새가 좋은 수납 선반, 곳곳에 촘촘히 붙여진 견출지, 벽면에 정갈하게 써놓은 글자들까지 재건문구사의 많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디자이너는 세대를 거쳐 사용된 오래된 선반에 특히 주목했다.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선반이 새로운 용도의 장소에서도 동일한 기능을 하며 시간을 이어 나가는 중요한 오브제로서 기능하길 바랐다. 

 

© SOULGRAPH/ Sungkee Jin
© SOULGRAPH/ Sungkee Jin

 

바리스타의 장소
이렇듯 공간의 시간적 요소들은 그대로 유지하거나 개선한 반면, 바리스타인 건축주가 활동하는 영역은 그의 성향과 편의성에 기반해 계획했다. 선반의 일부를 중심으로 필요한 도구나 근사한 커피잔을 놓아둘 수 있도록 동선 반경을 설정하고, 묵직한 톤과 넓은 간격의 격자 모듈로 천장을 만들어 장소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도전과 열정이 가득한 그 사람을 닮은 장소는 화려하지만 동시에 단정하다. 그곳이 더 깊고 진한 향이 나는 스스로의 무대였으면 했다”는 것이 재건문구사를 재해석한 디자이너의 생각이다. 고집스럽도록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상징적인 장소를 가질 수 있기를 의도했다.

 

© SOULGRAPH/ Sungkee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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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건문구사’
재건사커피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시점에 건축주와 디자이너는 재건사커피의 확장을 도모했다. 과거 학용품 재고로 꽉 차 있던 창고와 연탄 저장고로 활용되던 버려진 공간을 확장해 테이블을 늘리고, 직접 개발한 상품들을 판매할 수 있도록 꾸민 것. 확장되는 공간은 재건문구사의 시간을 이어 나간다는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 장소로 조성됐다. 제품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 사라지거나 기억 속에 있는 물건들을 발견하는 보물찾기’라는 주제로, 기존에 재건문구사에서 판매하던 문구류를 복원해 재건사커피 브랜드와 연계했다. 이에 따라 연필과 지우개, 노트나 일기장, 자와 각도기 등 예전에도 필요했고 현재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또 재건문구사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재건사커피의 제품 등을 개발해 소장 및 선물용으로 판매함으로써, 비로소 재건사커피에서 재건문구사의 시간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 Designstudio MAOOM
© Designstudio MA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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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의 가치는 현재 진행형
시간의 흔적과 남겨진 사물의 의미는 새로운 시간과 함께 결합되어 원형을 이어 나간다.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거치고 청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에서 자신의 커피 브랜드로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30대 청년의 열정은 새로운 시간을 이어 나가며 동시에 새롭게 쓰인다. 평범한 카페로 보일 수 있지만 과거 이곳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의 단편을 가지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50년간 재건문구사를 운영해온 부녀는 자신들이 놓아버린 그것이 새롭게 활용되는 것에 신기해하면서도 크게 감동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시로 드나들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덕분에 재건문구사의 수십 년 된 고객들을 자연스럽게 재건사커피의 단골로 만들 수 있었다고. 지금도 카페에는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로 북적인다. 궁서체로 꾹꾹 눌러쓴 메뉴판처럼, 50년의 시간을 지나온 이곳에서 옛 흔적과 새로움이 동시에 교차하는 새로운 경험을 많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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