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Heritage is _____.] ④ 1980년대 다가구주택을 재해석한 ‘구의살롱’
©Jihun Bae
에디터. 박지일  사진. 배지훈  자료. stpmj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높은 건물이나 전망대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서울의 주거 형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58%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고, 일부 단독주택을 제외한 나머지 42%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빌라’라는 이름의 다가구, 다세대주택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보편적 주거 형식으로 자리 잡힌 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어느덧 서울의 대표 이미지로 비춰진다면, 이를 마땅히 헤리티지라 정의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

 

©Jihun Bae

 

한국식 주거 양식의 탄생
다가구주택은 단독주택의 주거 밀도를 상향시키고, 저소득층 및 전월세가구의 주거 안정과 저렴한 주택공급을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축주들은 노후한 단독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가구주택을 지으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땅만 있으면 다가구주택을 짓고 늘어난 가구수만큼 전세를 놓아 건축비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엄청난 양의 다가구주택이 건설되었고, 이는 우리나라 현대 도시형 다가구주택의 전형을 만들어낸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다세대인지 다가구인지, 단독주택도 집합주택도 아닌 모호한 형태의 한국적 주거 형식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Jihu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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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작
건축 기준이 마련된 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가구주택들은 재개발 대상이 됐다. 구의살롱은 각 층에 독립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를 가진 전형적인 과거 다가구주택의 모습으로, 건축 면적 65m², 대지 면적 195m²에 반지하와 도로에서 반 층 들어 올려진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가 에스티피엠제이stpmj는 구의살롱을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과 마감면의 변화된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도록 리노베이션했다. 다섯 세대의 유닛(반지하층 2세대/ 1층 1세대/ 2층 2세대)으로 나뉘어 사용되던 공간은 반지하와 1층에 걸쳐 업무시설을, 2층에는 주거 공간의 프로그램을 다시 계획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공간인 1층은 가벽을 세워 지정된 용도 없이 비워냈는데, 이는 업무 공간인 반지하에서 올라오거나 2층에 거주하는 가족이 내려와 머물 수 있는 일종의 ‘응접실’ 개념이다. 그들이 말하는 ‘살롱’이라는 이름처럼 지상 1층에서는 회의와 미팅, 전시나 휴식, 여가 등 업무와 주거를 포함한 사용자들의 다양한 행위를 담아낸다.

 

©Jihu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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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 철거 – 남길 것과 버릴 것
30년이 넘는 건축물의 숨겨진 마감면과 공간이 가진 변화의 흔적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철거와 구조 보강을 진행한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소위 ‘집장사’가 지은 건축물이라도 당시의 건축 양식과 언어가 담겨있는 건축물은 한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집합체로서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고 건축가는 말한다. 이렇듯 시대를 대변하는 ‘집합체적 양식’을 남기고 버릴 것은 버리는 식으로 위계를 구분했다. 층별 진입 구조, 외부의 건축적 요소, 벽과 바닥의 축조 방식 및 디테일, 반지하층 화장실, 건물 내 배관 등은 한 시대를 환기시키는 집합체적 양식으로서 보존했다. 반면, 내부 공간을 구획하던 벽과 일부 슬래브는 현재의 목적과 기능에 부합하도록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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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이 처음 지어질 당시의 조적 벽체와 이후 불법으로 확장된 듯한 내부 마감면, 주변 벽체들과 미세하게 다른 질감의 적벽돌과 그 사이의 대리석 등 몇 년의 시간 차를 드러내며 일반적이지 않은 구축 방식이나 재료 사용을 보여주는 이 프로젝트에서 건축가는 단순한 복고적 재생이 아닌, 철거를 통해 당시의 어색한 구축 방식과 재료의 켜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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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건물의 공사비 절감을 꾀하고 과거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상당한 면적을 기존의 상태로 노출시켰다. 또한 마감은 최소화해 시간의 켜가 녹아 있는 기존의 마감 면들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반지하에 있던 화장실은 철거했지만 배관 위치도 덮지 않고 보존했다. 주변 벽체는 건물의 외부 벽돌과 비슷한 색상의 모르타르를 덧발랐다. 덕분에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서 공사가 끝난 게 맞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고. 이렇듯 기존의 건축적 요소와 유형, 마감 등은 철저히 유지한 이 프로젝트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번쩍거리는 외부 계단 난간 때문이다. 수명이 다한 계단과 발코니 난간을 발색된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로 감싸 적벽돌 외관과는 다른 이색적인 형상을 만들어냈다.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들어가는 동선은 과거의 다른 다가구주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종의 상징적 요소로, 이 디테일만큼은 건축가가 설정한 보편적 가치에서 제외시켰다고 강조했다. 한눈에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하다 싶은 이 부분에서 건축가는 다수의 유사성과 소수가 가진 대립성의 조화를 통해 1980년대 건물들이 다수 위치한 이 지역에서 미묘한 차이를 갖는 풍경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했다.

 

©Jihu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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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상상까지 함께한다. 과거 군사적 이유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던 반지하 공간과 옥외 계단, 구의살롱에는 없는 옥탑방 등은 다가구주택의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현재는 열악한 주거지의 상징처럼 간주되지만, 과거에는 주어진 조건에서 보다 쾌적한 환경을 영위하고자 했던 서민들의 생존이자 노력의 결과다. 구의살롱을 통해 한국 주거의 헤리티지와 마주한 두 명의 건축가는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어딘가에서 과거의 흔적을 들춰내고 새로운 동네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다시 어딘가에서 또 다른 헤리티지와 조우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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