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에 집

건축사사무소 H2L의 '슬릿하우스 Slit House'
ⓒWoochul Jung
에디터. 이현준  자료. 건축사사무소 H2L

 

‘틈’에는 여지가 있다. 좁고 길다면 더 그렇다. 상상할 여지, 건너다볼 여지, 마음을 빼앗길 여지, 어쩌면 들어가 살 여지. 팍팍한 도시를 사는 사람들에게 틈과 꿈은 빈번히 동의어가 됐다. 틈 뙈기나마 보금자리를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꿈.

현창용, 황정현 두 건축가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좁다란 여지餘地에 집을 짓는다. 공인중개사로부터 매입 당시 전해 들었던 바와 달리 한층 더 열악했던 대지의 규제,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은 예산 조달 문제, 대지 경계에 맞닿은 주택의 민원…. 숱한 혼란의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집은 완성된다.

두 어린 자녀를 둔 건축주 부부의 바람,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건축가의 합일과 분투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2019년 하반기 ‘슬릿하우스 Slit House’는 한국경제신문 주거문화대상 디자인주택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허공에 뜬 계단 사이 틈, 은밀하게 우아하게 지하로 뻗은 틈, 현관을 향해 솟으며 쪽 찢어진 틈, 좁은 실내 계단 난간을 대신해 1cm 두께의 철판이 갈라낸 틈….  건축사사무소 H2L을 이끌며 올해 슬릿하우스를 지은 두 건축가에게 물었다. 대체 어느 틈에, 이런 집을 만들어 냈느냐고. 

 

ⓒWoochul Jung
 

 

건축주 이야기

 

아파트 같은 단독주택

건축주는 두 아이를 둔 40대 부부다. 별내 신도시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서울 마장동에 사무실을 두고 의류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다. 별내와 마장동 사이를 오가며 생활을 했는데, 그 중간 즈음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구리의 달동네 땅을 발견했고, 거주하며 일도 할 수 있는 집을 짓고자 했다.

모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했는데 그 아파트가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똑같은 집을 설계해 달라고 하셨다. (웃음)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장단점은 각각 분명하다. 그러나 단독주택이 어떻게,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탈脫 아파트’ 하는 이들은 결국 아파트에서의 삶과 비교하게 된다.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단독주택에서의 삶에 대해 건축가가 건축주를 설득하기는 녹록지 않다. 우리 역시 늘 부딪힌다.

 

ⓒWoochul Jung
ⓒArchitects H2L

 

내가 모르는

건축주 부부가 우리를 처음 찾아왔을 땐 부동산에서 들은 정보만으로 땅을 이미 매입한 상태였다. 몇십 평까지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100평 가까이 가능하다 등의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하층은 사무실로, 지상층 중 3~4층은 건축주 가족이 거주, 지상 2층은 다가구 임대, 지상 1층은 사무실 임대라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부동산에서 들었던 면적을 꼼꼼히 따져보니 제대로 반영된 조건이 거의 없었다. 대지 안의 공지, 주차장, 정북 일조에 의해 4층 이상이 깎여나가는 것 등 어느 하나 반영되지 않은 상태의 면적을 안내받았던 것이다. 

모든 법규와 조건을 제하고 난 면적은 전혀 딴판이었다. 지상층에는 2~4층을 통틀어 건축주 가족이 살 정도의 면적만 남았다. 1층엔 주차장과 입구가 들어가고, 대지 안의 공지 1m마저 제하고 나니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지하실로 들어가는 계단은 물론, 꼭 필요한 썬큰sunken 면적까지 빼버리면 1층을 사무실로 임대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최종적으로는 법규의 극한까지 쥐어짜내도, 건축주 내외가 쓸 사무실, 그리고 가족이 살 주거 면적 밖에는 할애할 수 없었다. 

 

ⓒWoochul Jung
ⓒSeongcheol Kim

 

문제

건축주의 사업 자금 용도로 커다란 지출이 필요한 시점이 있었다. 그래서 시공 과정 한가운데, 시공자에게 중도금을 제때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설계를 마쳤어도 착공 전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형편에 맞춰 설계를 바꾸거나 건물 규모를 손보거나 하는 논의를 거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시공은 시작됐고, 무엇보다 건축주는 우리의 디자인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위기를 시공자의 인내와 기다림 덕분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콘크리트!

건축주가 가장 강력하게 요구했던 부분은 바로 ‘노출 콘크리트’ 마감이다. 꼭 한 번이라도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보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노출 콘크리트로 외관을 마감하고, 실내에도 어딘가에 노출 콘크리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이 같은 애정을 안고 건축주는 국내 노출 콘크리트 1세대 건축가를 찾았지만 설계비를 듣고 놀라 그만 마음을 접었다. 2016년 당시 공교롭게도 건축주의 마장동 사무실 바로 옆에 우리의 협소주택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덕분에 건축주는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그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지켜봤을 터였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던 건축주는 우리를 찾아왔다. 

 

ⓒWoochul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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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cheol Kim

 

지역과 대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달동네라고 할 수 있다. 별내 신도시가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 개발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지역이다. 경사진 언덕길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달동네다. 주변에 빈집도 많고 전반적으로 거주 환경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건축주에게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곳이 최적의 입지였다. 삼각형 모양의 땅은 지가도 저렴했다. 설계 상담을 위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공인중개사를 통해 대지를 구입했다.

 

ⓒSeongcheol Kim
ⓒSeongcheol Kim

 

옆집 월세 대신 내주기

인접한 다가구주택과 슬릿하우스 사이의 간격이 아주 밭다. 가까운 간격이 법적인 제약 조건은 아니었지만, 너무 붙어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 다가구주택 반지하층의 세입자가 나갔다. 소음과 분진, 차단되는 채광을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이에 건물주는 그 손실에 대한 임대료를 요구했고, 공사 기간 내내 빈 방 40만원 가량 월세를 지불해야 했다. 이 사유재산과 공유되는 빛, 바람에 대한 이슈는 정말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 같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인접한 다가구주택의 임대 가치는 응당 하락했을 터다. 이렇게 밝아만 보이는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힘들고 어려운 점도 많았다. 공사 기간에 임대료를 지불하는 건 정말이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웃음)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대지 옆 너른 공터의 존재였다. 공터는 차고지 외의 목적으로는 개발이 불가능한 부지였는데, 땅 주인과 협의를 통해 시공 때 자재를 보관하기도, 현자 사무실을 가져다 놓고 운영하기도 했다. 협소주택 부지에서 이런 넓은 공간은 굉장히 유용하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에 자재들을 놔두어야 하는데 그런 경우 도로 점령 허가를 받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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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만원짜리 암석

오피스 용도로 쓰는 지하엔 물 쓰는 공간이 응당 필요했다. 물을 길어 쓰려면 중력에 의해 한층 더 내려가야 하고, 물길을 트기 위해 파내려 가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발견됐다. 만약 파쇄 이외에 다른 솔루션이 없거나 예산이 넉넉하다면 바위를 쪼개주어야 하는데, 7000만원 가량의 비용이 소요된다. 오히려 설계 변경을 해서 정화조를 설치할 내부 공간을 확보하는 편이 기회비용 측면에서 유리했기에 한 차례 설계 변경이 있었다. 

 

건축과 디자인

 

찢어 만든 계단

여러 개 층이 한 번에 통과하는 일반적인 계단실을 처음에 고민했다. 모든 건물에 달려 있는 메인 코어를 고민했지만, 대지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참이 있는 돌음계단도, 삼각형의 돌음계단도 둘 수 없는 폭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일자로 쭉 펴진 계단을 대지의 예각 부분 어딘가에 수직 배치해 동선이 흩어지며 공간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1층에서 2층으로 곧장 이어지는 별도의 계단, 그리고 1층에서 지하로 뻗은 계단을 각각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외관의 계단을 따라 나타나는 곧은 선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Woochul Jung
ⓒWoochul Jung

 

땅 모양이 이렇다 보니 결국 예각의 소위 ‘꽁다리’ 부분에서 많은 것들을 해결해내야만 했다. 주차, 화장실, 샤프트, 정화조, 계단 등 같은 요소들을 모두. 빙글 돌아서 오르내리는 일체형의 코어를 만들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처럼 길게 찢어서 오르내리는 공간이 생겼고, 집의 이름도 ‘슬릿하우스 Slit House’가 됐다.

 

ⓒWoochul Jung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캔틸레버(한쪽 끝은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아니한 상태로 있는 보) 계단은 물론 디자인 요소이기도 하나 그보다는 기능적인 존재 이유가 크다. 이 협소한 주차공간에 차를 대면 간격이 너무 밭아서 차 문을 열기조차 쉽지 않다. 1층에서 계단실과 화장실, 창고에 공간을 할애하고 나면 거의 남는 공간이 없다. 이렇게 되면 주차장의 뒷공간이 완전히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간이 좁으니 시원한 필로티를 낼 방법은 없고, 이 방향으로 길을 터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Woochul Jung

 

만약 계단 벽이 이 끝까지 내려오면 너무 답답해 보일 테고, 계단의 폭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시각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계단에 대한 솔루션이 필요했다. 집으로 진입하는 주 출입구로서의 기능, 주차장으로 통하는 환기구로서의 기능, 지하 계단 밑으로 빛을 들이는 기능적인 관점을 고려하니 그림이 그려졌다. 벽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계단을 캔틸레버로 만들자 짐을 들고 오갈 때도 거슬리지 않았으며 팔과 상체를 틀 때도 자유로워졌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모양을 위한 모양은 지양하는 편이다. H2L의 성격이기도 하다.

 

ⓒWoochul Jung
ⓒWoochul Jung

 

필요 해내는 디자인

공간을 선으로 구획하다 보면 결국 예각을 가진 부분이 남는다. 삼각형 공간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이곳으로 모든 파이프를 모았다. 3층에서 예각을 위한 솔루션이 도드라진다. 여기는 전체가 드레스룸이고, 세탁기가 있다. 용변을 보는 곳과 샤워하는 곳은 분리됐다. 그렇게 풀린 형태는 결국 이런 동선을 만들고, 남은 삼각형의 공간엔 수납장을 짜 넣었다. 덕분에 넉넉한 사이즈의 화장실이 나왔다. 

 

ⓒWoochul Jung
 
ⓒArchitects H2L

 

인테리어는 별게 없다.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신발장에서 보면 공간의 깊이가 가늠된다. 건축주가 내부에도 노출 콘크리트 면을 두고 싶어 해 일부 표현했다.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과하지 않고 기본적인 마감을 했다. 계단 역시 협소한 공간 때문에 난간을 두껍게 할 여지가 없었다. 디자인은 결국 필요에 의해 나온다. (웃음)

 

ⓒSeongcheol Kim
ⓒSeongcheol Kim
ⓒSeongcheol Kim

 

현창용 건축가는 ‘슬릿하우스’ 프로젝트의 설명글을 맺으며 이렇게 썼더랬다. 

 

대지의 다양한 조건들은 타고나는 성질과도 같고, 건축 프로젝트에서 어떠한 제약조건도 없이 무결한 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슬릿하우스는 대지의 형태, 대지에 적용되는 법규, 대지를 바라보는 건축주의 희망을 담담하게 수용해 건축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집이다. 이는 이 집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형태가, 사실 대지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솟아난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Woochul Jung

 

“괜히 사람이 안 하던 거 하면 그렇잖아요. 안 하던 사선을 써서 설계하는 거.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그런 틈이라던가. 막 모양을 내고 기교를 부리려던 건 실은 아닌데. 이 대지에선 절대로 통으로 계단실을 만들 수 없었고, 건축주도 별도의 출입구를 원했죠. 삼각형의 땅이었고, 그것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거든요.

뭐든 기능이 앞서고, 거기 디자인이 따라갔어요. 남들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괜히 까만 옷만 입던 사람이 빨간 옷을 입은 날이면  내리 혼자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다들 나만 쳐다보는 것 같더라고요. ‘아, 이거 보면 분명 멋부렸다고 할 것 같은데…’ 자꾸만 생각하는 거죠.

실은 제게 굉장히 낯선 시도였어요. 늘 직선을 쓰지 사선이나 곡선은 쓰는 법이 없거든요. 형태를 위한 형태를 만들 줄도 모르거니와 그럴 깜냥도 안돼요. 그저 대지의 조건과 환경, 상황에 맞는 무언가를 충실히 만들어갈 뿐입니다.”

 
ⓒWoochul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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