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박종우 사진. 송정근 자료. 에이디모베 건축사사무소 ADMOBE Architect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 골목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그 고요함에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굽이굽이 좁다란 골목을 올라가면 유난히 커다란 창을 뽐내는 집 한 채가 있다. 남다른 규모의 책꽂이가 있는 ‘정릉동 책놀이집(이하 책놀이집)’이다. 이 집을 설계한 에이디모베 건축사사무소 이재혁 소장을 만나 집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정릉을 사랑한 책 부잣집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건축주는 정릉의 한 아파트에서 10년간 살았다. 아들, 딸이 대학 졸업하고 나니 건축주는 해외에서 경험했던 단독주택 생활이 그리워졌다.
“건축주 분이 이 동네를 정말 좋아하세요. 단독주택을 짓고 싶었지만 정릉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죠.”
마침 건축주와 가까이 살던 건축가는 건축주의 요청에 따라, 건축주와 정릉에 집 지을 곳을 알아보러 다니게 됐다. 그렇게 정릉 골목 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건축주와 이 소장은 여러 차례 답사 끝에 집 지을 땅을 찾게 됐다.
“보통은 건축주가 집 지을 땅을 찾아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분은 전화하셔서 ‘이 소장 지금 시간 되면 정릉 갑시다’고 해서 같이 만나서 돌아다녔죠. (웃음) 지금 집이 지어진 땅은 이래저래 괜찮겠더라고요. 여기에는 원하는 걸 지을 수 있겠다 싶어서 오케이가 된 거죠.”
문헌정보학과 교수인 건축주는 건축가를 만나자마자, 집에 책이 많다는 말부터 꺼냈다. 책이 많은 건축주는 이제 학교 연구실보다는 집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건축주가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었어요. 책 좋아하는 건축주가 책을 가지고 노는 집이라는 의미로, 집에 ‘책놀이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건축가는 집 안에 2층부터 3층 다락방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가족 서가’와 건축주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락방을 만들었다. 특히 가족 서가는 건축주 요청에 의해 책과 액자, TV, 컴퓨터까지 들어가야했다. 자칫 복잡한 공간이 될 수 있어 설계 단계부터 굉장히 공을 들였다는 후기를 전했다.
“가족 서가는 진짜 여러 번 고민해서 만들었어요. 책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이 들어갈 수도 있는 곳이거든요. 지금은 책에 가려서 잘 안 보이지만, 전기 콘센트를 엄청 많이 많이 달아 놓았어요. 책꽂이 전개도를 그려서 전기 콘센트 배치하고, 구멍 뚫어야 할 부분 표시해놓고. 그렇게 한 거에요.”
조용히, 빠르게 집 짓는 방법
도심 속 모든 집들이 그렇겠지만 유난히 조용한 동네 정릉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대로변도 아닌 골목에서 집을 짓는 일이란 더욱 어렵다. 공사 소음과 크레인 등 각종 공사 차량으로 인한 불편 때문에, 자칫 주변 이웃들의 눈초리와 원성을 한 몸에 받기 십상이다.
“이 집은 골조공사를 3개월 동안 했는데, 3개월 공사하면 동네 이웃들이 지쳐요. 공사 차량 지나가야 되는데 차도 잘 안 빼주고. 또 땅이 좁아서 자재 쌓아놓을 데도 없고, 공사 현장에 사람들 몇 명만 올라가도 꽉 차고. 그러면 시간이 오래 걸리죠.”
건축가는 이런 상황에서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목조 건축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해외에서 5년간 목조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건축주 역시 쉽게 제안에 응했다.
“목조 건축이 짓는 속도가 빨라요. 건축주 입장에서는 빨리 끝나서 좋고, 빠르다보니 공사비가 조금 절감되기도 하고요. 제 입장에서는 골조 공사 다 하고 설비 배관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확인할 수 있어 좋고요. 목조 건축은 설계하는 사람에게도, 사는 사람에게도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목구조로 공장에서 최대한 가공을 마친 후 현장에서는 조립 위주로 공사를 진행한다면, 공사 기간을 최소 1개월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 6개월 이상을 예상하던 공사 기간은 약 4개월 정도로 줄어 공사 기간을 1~2개월 가량 단축할 수 있었다.
건축가는 인터뷰 중 목조 건축의 장점을 여러 번 언급했다. 그 중 하나가 공간의 절약. 콘크리트 구조로 된 집에 비해 목조로 된 집은 벽체가 상대적으로 덜 두꺼워, 같은 평면 상에서도 콘크리트 구조로 된 집보다 면적이 더 크다는 것이다.
“콘크리트 구조는 구조벽 200mm에 단열재가 135mm, 거기에 석고보드 등 마감재가 붙으면 벽 두께가 350~400mm 정도 돼요. 반면 목구조는 벽체 두께 140mm에 마감재가 붙어도 200mm가 채 안되니, 공간 확보에 단연 유리하죠.”
여럿을 하나로 합하다
공사 소음도 신경써야 했지만, 사생활 침해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웃집과 가까이 붙어 있어 남쪽에 창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대안으로 동쪽과 남서쪽에 거대한 창을 내기로 했다. 작은 창 여러 개를 만드는 대신, 큰 창으로 채광과 사생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것이다.
덕분에 건축주와 가족들이 사생활을 보장받으면서 편하게 정릉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창문이 건축가의 세심한 고민을 거쳐 책놀이집의 ‘트레이드 마크’로 변했다.
커다란 창이 책놀이집의 특징이라면, 층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내부 공간 역시 거주자의 삶을 살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건축가는 건축주와 소통하며, 온가족이 함께 악기 연주 연습을 하는 등 가족 간의 유대가 깊고 화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화목한 건축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집에 녹여내기로 했다. 건축주 요청으로 아들이 쓸 1층을 독립적으로 분리했지만, 그러면서도 2층 거실부터 3층 안방까지 층 구분 없이 내부 공간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3층 딸이 사는 방의 창문으로 방 밖을 보면, 집 안이 마치 거대한 하나의 방처럼 느껴진다.
거실과 안방이 뚫려있어 가족끼리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을 드렸더니, 건축가는 건축주 가족들이 “문 꽝 닫고 각자 방에 들어가는 건 지양한다”면서, 이러한 내부 공간 설계를 건축주가 받아들인 것도 건축주 가족이 개방적이고 화목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는 이가 찾은 ‘의외의 공간’
책놀이집이 완공된 후, 건축가는 이 집을 통해 지난해 서울시건축사회에서 주최하는 ‘우리동네 좋은집 찾기’에서 금상을, 한국목조건축협회에서 주관하는 ‘목조건축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재혁 소장은 목구조의 구조미가 잘 살아난 것 덕분에 상을 받은 것 같다면서, “목구조를 자유롭게 해 본 것에 만족한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목구조로 지어진 집은 미학적으로 훌륭하지만, 동시에 거주자들도 만족시켰다. 그 중 건축주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한 공간은 계단참. 계단 설계 도중 남은 짜투리 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악기 보관하고 같이 연습하는 공간 정도로 봤는데, 나중에 보니 담요도 놓고 책상도 놓으셨어요. 그 공간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집에는 없는 특별한 공간이라고 하시면서요.”
건축가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공간은 주차장. 건축주는 현재 주차장을 식물 키우는 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차장을 마당으로 활용하면서, 건축주와 가족들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
“주차장을 마당으로 쓰고 있더라고요. 집에서 마당으로 쓸 수 있는데가 주차장 밖에 없다보니, 이 분들이 자동차를 팔아버렸어요. 더 이상 자동차가 필요없대요.”
동네를 향한 애정과 거주자들을 위한 배려가 묻어나는 정릉동 책놀이집. 건축가가 세심히 만든 공간은 설계한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오늘도 사람들의 삶을 바꿔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