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지금 여기를 깨닫는 자리

[Story] 빛의 우물 '정, 은설 井, 銀雪' #2
ⓒBRIQUE Magazine
에디터. 윤솔희 객원에디터  사진. 윤준환, 윤현기  자료. 정영한 아키텍츠 YounghanChung Architects

 

정영한 아키텍츠의 정영한 소장은 설계할 때 통상적 문법을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한 선택지라 부르는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비껴나고 미지의 영역으로도 곧잘 뛰어든다. 2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에서 ‘실험’이란 단어를 적어도 20번 이상 언급했을 정도로 그는 연구자이자 모험가의 자세로 설계에 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하려는 실험이 대담무쌍 기질을 뽐내거나 별난 볼거리를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다. 무엇보다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감각이라고 여기는 것들, 즉 ‘내가 이곳에 있다’는 인식, ‘저곳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를 돕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그에게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건축으로 건축주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속 진귀한 보물이다. 물론 그가 만든 보물을 찾으려면 몸은 좀 부산히 움직여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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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은설을 본 사람들의 첫마디가 인상적이던데요. ‘희한한 집’이라고.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각자 다를 테니까요. 물론 예상한 반응은 아닙니다만. (웃음) 처음 이 장소에 도착해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서는 민락동이라는 부산 구도심의 가능성을 어떻게 도시 주택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까를 관건으로 삼았던 것 같아요.

정, 은설을 소개할 때 유독 ‘구도심에 지어진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셨습니다. 구도심이라는 장소가 어찌 집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나요?
구도심 풍경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아마 2층짜리 단독주택 건물이 옹기종기 골목 따라 모여 있는 모습이 떠올랐을 텐데요. 신시가지처럼 높은 건물은 없을 것이고 거주자 연령층도 상대적으로 높겠지요. 동네가 조용할 거예요. 이걸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의 높이에 이르면 자신만의 도심 경관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고, 집을 프라이빗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죠. 상대적으로 지가가 저렴하니 재정 부담도 덜 수 있을 테고요. 그러니 소자본으로 새로운 거주 방식을 찾는 이들에게는 근사한 기회라고 생각해요. 정, 은설 건축주도 이러한 판단 아래 이 장소를 정했던 것이고요.

 

ⓒYoon, Joonhwan

 

건축주와는 어떻게 만났나요?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어요. 정슬기 씨는 제 아내가 운영하던 카페에 늘 함께 있던 루키라는 골든리트리버를 자주 보러와 산책을 시키곤 했어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는데요. (덧붙이자면 현재 정, 은설에는 건축주와 첫 인연을 시작해준 루키의 딸 아드가 함께 살고 있답니다.) 그가 대학교 3학년일 때쯤 처음 알았는데 간간이 소식을 전해왔어요. 취업 소식도 알았고 결혼 소식도 들었죠. 그러다가 한날 부산으로 내려가 집을 짓겠다고 찾아왔더군요. 보통 인연은 아니죠. 그래서 저도 PM 역할을 자청해 내 집 짓듯이 애정을 쏟았던 것 같아요.

건축주는 어떤 집을 요청했나요?
아시겠지만 건축주 가족은 ‘이왕이면 색다른 집’을 원했어요. 익숙하게 살아온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에 살겠다는 건 그들 모두에게 도전이자 모험과 같았을 거예요. 그 외에는 특별한 요구사항은 없었어요.

이때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아요. 어떤 질문으로 설계를 구체화해 갔나요?
정영한 아키텍츠만의 방식이 있어요. 먼저 간단한 질문지를 건네요. 거기엔 원하는 방의 개수나 공간의 크기에 관한 정량적 데이터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어디였나?’ ‘그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나?’와 같은 물음이 들어가 있죠. 그러니까 마음 저 깊숙이 있는 공간에 대한 기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특히 주택 설계에서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주자의 내밀한 정서와 감수성이 어디로 열려 있는지, 감정을 일으키는 공간이 무엇인지를 건축가가 파악해야 하죠. 그래야 그 사람만을 위한 집을 만들 수 있어요. 이 같은 과정이 설계 일이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해요.

ⓒYounghanChung Architects
ⓒYoon, Joonhwan

 

정, 은설은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집이죠. ‘몇 층짜리 집이라고 해야 하나’ 이 질문만으로도 한참을 궁리해야 했습니다. 왜 이리 층이 많고 갈림길도 있는 복잡한 집을 만들었나요?
정, 은설은 사람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집이죠. 어른, 아이 구분할 것 없이요. 이 방에서 저 방에 가려면 수평 이동뿐만 아니라 수직 이동도 필요하죠. 그러한 다양한 움직임이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이 장소만의 고유함을 인식하게 만든다고 봐요. 즉 차별화란 건축의 특별한 외양이 아니라 장소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공간의 오리지널리티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걸음에 따라 눈앞의 장면이 달라지고 피부에 느껴지는 온도가 달라지니까요. 시각적 아름다움은 쉽게 잊히지만 체득한 감각은 오래 남는 법이죠. 저는 그래서 거주자를 운동하게 만드는 집을 선호해요. 아마도 어린 두 자녀는 한창 이 집에서 뛰어놀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어른보다 더 이 집을 잘 누릴 거예요. 저는 이 친구들을  ‘빛을 쫓아다니는 아이들’이라고 불렀어요. 천창과 측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하루에도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그 변화를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스킵플로어 구조가 이곳만의 경험과 감각을 만든다는 말씀이지요?
저는 거주자가 집 안에서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갈 수 있고, 자신만의 감각을 열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간의 구조적 실험뿐만 아니라 대지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조율한 창문의 위치나 크기, 각 공간에 섰을 때 시선의 교차점, 또 가변성을 고려한 효율적인 프로그램 분배 등의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해요. 그러니 공간에 있어 통상적 문법이 아닌 다른 시도로의 접근이 필요하죠.

 

ⓒYoon, Joonhwan
ⓒYoon, Joonhwan

 

거실의 폴딩도어를 젖히면 바람에 넘실거리는 청죽이, 안방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광안대교가, 44층 샤워실 천창을 올리면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관계도 모두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겠군요.
도심에 있는 대다수의 주택이나 아파트는 내외부의 경계가 명확하고 정형화되어 있는 보이드(창문)로 바깥과 대응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내외부의 경계가 조금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계절이 바뀌는 때, 해가 지는 때, 소나기가 내리는 때 그런 자연의 변화에 무심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건 사람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이해라고 생각해요. 물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의 특성상 창문이 크고 많으면 실내 온도 조절이 쉽지 않아요. 그러나 현존하는 기술을 영리하게 빌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영한 아키텍츠가 말하는 ‘기존과 다른 거주성’이란 바로 그런 뜻이군요. 이곳의 빛, 이곳의 바람, 이곳의 위치를 알고 산다는 것 등이요.
‘어떤 집에 살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흔히들 ‘시적인 공간’ ‘사유하는 공간’ 등과 같은 멋진 답을 떠올려요. 하지만 그러한 공간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지요. 특히나 앞뒤로 빼곡하게 건물이 들어찬 도신 한가운데서는 더욱 어려워요. 그래서 공간의 구조와 구성을 실험해 단서를 찾아내고 구현하고자 해요. 이 집은 말씀처럼 한눈에 쉬이 읽을 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을 들여 경험해야 하는 집이죠. 저는 사적, 공적 공간을 구분할 때도 사적 공간이 어떻게 사적일 것인가, 공적인 공간이 어떻게 공적일 것인가를 오래 붙잡고 고민하려고 해요. 그게 정영한 아키텍츠 주택 설계의 핵심이에요.

 

ⓒYoon, Joonhwan

 

특히 ‘실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나요?
늘 관성에 몸을 맡기는 것, 그래서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건축가에게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쉽게 가고 싶은 부분들이 불쑥불쑥 보이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 편안함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번 ‘실험’이라는 화두를 던지죠. 이는 제가 사무소 규모를 더 키우지 않는 이유와도 연관돼요. 규모를 키우다 보면 보여주기 위한 건축을 할 것이고 직원들에게 의존하게 될 거예요. 저는 건축가로서 오래 은은하게 지속하는 삶을 꿈꿔요. ‘내실 있는 아틀리에’라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고 싶으므로 정영한 아키텍츠의 어젠다를 꾸준히 쌓는 일이 더 중요해요.

정, 은설은 ‘9×9 실험주택’(2013)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두 주택 모두 강한 내향성을 띠지만 정, 은설이 조금 더 주변과 긴밀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어요.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창문 너머의 도시 풍경을 계속 마주할 수 있고 날씨 변화를 오롯이 실내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그렇죠. 집 안에 다양한 레벨값이 있다는 점도 특이할 만한 요소예요. 그래서 분명 구별된 공간임에도 사적 공간으로써 하나의 방인지 공적 공간으로써 커다란 계단참인지 단정할 수 없어요. 즉 거주자가 능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가변 공간인 셈이죠.

 

9×9 실험주택 ⓒKim Jae Kyeong
실험주택 3제 ⓒYounghanChung Architects

 

정영한에게 실험주택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실험주택이란 말은 이미 있었어요. 건축 역사를 살펴보면, 저렴하게 대량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는 주택을 설계한 1923년 게오르그 무헤의 암호른의 실험주택, 그리고 기초가 없는 건물, 비정형 벽돌, 다양한 기둥 구죠, 태양열 난방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한 1952년 알바 알토의 무라찰로 실험주택 등이 있지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실험주택은 최소 기능의 수납, 즉 퍼니처 코리도furniture corridor라는 개념을 통해 가구, 위생, 설비, 전기, 환기 및 냉난방 등을 최소 공간에 모으고 나머지 공간을 거주자가 정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집이에요. 이분법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 것, 경계선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 벽과 문이 없어도 기능하는 프라이버시 공간을 만드는 실험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험의 의미는 건축가의 작위적이거나 직관적인 논리를 사용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에요. 거주자가 능동적으로 다양한 공간을 탐색하며 물리적 완결이 아닌 거주의 완결을 통해 또 다른 거주성을 시험해 보는 것을 말해요.

정영한 아키텍츠의 다음 실험주택도 곧 만나볼 수 있나요?
서울시 성북동에 실험주택 3제(twig house)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에요. 얼마 전에 심의를 마쳤고 2022년에 착공할 계획이죠. 나선형 계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높이와 크기의 공간들이 마치 잔가지처럼 외부로 뻗어 나가 이 장소만의 특별한 경관과 맞닿아 있어요. 이 주택 또한 기존 문법과는 다른 공간으로, 거주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이 도심 한 켠에 자리 잡을 것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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