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꽃을 사랑하는 이의 집

[Life in greenery] ⑨네임리스 건축의 '녹음의 집 House of Green'
ⒸKyung Roh
글. 김윤선 에디터  자료.  네임리스건축 NAMELESS Architecture

 

굽이굽이 흐르는 시내를 낀 깊은 산골 마을에 유달리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을 사랑하는 이의 집이 있다. 집에는 그가 사랑하는 녹색들이 그득히 담겼고, 오랜 숲속엔 작은 숲 한 채가 새로 생겼다.

 

강원도 산골 깊은 숲 속에 자리 잡은 녹음의 집 ⒸKyung Roh

 

풀과 꽃을 사랑하는 이의 집

‘녹음의 집’은 풀과 꽃을 사랑하는 이의 집이다. 젊어서부터 풀과 꽃을 좋아했던 그가 강원도 산골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건 꽤 오래전 일이었다. 은퇴 후 본격적으로 강원도에 내려와 노후의 삶을 꾸리려 먼저 집을 수리했다. 그리곤 손 뻗으면 닿는 곳에 그토록 좋아하는 풀과 꽃으로 가득한 온실을 새로 지었다. 그의 시선에서 이 온실은 또 하나의 집이다.
소싯적에 그는 서울에서 을지로를 누비며 일했다. ‘디자인’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종이로 카드도 만들고 공책도 만들었다. 마르고 닳도록 종이를 만지며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냈다. 종이도 나무로 만든 건데, 하는 생각에 다다르니 어쩌면 사람은 평생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가 싶다. 그는 이제 빌딩 숲이 아닌 진짜 숲에서, 자라서 종이가 될지도 모르는 나무를 만진다. 풀과 꽃을 디자인한다. 국내 최초의 디자인 회사 ‘바른손’의 창업주 박영춘 회장의 이야기다.

 

ⒸKyung Roh
ⒸKyung Roh

 

식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

기능적으로는 온실이지만 식물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이 집에는 식물, 그리고 식물을 사랑하는 이가 함께 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생각이 녹아 있다. 집이란, 먹고 잠을 청하는 ‘사는 Live’ 공간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마주하고 사색에 잠기는 ‘머무는 Stay’ 공간이기도 하다. ‘녹음의 집’은 식물이 자라나고 사람이 머무는, 식물과 사람이 공존 共存하는 곳이다.

평면도. 좌측의 기존 집에서 연결되도록 설계했다. ⒸNAMELESS Architecture

 

녹색의 경계가 확장되는 투명한 공간

| 투명한 유리의 물성
집 안의 녹음이 밖으로 발산되는 투명한 공간을 위해 난반사가 거의 없고 햇빛 투과량이 100%에 가까운 저철분 유리가 쓰였다. 온실을 감싼 프레임 역시 바깥에 노출되는 부분을 최소화한 히든바hidden bar 형식이 적용되어 집의 투명성을 더한다.

 

난반사가 없는 투명한 저철분 유리를 사용했다. ⒸKyung Roh
ⒸKyung Roh

 

| 온실 기능 최적화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
온실에선 단판 유리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람이 머무는 것을 고려해 복층 유리가 쓰였다. 복층 유리는 단열 성능이 좋아 여름에는 열기를 잘 빼주고, 겨울에는 열기가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효과적이다. 열기를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사방과 천장 전부 창문을 열 수 있게 해 자연 환기 기능이 극대화된다. 한겨울엔 물론 난방도 필요하지만, 기계설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 묻어 있다.

 

벽면과 천장의 창문을 전부 열어 자연환기를 유도했다. ⒸKyung Roh

 

| 비대칭이 만드는 다채로운 공간의 감각
박공지붕은 기능적인 이유다. 유리를 지붕재로 쓰기 위해선 누수와 적설 하중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유리로 된 온실 지붕은 비와 눈이 자연스럽게 지면으로 흘러내려 가도록 보통 35~40도 각도로 구배를 준다. ‘녹음의 집’은 경사지붕과 박공지붕을 혼합해 비대칭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존 집에 닿는 면은 박공지붕으로, 산책로와 면하는 곳은 경사지붕으로 계획해 두 지붕을 연결했다. 지붕의 작은 변화가 색다르고 인상적인 공간 감각을 선사한다.

 

ⒸKyung Roh
박공지붕과 경사지붕이 혼합되어 다채로운 공간감을 만든다. ⒸNAMELESS Architecture

 

| 건축도 나무처럼 땅에 뿌리를 내린다
온실 내부 바닥이 지면보다 1미터 정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땅이 얼어들어가는 정도, 동결심도 freezing depth 때문이다. 건물의 기초를 만들 때 지면보다 얼마만큼 아래에 박아야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지열로 인해 얼지 않는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듯이, 건축도 땅에 뿌리를 내리나 보다.

 

단면도. 건물이 지면보다 1m 정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NAMELESS Architecture

 

시간과 공간을 잊은 숲 한 채

여름에는 그저 주변과 함께 흐드러진 하나의 숲이 되지만, 겨울이 되면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밖은 덮인 눈으로 온통 하얗고 집 안은 세상 물정 모르는 풀들이 한층 푸르다. 시간과 공간을 잊게 만드는, 그야말로 숲 한 채가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차라리 외딴 섬 같다. 계절마다 숲과 집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풍경을 목격하는 경험은 ‘녹음의 집’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다. 이곳에선 춥든 덥든 자연의 풍요로움 외에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눈 쌓인 겨울, 녹음의 집 내부의 모습 ⒸKyung Roh

 

내일 일은 모르는 녹색의 풍경

공간에 식물을 들이는 일은 애당초 계획이 무색하다. 건축가와 조경가, 혹은 원예가가 협업해 어떤 의도가 있는 공간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구현하더라도, 사용자가 어떤 생각과 애정을 가지고 가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완공 시점의 결과물이 그 의도에 부합해 잘 관리될 수도 있고,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 전혀 다른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건축가는 의도와는 다른 공간이 탄생하는 지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완전히 풍성한 공간이 될 수도, 심지어는 폐허가 될 수도 있어요. 물리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과 그 공간에 식물을 들이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에요. 건축가는 완전한, 흐트러지지 않은 무언가를 만들려고 항상 노력하죠. 하지만 그 공간을 채워 비로소 완성하는 대상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죠. 그 대상이 식물이라면 의도하지 않은 여러 현상과 불확실성이 극대화돼요.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삶에 즐거움을 줍니다.”
내일 일은 결코 알 수 없는 집의 풍경이 기대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테다.

 

ⒸKyung Roh
ⒸKyung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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