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진 않지만 행복하게”

[Interview] 박현근 건축가가 말하는 ‘달리는 집’
ⓒBRIQUE Magazine
에디터. 김지아  사진. 이한울, 윤현기  자료. 재귀당 건축사사무소

 

박현근 소장은 2015년 자신의 집인 ‘재귀당’을 설계한 일을 계기로 같은 이름의 사무소를 개소해 다양한 건축주의 삶에 맞는 주택을 설계하고 있다. 건축주 개개인의 생활과 관점을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집을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건축 작업을 지향한다. 건축주 가족에게 꼭 맞는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라며 설계한 ‘달리는 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현근 재귀당 건축사사무소 소장 ⓒBRIQUE Magazine

 

달리는 집은 주변 집들과 달리 단층이고 외벽 색이 비교적 밝아요.

설계하면서 집이라는 느낌보다 센터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 노인·장애인 복지시설과 발달장애 아동센터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살려 부모와 아이 모두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뒀죠. 집이면서 치유하는 공간이 되려면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설계를 통해 가족을 설득하셨다고 들었어요.

건축주와 상담하면서 아이를 위한 집이 어떤 것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집이 정말 아이를 위한 공간이려면 대안으로서의 주말주택이 아니라, 온전한 집이어야 한다고 건축주를 설득했죠. 처음에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은 집을 원했는데, 설계안을 두 가지로 나누어 제안했어요. 어떤 집을 원하느냐에 따라 설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요. 두 안을 보더니 대안으로서의 또 다른 작은 집이 아닌, 가족 모두 터를 옮겨와 생활하며 지낼 수 있는 완전한 주택을 선택하시더라고요. (웃음)

초기 개념도 ⓒJaeguidang Architects
중정 형태의 개념도 ⓒJaeguidang Architects
최종 설계안에 가까운 개념도 ⓒJaeguidang Architects

 

선택한 설계안의 집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목적이 명확한 집이었기 때문에 막내 아이를 위한 요소를 우선으로 했어요. 설계 전에 건축주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가봤는데, 그때도 아이가 물을 너무 좋아해서 아파트 싱크대 위로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물의 촉감을 굉장히 친숙하게 생각한대요. 그래서 겨울에도 실내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현관을 크게 만들었어요. 집에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하니까 거실에는 미끄럼틀을 두고, 뛰어다니면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긴 복도를 계획했죠. 두 딸에게는 각자의 방을 주고, 가족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중정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니 건축주 내외분도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현관 ⓒHanul Lee

 

긴 동선과 큰 현관이 일반적인 주택의 공간 구성과 다르네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큰 현관이 있고, 거기서 한 번 더 들어가면 주방이 바로 나오는 구성이 주택에서 일반적이지는 않아요. 다만 건축주에게는 필요하겠다 싶어 그렇게 설계했죠. 외부인 듯하면서 내부인 공간은 주택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해요. 그 공간에서는 맨발로 다니든, 신발을 신고 다니든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어 자유롭잖아요. 요즘 아파트식 평면에 지붕만 올린 전원주택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사실 그런 형태의 주거에서는 살다 보면 모호한 공간이 꽤 많아요.

 

모호한 공간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예컨대 거실은 우리나라 주거에서 상당히 모호한 공간이에요.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간이자 제사문화의 영향을 받아 가부장적이죠. 요즘 집들의 거실을 생각해 보면 소파를 놓고 TV를 두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실제로 살다 보면 그 공간을 잘 안 쓰게 되죠. 개인적인 생각인데 거실은 불화의 원인이 되는 곳이기도 해요. (웃음) 아빠가 TV를 보다가 할 일이 없으니 괜히 지나가는 딸 아들한테 숙제는 했는지 물어보고, 밥은 언제 먹는지 물어보죠. 그래서 요즘은 아예 거실에 테이블을 가져다 두면서 공간을 서재처럼 꾸미는 경향이 있잖아요. 저희 사무소에서 설계한 건물들을 보면 실제로 거실이 많이 없어요.

 

ⓒHanul Lee

 

거실을 현관이나 마당 같은 다른 공간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거실에서 하는 행위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거죠. 주방이나 응접실을 늘리거나 서재, 가족실, 세탁실 등 거실에 남아있던 기능을 공간별로 안겨주는 방법도 있어요. 달리는 집에서는 실제로 현관이 거실보다 더 많이 쓰이죠.

 

내부 공간에 목구조를 적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물의 분위기에 맞게 구조를 선택해요. 목구조를 선호하고 콘크리트를 선호하지 않는 그런 수준의 접근이 아니었어요. 건축주의 선호가 아닌 이상 공간에 맞게 구조를 택하려고 해요. 중정 타입의 복도에서는 목구조가 단열성이 좋기도 하고, 공사비도 좀 더 저렴해요. 또 아이를 위한 공간인 만큼 모던한 느낌보다는 따뜻한 느낌의 목조가 더 잘 어울리겠다 싶었죠.

 

ⓒHanul Lee

 

구조 외에도 내부 공간의 각종 요소들을 직접 제안해 주셨다고요.

재귀당에서는 건축과 인테리어를 따로 구분하지 않아요. 건축주들은 전체를 보지 않고 개개에 집중할 때가 많아 건축가로서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죠. 이 집에서는 막내 아이가 대문을 여닫는 방식도 함께 고민했어요. 딸들이 있는 집이니 밝은 색을 많이 쓰면 좋겠다고 권유하기도 했죠. 처음에는 청소하기 어려울까봐 짙은 색을 선호하셨는데, 세면대에 노란 타일이 없었으면 집이 정말 어두울 뻔했다고 후에 말씀하시더라고요. 또 한 가지 제가 제안한 건, 거실에 설치한 화이트보드예요. 막내가 낙서하기 좋아하니 만든 장치이기도 한데, 꼭 낙서가 아니더라도 가족이 소통하는 용도로 이용하기를 바랐어요. 딸들도 사춘기를 겪을 테고 부모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테니까요. 깨끗한 벽에 말끔한 간접 조명을 두는 등 심미적인 부분을 고려하기보다 이 집에서는 실질적으로 가족 구성원에게 도움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고려했던 것 같아요.

 

재귀당은 건축주와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무소로 알려져 있어요.

소통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생각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대화를 많이 해야 소통한다고 생각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소통을 많이 해야 좋은 건물이 나온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아요. 어떤 건축주에게는 건축가의 적극적인 강요와 결단이 오히려 그 사람이 짓고자 하는 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소통에 있어서 핵심은 서로를 향한 믿음이죠. 건축주를 위해 설계하지, 나를 위해 설계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소통은 이 집의 핵심을, 프로젝트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느냐에 있어요. 어떤 면에서 소통은 책임 회피일 수 있거든요. 결정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자 끊임없는 대화를 원하는 건축주도 있죠. 그건 소통이 아니라고 봐요.

 

재귀당 건축사사무소 사무 공간 ⓒBRIQUE Magazine

 

동기 부여가 되는 건축주와 작업하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달리는 집 건축주분이 저와 동년배였어요. 둘째 딸이 제 딸과 동갑이었고요. 건축주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에 공감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더 적극적으로 제안한 부분이 많아요. 이런 분들 집을 짓고 나면 굉장히 뿌듯해요. 제가 건축주에게 늘 드리는 말씀이 있어요. 건축주는 건물주가 아니다. 건물주는 결과의 주인이고, 건축주는 과정의 주인이다. 건축이라는 건 과정을 다 내포하고 있거든요. 과정의 주인이 된다는 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린 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거예요. 설계자의 능력이 건물을 만드는 게 아니고, 건축주의 품격이 건물을 만들어요. 상담을 해보고 아이디어 회의를 거친 후 계획안을 건축주에게 전하는 그 과정에서 건축주와 제가 맞을지 판단할 수 있죠.

 

건축주에 따라 작업하시는 주택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재귀당 스타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항상 있는 듯해요. 어떤 부분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건축주들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매번 건물이 다른데 재귀당인 걸 알아볼 수 있다고요. 추측건대 세로로 반복되는 긴 창, 합리적인 가격의 재료, 수직적인 공간, 노출 서까래 이런 부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BRIQUE Magazine

 

소장님의 취향이 반영된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다른 사무소들보다는 다양한 결과물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사용하는 재료의 가격은 조건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예산이 넉넉하지 않다면 외장재와 디테일보다는 공간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를 살리려면 공간과 면적을 포기해야 하는데, 건축주에게 공간을 경험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BRIQUE Magazine

 

그렇다면 주택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집도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식도 자기 맛을 내는 그릇이 다 따로 있잖아요. 짬뽕 그릇, 짜장 그릇, 전골냄비, 뚝배기 다 따로 있는데 사람은 다 같은 그릇에 담는 게 모순인 거죠. 음식보다 사람이 훨씬 다양하거든요. 살아온 궤적이 다른 만큼 요구도 다르고, 가치관이나 집을 대하는 자세도 다 달라요. 이렇게 다양한데 우리는 항상 얼마간 같은 공간에 살기를 강요받으며 살아왔죠. 자신의 삶과 맞는 공간을 탐구해 볼 기회가 적었어요. 부동산이라는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말은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는 집이어야 잘 팔리니까 그런 집만 생각하게 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주택을 설계할 때면 건축주에게 맞는 집을 찾아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집에 살았을 때 오는 충족감이 굉장히 커요. 공간감, 구성, 동선. 이런 데서 오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야 해요. 원하는 옷을 입었을 때, 원하는 음식을 먹었을 때 기쁨은 충분히 누리고 있잖아요. 이제는 공간에 대해 고민할 차례예요. 그런 의미에서 집에서 건축주에게 꼭 맞는 공간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Hanul Lee

 

재귀당 사무소 소개 글에 “화려하진 않지만 행복하게”라는 문구가 인상 깊었어요.

화려하거나 디테일이 살아 있는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건축하는 사람들에겐 항상 있죠. 그런데 어떤 프로젝트 하나로 끝을 보겠다는 식의 작업 방식은 지양하려 해요. 그게 아니더라도 조금씩 꾸준히 작업을 쌓아가는 게 저희 사무실 모토예요. 지속 가능한 건축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저도 일이 많고 너무 힘들 때는 새로 상담하러 오시면 제 표정이 안 좋아요. 제 표정이 좋아야 이야기도 잘 되고, 즐거운 집이 나오는 거죠. “화려하진 않지만 행복”하다는 게 건축하는 우리일 수도 있고, 건축주일 수도 있고 건물일 수도 있어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면 우리도, 건축주도, 건물도 행복한 작업이 결과적으로 좋은 작업일 거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죠. (웃음)

 

오늘날 집이 가져야 할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지금의 주거는 격동하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요. 부동산의 가치와 삶의 가치가 집요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저는 아파트를 팔고 일찍 주택을 지어 살고 있는데, 스스로 행복하게 꾸준히 잘해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때 집을 안 팔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해요. (웃음)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아파트를 떠나서 집만 놓고 보면 지금 주택에 다양한 시도들이 생기고 있죠. 주택이 다양해지고 있어요. 설계를 잘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한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월등하게 좋은 집이 많이 생겼어요.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지금부터는 건축주들이 공간이 갖는 가치를 더 많이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못 느껴봤기 때문에 모를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면적은 제곱미터당으로 나오지만, 체적 개념으로 수직적인 공간이 갖는 가치도 분명 있어요. 미술관을 거닐 때 받는 느낌, 종교적 시설에서 오는 느낌처럼 집에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집을 지어 살며 느껴보니 공간에서 오는 충족감이 삶에 자신감을 심어주더군요. 정량적으로 구현될 순 없지만, 그런 가치를 경험해 보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죠. 사람이 다양한 만큼 건축도 다양해져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건축주의 욕망과 집에 대한 욕망이 함께 다양해져야 건축도 다양해지겠죠. 아파트가 가질 수 없는 것, 불특정다수의 가치가 아닌 나만의, 우리 가족만의 욕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집에 투영될 수 있도록 한다면 앞으로 좋은 집이 많이 생겨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달리는 집이 어떤 곳으로 남기를 바라세요?

현판을 만들었는데 아직 못 갖다줬어요. 건축주 부부가 어묵탕 한 번 대접해 주겠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아직 초대를 못 받았네요. 우리 딸을 한 번 데리고 가고 싶어요. 지나가다 가끔 들를 수 있는 집이면 좋겠죠. (웃음) 무엇보다 그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집에서.

 

ⓒHanul Lee

 

You might also like

건축에도 올드머니룩Old Money Look이 있을까?

[정해욱의 건축잡담] ⑩ 정통과 퓨전의 변증법에 관하여

스테이 창업 전, 반드시 두드려보아야 할 돌다리 ‘스테이 스쿨’

스테이 스쿨 강사진으로부터 미리 들어보는 생존 전략

일상의 웰니스 라이프 큐레이터에게 묻다

[Wellness Lifestyle] ⑧ Life Curators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Portrait] 호텔을 만드는 사람 한이경

‘왜 홀리스틱 웰니스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Interview] 상하 리트릿 CCO & 총괄 건축가 — 캘빈 싸오Calvin Tsao

짓기 전에 꼭 넘어야 할 스무고개가 있습니다

[다시 만난 브리크의 공간] ① 서교동 카페 ‘콤파일Compile’ 황지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