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부력의 공간

[Focus] 이솝 제주
©Aēsop
에디터. 윤정훈 사진&자료. 이솝코리아

 

제주 바다를 목전에 둔 탑동로 길목. 회백색 벽 안쪽 깊숙이 자리한 주황빛 공간이 길을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조용히 사로잡는다. 칸딘스키의 말마따나 “주황은 노랑으로 인해 인류에게 더 가까워진 빨강Orange is red brought nearer to humanity by yellow”이라고 했던가. 명징하고 활력이 넘치지만 보는 이를 압도하는 기색 없이 온화하다. 브랜드 이솝이 제주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이와 같다.

이솝은 사려 깊은 디자인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믿음을 바탕 삼아 조화, 균형,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스킨케어 브랜드다. 1987년 호주 멜버른에서 설립되어 전 세계 약 20개국 200여 개에 달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정제된 방식으로 고객과의 접점을 깊게 좁히는 전략이 있다. 위치하는 지역마다 다른 모습을 갖춘 시그니처 스토어가 그것으로, 어느 하나 동일하지 않은 매장을 선보이는 반면 제품 패키지나 디스플레이에 있어서는 한결같음을 추구한다. 미적 다양성과 일관성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이솝이 브랜드 정체성을 공고히 다져온 비결이다. 스킨케어 브랜드가 이토록 공간에 공을 들여온 이유는 뭘까. 공간은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으로 고객을 이끌기 때문이다. 시각뿐 아니라 그 이외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다차원적 경험은 기억 한편에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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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콘셉트와 소재를 정하는 데 있어서 이솝이 특히 역점을 두는 점은 바로 매장의 현지화다. 스토어가 자리할 지역의 역사 문화는 물론, 소소한 동네 풍경과 지역 주민의 일상까지 상세히 살피며 영감이 되는 요소를 찾는다. 지역성을 접목한 디자인은 지역 내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독창성은 한층 높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지역 주민에게는 친근감과 신뢰를, 관광객에게는 신선함과 호기심을 안겨줌으로써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제주 탑동은 버려진 구도심에서 매력적인 콘텐츠를 담은 공간의 집합소로 거듭나고 있는 동네다. 스토어는 탑동 도시재생의 주역이자 엄선된 문화 공간과 리테일숍을 갖춘 디앤디파트먼트 내에 입점해 있다. 개발과 쇠퇴, 그리고 다시 재생의 길목에 선 탑동엔 여러 시간대에 걸쳐 형성된 복합적인 제주 문화가 공존한다. 이러한 긍정적 변화에 이솝 제주는 저만의 방식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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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제주를 지탱한 삶
공간 디자인은 뉴욕 기반의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Marsollier Villacorta LLC’가 맡았다. 이솝은 새로운 스토어를 계획할 때마다 해당 스토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신중히 선정한다.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는 지난 2021년 이솝 한남 스토어를 디자인하며 한국의 다양한 전통 요소를 연구한 이력을 가진 팀이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제주의 어로 문화. 제주에는 특별한 문화가 여럿 존재하지만, 어로 문화야말로 지난 수세기 동안 제주도민의 삶을 지탱한 문화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바닷속으로 잠수해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은 17세기까지 남성들의 몫이었으나 18세기 무렵부터 제주 여성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이에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해녀의 삶과 정신을 공간에 녹여내기로 했다. 단지 판매를 위한 장소를 넘어 지역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의의를 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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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라는 존중의 언어
이솝의 여느 공간이 그렇듯, 매장으로 들어서는 방문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특유의 향이다. 이어 홀수 단위로 정갈하게 늘어선 앰버 컬러의 용기는 이곳이 이솝의 공간임을 상기시킨다. 허나 익숙함도 잠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다란 주황색 파티션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파티션을 구성하는 네오프렌 시트는 해녀 잠수복의 원재료로, 제주 현지에서 공수한 시트를 하나하나 접어 쌓는 식으로 구현했다. 단순하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교함이 되레 강한 인상을 전달한다. 나아가 “심플이라는 개념은 그에 대비되는 복잡이란 개념을 전제로 한다”는 하라 켄야의 말처럼, 간결함 너머 정제된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많은 표현 방식 중 기꺼이 겹겹이 포개어 놓기만을 택한 데에는 시간의 켜를 있는 그대로 보이겠다는 겸손이 자리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주황일까. 해녀를 연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모습은 검정 잠수복인데 말이다. 제주도는 몇 해 전부터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후드가 주황색인 잠수복을 지급하고 있다. 즉 주황색은 바닷속에서 해녀를 식별하도록 돕는 장치이자, 거친 물결로부터 솟아오르는 활기찬 부력의 상징인 셈이다. 또한 이솝은 리서치 과정에서 독일 예술가 한스 햄머트Hans Hemmert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공기를 주입한 노란색 라텍스 조형물을 선보이는 그의 작업에서 색이 공간을 재정의하는 방식에 주목한 것이다. 주변 환경과 대비되며 빛을 받으면 퍼져나가는 노란색의 속성에 착안, 잠수복에 쓰이는 오렌지색이 공간을 규정하는 뚜렷한 정체성으로 역할하길 의도했다. 오렌지색의 파티션은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동시에, 노출콘크리트 내벽과 대조를 이루며 공간에 대한 몰입도를 한층 높인다. 다소 투박해 보일 수 있는 기둥은 해녀 낚시 장갑의 양모 직물로 만든 초록색 벤치 커버로 부드럽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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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어의 완성, 지속가능성과 경험
지속가능성은 이솝이 설립 이래 꾸준히 실천해온 가치다. 리핑버니Leaping Bunny 인증을 획득했으며, 기능적이면서도 환경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한 포장 용기를 사용한다. 스토어 디자인에서도 지속가능성은 주된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솝 제주 역시 기존 건물을 거의 훼손하지 않는 건설 방식을 따랐으며 현지의 목재와 파우더 코팅된 금속 세면대를 마련했다. 창가에 놓인 원형 진열대는 실제 사용 후 폐기된 잠수복을 재활용한 것이다. 해녀의 납 벨트를 형상화한 형태와 여기저기 빛바랜 부분에서 분주한 자맥질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지속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은 사용자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솝 제주는 가로수길점, 삼청점, 성수점 등과 더불어 ‘린스 앤 리턴Rinse and Return’ 캠페인을 첫 번째로 시행하는 스토어다. 사용한 공병을 깨끗이 세척해가면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다.

제품이든 그것이 놓이는 공간이든, 결국 추구하는 가치를 얼마큼 진정성 있게 드러내느냐가 브랜드 인식에 있어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낸다. 지속가능성과 더불어 지역성을 존중하는 브랜드 철학은 제품 체험의 순간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솝 제주의 컨설턴트들은 제주 문화를 반영한 공간 안내와 더불어 제주 자연과 제품을 연계한 감각적 설명을 제공한다. ‘성산일출봉 정상에 서는 순간’, ‘곶자왈 초입에 들어설 때의 느낌’과 같은 묘사는 ‘제주 속 이솝, 이솝 속 제주’라는 순환고리를 형성하며 방문객에게 보다 진한 인상을 남긴다. 공간을 하나의 지역으로, 제품을 하나의 세계로 확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이는 브랜드 공간의 가능성을 일깨울 하나의 실마리이자 이솝이 선보일 또 다른 공간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제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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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성에 대한 글로벌 브랜드의 존중과 해석

글. 노경록(지랩Z_Lab 소장)

 

창업을 하고 처음 제주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래 10년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를 시작으로 제주에서 몇 차례 공간을 조성할 일이 있었지만 제주의 지역성은 여전히 큰 숙제다. 탑동 일대는 아라리오 갤러리 탑동시네마와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그리고 다양한 개성의 로컬숍들이 제주에 대한 각자 나름의 해석을 보여주고 있어 즐거운 자극을 선사한다. 이솝 제주는 블루보틀 공간 디자인으로 유명한 건축가 조 나가사카Jo Nagasaka의 스키마타 아키텍츠Schemata Architects에서 리노베이션한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에 있는데, 개인적으로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다. 숙박, 편집숍, 레스토랑, 플랜트숍 등의 프로그램을 ‘롱라이프 디자인’의 일관된 철학으로 해석해 인상적일 뿐 아니라, 기존 건물의 흔적 보존과 새로운 디자인 사이의 균형감, 그리고 감각적 디테일로 가득하다. 이러한 장소에 들어서는 스토어가 어떠한 해석을 보여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인상은 강렬한 주황빛 공간. 나란히 줄지어 선 라벨을 앞세운 제품을 지나니 시선을 사로잡는 오렌지색 오브제 매대가 자리한 공간이 나타났다. 이솝은 입점하는 건물과 지역에 따라 다른 해석과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이기에 이 오렌지색에 담긴 의도가 더욱 궁금했다. 제주 스토어의 디자이너는 해외 건축가다. 제주에 익숙하고 잘 아는 디자이너가 적합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과 제한적 해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마르솔리에 빌라코르타는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를 시각화하고자 해녀의 잠수복을 공간의 주재료로 사용했다.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마주하는 해녀복은 주로 검정색이다. 제주 해녀의 복장은 일반적 옷감의 물옷에서 시작해 물안경 보급 후 방수·보온에 유리한 검정색 고무 잠수복까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1970년대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검정색 잠수복에 부표와 그물을 든 이미지에 이르렀다. 2012년부터 선박과의 추돌 방지 및 구난을 위해 시인성을 높이는 오렌지색 해녀복을 보급해왔다는 점은 이번 공간을 방문하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십수 년 후 우리에게 각인된 해녀의 모습은 오렌지색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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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 잠수복 원단을 접어 만든 파티션, 해녀 장갑의 재료인 양모 원단으로 만든 소파는 공간의 특별한 주제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러한 재료는 디앤디파트먼트 건물 날것의 공간감, 무채색과 대비되어 스스로를 빛내면서도 훌륭한 균형미를 보여준다. 낡은 잠수복 원단을 재활용한 창가 쪽 전시대에서 환경에 대한 이솝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공간에 담긴 디테일을 고려할 때 지역성의 해석에 대한 간단한 안내가 있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솝만의 해석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것이며, 모든 매장을 다르게 디자인하는 이솝의 철학을 더욱 공고히 다질 것이다.
스토어 구석구석을 구성하는 요소 중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싱크 디자인이다. 고객이 직접 제품을 사용해보는 경험을 중시하는 이솝은 비일상적 재료와 방식으로 세면대를 디자인한다. 이솝 제주는 물을 안정적으로 담는 오목한 상판 대신 표면이 살짝 볼록한 상판을 싱크에 사용했다. 이로 인해 물이 떨어지며 예기치 못한 모서리 등으로 흘러가는데, 고객이 직접 마주하는 세면대까지 경험의 해법으로 풀어낸 이 같은 시도는 이 브랜드를 더욱 특별히 바라보도록 만든다.

지역성은 여러 가지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 환경부터 생활 양식, 문화적 특수성, 건축 양식 속 풍습까지 다양한 범주에 걸쳐 풀이된다. 즉 모든 세계엔 그 나름의 크고 작은 지역성이 존재한다. 다양성과 존중에 기반한 지역성이 우리 삶에 녹아들 때, 지역성은 더욱 의미 있는 문화 요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제주와 같이 개성 강한 지역은 지역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동시에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제주에 대한 글로벌 브랜드의 존중과 해석은 이 지역의 특별함과 미래적 가치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로2길 3 이솝 제주

운영 시간.
10:00~19:00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휴무)

홈페이지.
www.aesop.com/kr

SNS.
@aesopskin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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