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Heritage is _____.] ⑧ 화학공장을 리노베이션한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
ⓒKyungsub Shin
에디터. 김지아  사진. 신경섭  자료. 에스엠엘 건축사사무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건축에는 다양한 시간을 오간 역사의 흔적이 존재하고,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그 흔적은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자리에는 분명 ‘헤리티지’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많은 건축가·공간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흔적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지나온 과거와 오늘날의 가치가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공간에서 헤리티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용어이며, 도시가 고민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헤리티지를 둘러싼 여러 개념이 오고 가는 이때, ‘한국의 건축·공간에 헤리티지는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부터 남겨야 할 것과 변형된 것,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은 계속된다.

 

① 오늘의 유산이 될 보편적인 풍경
② 스테이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 — 해남 유선관
③ 골목의 풍경, 노동의 가치를 투영하다 — 을지다락
④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 1980년대 다가구주택 — 구의살롱
⑤ 로컬이 만들어낸 공공의 헤리티지 — 민락수변공원 돗자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도어
⑥ 남겨진 것과의 넉넉한 공존 — 전봇대집
⑦ 부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 재건문구사 & 재건사커피
⑧ 폐공장,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 코스모40

 

한 시절의 쓰임을 다한 산업 시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국내에서 여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산업화를 함께한 공장들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지역 곳곳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지나 산업의 흐름이 점차 재편되면서 많은 공장이 가동을 중단한 채 방치되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방치된 건물의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해 건물의 수명을 늘리는 주목할 만한 사례가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인천 서구의 한 화학공장을 리노베이션한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도 그중 하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산화티타늄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던 코스모 화학은 1970년대 초에 인천에 자리 잡고 7만 6000㎡(23,000평)의 거대한 부지에 45개 동의 공장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화학 산업을 이끌며 지역 일자리를 창출해 온 코스모 공장 단지는 2016년, 첨단 설비를 갖춘 울산으로 이전을 결정하면서 빠르게 철거되기 시작했다. 이때 45동 가운데 한 동이었던 40동은 건물의 새로운 용도를 떠올린 한 지역민에 의해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공장 건물을 이루는 철제 기둥과 콘크리트벽, 기계들이 사라진 폐허의 공간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에 반해 건물을 살려야겠다 결심한 이는 바로 인천 서구 가좌동에서 13대째 터를 잡고 살아온 심기보 ‘신진말’ 대표다. 심 대표는 성훈식 에이블커피그룹 디렉터와 함께 이 건물을 F&B를 겸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양수인 삶것건축사사무소 소장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Kyungsub Shin

 

코스모40, 옛 건물과 새 건물의 공존

프로젝트는 공장의 공간적 요소와 50년의 시간을 지역에서 함께해 온 산업 자산이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기존 건물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리노베이션의 목표가 됐다. 하지만 건축법에 따라 건물을 수선하기 위해서는 새 단열재와 내화페인트로 남기고자 했던 그 흔적을 모두 지워야만 했다. 이에 건축가는 최소한의 증축을 통해 건물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고리 형태의 신관을 기존 공장에 삽입했다. 기존 공장 건물이 훼손 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내부에 몇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작은 건물을 올려 외부 계단과 연결한 것이다. 그렇게 새로 지은 신관과 구관은 독립된 건물로, 신관과 연결된 3층 공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옛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Kyungsub Shin

 

팔림프세스트, 덧씌우다

1층과 2층은 전시 및 공연장, 3, 4층은 F&B 라운지로 운영되어 온 코스모40은 최근 내부 공간을 정비하고 활성화하는 2단계 작업을 거쳐 한층 생동감 있는 건물로 거듭났다. 2단계를 담당한 임승모 에스엠엘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기존 공장 건물인 구관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동선을 정비하는 등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는 작업을 했다.

공장이 가진 구조적 특성과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인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1단계와의 관계를 고려해 2단계 작업에서 역시 공간적 맥락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2단계 작업의 콘셉트는 글이 쓰인 양피지 위로 또 다른 글을 덧씌운다는 의미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다. 내부 공간 디자인을 통해 더해진 새로운 요소가 기존의 공간 위로 덧대어지면서 그 위로 중첩되고 병치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Kyungsub Shin

 

기능성에서 편의성으로

공장은 본래 기능적인 시설로, 사실 사용자의 편의성이 주 목적인 공간이 아니다. 코스모40의 2단계 작업에서는 실제 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든 만큼 사용자의 편의와 안전을 위한 요소를 정비하는 일이 주된 고려사항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요청사항 역시 ‘여성과 아이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에 미끄러지거나 구두굽이 낄 가능성이 있는 계단부의 그레이팅을 요철이 있는 철판으로 바꾸는 등 기능성에서 편의성으로 방점을 옮기는 작업을 했다. 단순히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공장의 모든 요소를 남기는 방식은 아니었다. 카페이자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는 오늘날의 맥락을 고려해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는 정돈의 작업을 거친 것이다.

 

ⓒKyungsub Shin

 

유영하는 폴리

수직적이면서도 볼륨감 있는 내부 공간을 채우기 위해 ‘폴리folly’를 도입했다. 폴리는 기능보다 형태가 강조되는 조형물로, 주로 장식적 역할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코스모40에 삽입된 폴리는 오브제인 동시에 분명한 용도를 가진 건축물이다. 공간과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폴리, 이벤트를 수용하는 폴리, 나아가 장식과 배경으로서의 폴리 등이 흩어져 공간을 메우고 있다. 채도 높은 주황색과 청록색으로 이루어진 폴리는 공간을 연결하고 방향을 인지하도록 돕는다. 주황색과 청록색은 주변 공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천 산업단지 일대에 풍경처럼 녹아 있는 색이기도 하다. 

 

ⓒSML

 

즉, 기존 공장 건물의 분위기는 유지하면서도 특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색을 가진 폴리를 설치해 내부 공간에 활기를 더했다. 예컨대 기존 공장의 기초 구조물, 그 위로 증축을 통해 더해진 구조물이 교차하며 마치 유적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벙커 공간은 채색된 폴리를 통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접근 가능한 공간으로 개선되었다.

 

ⓒKyungsub Shin
ⓒKyungsub Shin

 

익숙하지만 새로운 코스모40의 확장

1층과 2층 메자닌*으로 구성된 메인홀은 10m 높이의 대공간이다. 코스모40의 2단계 작업에서는 기존 공장의 장비들이 놓여 있던 장비 패드로 이루어진 2층의 도미노홀을 정비하는 일이 특히 중요했다. 장비를 지탱하는 콘크리트 덩어리와 철근 부식을 막기 위한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가 혼재해 있던 공간의 느낌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되, 시공상 필요한 부분들은 절개해 결을 정돈했다. 또 2층 바닥에는 내화 벽돌이 깔린 부분과 마감되지 않은 빈 부분이 공존했는데, 여기에는 기존의 바닥 패턴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패턴을 구성해 돌을 채웠다.

*메자닌mezzanine : 건물 내부의 층과 층 사이에 설치된 중간층

 

ⓒKyungsub Shin
ⓒKyungsub Shin

 

한편 3층은 구관과 신관이 연결되는 곳으로, 2단계에서는 두 공간이 이어지는 부위의 디테일을 살려 디자인하는 일이 필요했다. 브릿지를 통해 구관과 신관을 연결하되 바닥의 단 차를 극복하는 계단을 설치했다. 이처럼 실제 도면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디테일한 보완 요소는 현장에서 직접 점검 후 보완을 거쳤다.

 

ⓒKyungsub Shin

 

벙커 공간과 마찬가지로 접근이 불가능했던 4층은 2단계 작업을 통해 활용 가능한 장소로 거듭났다. 철제 그레이팅 위로 장비가 놓여 있던 4층은 공장 이전과 함께 장비가 철거된 후 휘어지고 찢긴 그레이팅 데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억과 흔적이 보존된 그레이팅 플로어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이용자가 그곳을 경험할 수 있도록 붉은 색의 바닥 레이어를 설치해 길을 만들었다. 더해진 바닥 레이어는 기존의 그레이팅 바닥으로부터 45cm 정도 띄워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구조적으로 안정된 곳에 설치했다. 다소 번거로운 작업 방식이지만 안전을 위한 장치였다. 이를 위해 구조 검토를 받아 최소한의 지점을 뚫어 그레이팅을 일일이 따는 시공의 과정을 거쳤다. 마치 레드카펫처럼 조성된 길을 따라 걸으며 이용자는 공간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체험할 수 있다.

 

ⓒKyungsub Shin
ⓒKyungsub Shin

 

그뿐 아니라 4층 가장 깊은 곳에는 주황색 그레이팅월과 벨벳 커튼으로 구획된 그레이팅홀을 계획했다. 여기서 그레이팅월은 2단계를 통해 설치된 현재의 레이어로, 기존 건물의 내벽과 교차하며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또 벨벳커튼으로 둘러진 내부 공간은 가변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미래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Kyungsub Shin
ⓒKyungsub Shin

 

임승모 소장은 2단계 작업을 두고 “과거의 요소와 완전히 똑같은 재료와 형식으로 공간을 복원하기보다는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재료를 사용해 중첩과 병치의 방식으로 공간을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코스모40은 기존의 질서 위로 쌓아 올린 새 요소들이 서로 호흡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Kyungsub Shin

 

경계 없는 영감의 공간

‘경계 없는 영감의 공간’이라는 코스모40의 지향점은 건물의 동선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신관과 구관을 경계 없이 넘나들도록 설정한 동선은 2단계에서 더욱 다양하게 정비되었다. 1층부터 4층까지를 잇는 동선은 단일하지 않고, 내외부 곳곳에 동아줄처럼 존재한다. 한편, 접근이 용이한 1,2층에 카페를 배치하는 대신 이곳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3,4층을 F&B 라운지로 운영하는 독특한 공간 구성도 전시를 보다가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집중한 결과다.

 

ⓒKyungsub Shin

 

형태는 가능성을 따른다

에스엠엘 건축사사무소는 ‘형태는 가능성을 따른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에 따라 코스모40 작업에서 역시 내부 공간 디렉팅을 통해 가능성을 담아내는 작업을 했다. 공간의 전체적인 쓰임을 고민하고 기존 공간과 새로운 공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며, 가시적이고 잠재적인 요소를 통해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을 연결했다. 임승모 소장은 “안전을 고려하면서도 보편적 다수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고 전했다.

 

ⓒKyungsub Shin

 

인천 서구의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은 서울에 비해 문화 인프라가 다소 결여되어 있는 인천 서구 지역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클라이언트의 의지에 따라 구현된 공간이다. 코스모40이 위치한 가좌동을 기점으로 인천의 문화적 양분을 마련하고, 다양한 예술가, 창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도모하며 공간은 완성되어 가고 있다. 민간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공공에도 영향을 미쳐 점차 민관이 시너지를 내며 상생할 방안을 찾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천에 자리매김한 코스모40은 방문객과 지역 사회와의 관계를 고려해 새롭게 채워지고, 또 다시 비워질 것이다. 50년을 공장으로 자리하며 지역민들과 관계를 이어온 코스모40의 오늘과 내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Kyungsub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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