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도서실의 소소하지만 위대한 변화

[사사로운 공공 건축] ① 푸하하하프렌즈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미술도서실'
에디터. 윤정훈  사진. 노경  자료. 푸하하하프렌즈

 

[사사로운 공공 건축] 편견과 한계에 갇히지 않고 나름의 다름을 추구한 공공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공익과 합리라는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낭만과 이상을 내려놓지 않은 건축가들. 이로써 전에 없던 공공 건축물을 탄생시킨 사람들의 이야기. ‘공공 건축’과 ‘좋은 건축’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을 엿보는 일은 우리를 더 깊은 공간 경험, 더 나은 도시를 상상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주도한 일이 아니에요. 한 사서가 공간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됐죠. 저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예요.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요. 때로는 진심이 느껴진다는 이유 때문에 일이 하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래서 생각했죠. 돈 안 돼도 해보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술도서실이 새 옷을 입었다. 낡고  어두침침한 도서실은 은은하게 흐르는 빛 가운데 기분 좋은 쉼을 주는 곳으로 거듭났다. 도서실을 리모델링하고 싶다며 건축가를 찾아온 이는 한 명의 사서. 제안을 선뜻 수락한 이는 푸하하하프렌즈의 한승재 소장이다.

 

미술도서실 입구 ©Kyung Roh

 

수의계약*에 따른 건축 공사의 경우 예산이 일정 수준으로 제한된다. 열심히 할수록 손해보는 장사라는 뜻이다. 푸하하하프렌즈는 성수동 ‘성수연방’과 연남동 ‘대충유원지’를 비롯한 유명 상업 공간뿐 아니라 지난해 하이브HYBE 사옥을 설계한 규모 있는 사무소다. 즉 일거리 많은 사무소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한 소장에게 계기를 묻자 “욕심이 나서”라고 했다. 공간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서의 절박함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매매, 대차, 도급 계약 시 경쟁 또는 입찰이 아닌 적당한 상대방을 임의로 선택해 맺는 계약. 추정 가격이 2천만 원 이하인 공사의 경우 1인으로부터 견적서를 받아 수의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Kyung Roh

 

그리해 고사는커녕 결과적으로 일이 더 커졌다. 적당히 보기 좋은 수준으로 도배를 하거나 가구를 교체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기왕 하는 거 시원하게 다 부수고 ‘제대로’ 해보기로 한 것. 대대적인 철거 작업과 공간 재배치는 물론 든든한 협업자들까지 동원했다. 가구 브랜드 레어로우와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과 함께 가구와 조명 설계, 사이니지까지 일일이 제작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새롭게 문을 연 도서실은 입구부터 깊은 구석까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은 듯하다. 언뜻 특별할 바 없어 보이나 거닐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구석구석에 새겨진 ‘더 나은 공간’을 향한 고투의 흔적을 말이다. 미술관 한 켠에 딸린 작은 도서실이 품은 소소하지만 위대한 변화. 한승재 소장을 만나 치열했던 일련의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Kyung Roh

 


MISSION. 혼수상태에 빠진 도서실을 살려라

 

문체부 통계에 따르면 한 해 약 65만 명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찾는다. 그중 미술 도서실의 존재를 알고 이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천관 미술도서실은 1981년 덕수궁관 미술자료실에서 출발해 1986년 과천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장 도서만 52,800여 권에 달하는 규모. 하지만 기존 도서실 환경은 열람을 위한 공간보다는 책 수장고에 가까웠다.

위치도 문제였다. 마치 아는 사람만 아는 골목의 숨은 맛집처럼 로비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고객지원실을 지나야 비로소 나타났다. 내부엔 두툼한 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들이 촘촘히 줄지어 서 있었고 창문마다 붙은 시트지 때문에 실내는 물속처럼 어스름했다. 노후한 탓에 냉난방 시설도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홍현석 팀장(푸하하하프렌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혼수상태’였다.

 

들어가는 순간 답답한 느낌이었어요. 뭘 해도 이것보다 낫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죠. 온갖 곳에 책이 산재하고 의자들도 여기저기 쌓여 있었어요. 명색의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관 도서 자료실인데, 많은 아쉬움이 드는 공간이었죠.”

 

리모델링 전 도서실 <사진제공=푸하하하프렌즈>
리모델링 전 도서실 <사진제공=푸하하하프렌즈>

 


STEP 1. 조각난 공간을 하나로

 

도서실은 세 개의 서고, 사서 사무실 등으로 조각나 있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벽을 세워 구획을 나눴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공간을 비어 있는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야 했다. 우선 비내력벽*을 철거하는 작업이 우선 진행됐다. 그런데 아뿔싸. 생각보다 훨씬 많은 조적벽이 있었던 것. 철거를 시작하니 벽돌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시공 업체 사장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중을 받지 않는 벽.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내력벽과 달리 단순히 공간을 나누기 위해 사용하는 벽체이므로 철거가 가능하다. 주로 시멘트 벽돌로 쌓아올린 조적벽, 각재를 세워 만든 목공벽이 있다.

 

철거 현장 <사진제공=푸하하하프렌즈>

 

STEP 2. 책장은 사선으로

 

위에서 볼 때 ㄴ자인 도서실은 북동, 남동쪽이 창문으로 둘러싸인 형태다. ㄴ자로 꺾인 공간이 하나처럼 넓게 보이는 동시에 가장자리 창가에서 드는 햇빛을 중심까지 끌어들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묘책은 책장 배치에 있었다. 건축가는 빈 땅에 빗금을 그리듯 책장을 대각선 방향으로 세워 나갔다. 사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는 빛이 실내에 유입되는 경로는 물론 사람들의 움직임에 변화를 더한다. 비뚤게 놓인 책장을 따라 빙그르르 거닐다 보면 어느샌가 도서실 안쪽에 다다르게 된다. 그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너른 창 너머의 하늘과 나무. 그저 둘러보았을 뿐인데 가벼운 산책을 즐긴 듯하다. 

 

“보통은 책장을 똑바르게 세우잖아요. 그렇게 되면 공간이 제한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어요. 입구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도서실 안쪽까지 인지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공간이 더 길게 기억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해 질 녘 빛을 더 깊게 드리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리모델링 전 ©FHHH friends
리모델링 후 ©FHHH friends
©Kyung Roh
©Kyung Roh
간행물 서가.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도서 검색 PC와 복사기를 배치한 점이 눈에 띈다. ©Kyung Roh

 

STEP 3. 디자인과 실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다

 

바뀐 도서실은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나 실은 치열한 의견 조율의 산물이다. 크게는 공간 배치부터 작게는 책상 너비까지 건축팀과 사서들 간 끊임없는 대화가 오갔다.
사서실 위치가 그 예다. 대출반납대가 있는 사서 공간은 통상 출입구 바로 맞은편 또는 측면에 있기 마련이다. 애당초 건축가가 염두에 둔 자리 역시 입구 쪽이었다. 하지만 기존 도서실 앞 고객지원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입구에 사서실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사서들의 생각도 예상 밖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보다는 때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독립된 자리를 원했던 것. 그 결과 사서실은 도서실 중앙에 놓이게 됐다. 덕분에 사람 대신 정갈하게 놓인 책이 이용객을 먼저 맞이하는, 한층 여유롭고 담백한 입구가 탄생했다.

 

사서실을 안쪽에 배치한 덕에 활짝 열린 입구가 만들어졌다. ©Kyung Roh
사서 사무실 ©Kyung Roh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두고 싶다는 바람에 따라 공간 전체를 서가로 채우는 대신 열람석은 창가를 따라 배치했다. 책상 역시 사서들의 의견을 반영해 너비를 대폭 늘렸다. 폭이 좁으면 전시 도록이나 사진집처럼 큰 책을 편히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책장과 책장 사이, 열람석과 책장 사이 등 적정 간격을 확보하기 위해 센티미터 단위로 실무자들과 씨름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창가 열람석 ©Kyung Roh

 

“저희가 큰 틀을 잡으면 사서님들이 현실적인 애로사항을 짚어주었어요. 실무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정관념이 깨지기도 했죠. 실은 거의 싸우다시피 한 적도 있어요. (웃음) 그렇지만 디자이너와 실무자의 관점이 다행히 잘 섞여 적절한 결과를 찾은 것 같아요.”

 


DETAIL. 편의와 미감,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한 끗 차이’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불러오는 법. 도서실에 비치할 가구와 조명의 생김새도 세세히 고민했다. 책장, 도서 운반 카트, 간행물 서고, 큐레이팅 데스크, 창가 열람석 조명, 입구 로비의 조형물까지. 별도의 설계를 거쳐 제작한 다양한 기물로 디자인과 기능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열람석 스탠드. 선형 조명에 아크릴 판을 덧대 이른 아침 강한 햇빛과 외부의 시선을 적절히 차단했다. 아크릴 판은 은은한 빛을 연출할 뿐 아니라 유지 보수 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Kyung Roh
옆으로 미는 간행물 서가. 진열대를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착안해 디자인했다. ©Kyung Roh
읽은 책을 편하게 반납할 수 있는 선반. 서가의 사선 배치로 인한 자투리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Kyung Roh
도서 운반 카트. 좁은 곳까지 끌고 들어올 수 있는 크기로 제작했다. ©Kyung Roh
입구 로비 조명. 눈부심 방지를 위해 조명 사이에 타공판을 둔 것이 시작이었는데, 먹구름이 낀 듯한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Kyung Roh

 


EPILOGUE. 치열함 끝에 탄생한 가벼운 공간

 

“푸하하하, 레어로우, 오혜진, 인테리어 시공 업체까지. 이 중 쉽게 돈 번 사람이 없다는 게 멋진 현실이죠.” 한승재 소장이 말하는 도서실 프로젝트의 아름답고도 슬픈(?) 결말이다. 무척 제한된 예산이었기에 마감재는 최대한 평이한 것을 택하는 등의 방식으로 타협을 해 나갔다. 공사 막바지엔 인건비가 모자라 설계팀이 손수 마무리하기도 했다고. 이러한 프로젝트가 한 소장에겐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건축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 좋은 프로젝트를 할 기회를 많이 얻잖아요. 너무 조건이 좋은 일들은 때로 지루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치열한 프로젝트에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쉽지 않아서요.”

 

큐레이팅 테이블 ©Kyung Roh

 

이야기의 방점은 공공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열정 페이의 미화에 있지 않다. 다만 좋은 공간은 넉넉한 자본만이 아니라 어떤 진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은 공간에 대한 개인의 바람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물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푸하하하프렌즈에게 바뀐 도서실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물었다. 대답 역시 ‘푸하하하’다웠다.

 

“전시를 보다 보면 다리가 아프잖아요. 편하게 쉬다 가는 장소면 좋겠어요. 특히 창가 열람실 책상이 널찍하고 볕도 잘 들어서 한 숨 자기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서 자는 거 좋아했거든요. (웃음) 그렇게 가볍게 즐겨 찾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창밖에서 본 도서실 풍경 ©Kyung Roh

 


프로젝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도서실 리모델링

인테리어.
푸하하하프렌즈

가구 설계.
푸하하하프렌즈, 레어로우

위치.
경기 과천시 광명로 313 국립현대미술관 1층

면적.
463.46㎡

기계 & 전기. ㈜선이엔지

시공.
인테리어: ㈜상일이엔지
전기 설비: ㈜와이엠일렉트로닉스
냉난방 설비: ㈜신현공조씨스템
소방 설비: ㈜엘에이치방재
통신 설비: ㈜대성아이넷

가구 및 집기 제작.
㈜심플라인

그래픽 디자인.
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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