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술, 음악이 흐르는 공간

[Interview] 그래픽 노블 전문 서점 ‘그래픽’
ⓒMingu Kang
에디터. 김지아  자료. 오온건축사사무소

 

이태원 경리단길 뒷골목, 한적한 주택가 사이로 희고 멀건 건물이 들어섰다. 각진 건물들 틈에 창도 이름도 없이 둥그스름하게 솟아 호기심을 자아내는 곳. 하나의 덩어리처럼 무심히 놓인 건물 주위를 기웃거리다 보면 막연하게나마 그 정체를 가늠할 수 있다. 종이의 결을 닮은 외장재가 존재를 은근히 드러낸다. 책과 술이 있는 서점 ‘그래픽’이다.

 

ⓒMingu Kang

 

술 마시는 만화방을 콘셉트로 한 그래픽은 ‘그래픽 노블’ 마니아를 위한 공간이다. 그림을 의미하는 ‘그래픽’과 이야기를 뜻하는 ‘노블’의 합성어인 그래픽 노블은 흥미와 오락 위주의 기존 만화에서 한발 나아가 화려하고 독창적인 그래픽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통해 만화의 예술성과 문화성을 한층 끌어올린 새로운 장르다. 만화방도 만화 카페도 아닌 공간의 묘한 성격은 어쩌면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책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서점이면서 책방인 장소에서 일어나게 될 행위에 집중해 세심하게 공간을 구성했다. 만화와 술, 음악이 흐르는 서점 그래픽의 설계를 담당한 김종유 오온건축사사무소 소장을 만나 공간에 관해 물었다.

 

김종유 오온건축사사무소 소장 ⓒBRIQUE Magazine

 

서점이자 만화방인 그래픽은 책을 보는 행위에 방점을 둔 공간이죠. 설계에 있어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고려했나요?

일반적인 건축 설계 방식처럼 도시의 콘텍스트를 읽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사람들이 책을 보는 행태에 집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책 읽는 자세를 가장 먼저 연구했죠.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쪼그려 앉아 책 읽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독서 자세를 총 아홉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자세별로 필요한 가구 높이를 분석해 공간에 적용하는 방식이었죠.

ⓒOONN metaworks

 

1층 공간은 ‘역보upper beam’를 통해 들어 올려 계단 구조를 만들고, 책을 집어 든 후 바로 앉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바닥에는 식물의 잎에서 섬유를 추출해 가공한 사이잘이라는 천연 소재를 사용해 마치 멍석을 깐 것처럼 편히 앉을 수 있도록 했고요. 2층에는 자체 제작한 테이블과 소파를 마련해 앉은 자세로 책을 읽거나 반쯤 누워 책을 볼 수 있는 구조를 계획했습니다. 이처럼 공간의 주된 프로그램인 책에 집중해 내부 공간을 설계하고, 외관 디자인은 후에 마무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Mingu Kang
ⓒMingu Kang

 

외부로 난 창이 없는 건물인 점도 독특합니다.

건물이 위치한 경리단길 뒷골목은 한때 ‘장진우 거리’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장진우의 가게가 없어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많은 가게들이 떠난 상태로 현재는 주택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가깝죠. 건물 역시 남산을 등진 배치로 바깥 풍경으로 보이는 건 수많은 빌라들이 전부예요. 빌라와 빌라를 가로지르는 전깃줄이 가로수 나무줄기보다 많은 상태랄까요. 시공 과정에서 옆집 거주자분이 주택 내부가 들여다보일까 창의 위치가 어디인지 궁금해하기도 했어요. 창이 없는 건물이라 말씀드리니 안도하면서도 신기해하더군요. (웃음) 이렇다 할 조망이 없는 주변 환경이기에 창을 내지 않았는데, 조용해진 거리에 의뭉스러운 건물이 들어서게 되는 지점도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Mingu Kang

 

내외부의 곡선이 너른 공간감을 선사합니다. 밖에서는 호기심을 자아내고 안에서는 복도, 서가, 계단 등에 여유를 더하죠. 서점이자 도서관인 건물에 곡선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지가 코너에 위치해 자연스레 안으로 유도하고자 건물 형태를 곡면으로 만들었습니다. 입구를 찾기가 어렵지만 목적성이 분명한 건물인 만큼 적당한 친절함만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획 초기부터 클라이언트와 합의했습니다.

 

ⓒMingu Kang

 

천창과 벽 틈새로 드는 빛이 유일한데 우려되는 부분은 없었나요?

창을 없애고 독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내부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바람은 있었어요. 이에 일조권 사선 제한으로 층이 올라갈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건물 형태에 맞춰 층과 층이 만나는 곳에 생기는 틈 사이로 빛을 끌어들였죠.

 

ⓒOONN metaworks
ⓒMingu Kang

 

자연광이 제한적인 만큼 조도 계획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책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조명이 따라다닌다는 원칙을 갖고 설계를 진행했습니다. 창을 내지 않아 빛이 제한적인 만큼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조도와 광원의 위치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어요. 천창과 벽 틈새로 드는 빛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모든 조명을 개별적으로 계획했고, 자연광과 조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은은한 채광을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탈리아의 조명 회사 비아비주노Viabizzuno와 협업해 조도를 체크하고 조명 위치를 점검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Mingu Kang
ⓒMingu Kang

 

1층과 2층은 책과 독서가 주가 되고, 3층은 바가 중심인 공간이죠. 각 층은 공간적으로 어떻게 구분되나요?

처음 프로그램을 기획할 당시에는 1층까지는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고 2, 3층은 그래픽 노블 마니아를 타깃으로 한 회원제 공간을 염두에 뒀습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전 층을 일반인에게 오픈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전환했죠. 1층부터 3층까지 램프를 통해 이동할 수 있고 수직 동선인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 주차장까지 연결됩니다. 3개 층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보이는 데는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역할이 큽니다. 공간의 마감재 또한 내외부와 각 층을 연결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죠.

 

1층 평면도 ⓒOONN metaworks
2층 평면도 ⓒOONN metaworks

 

책과 술이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상당히 특징적입니다. 동선 설정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음료는 지정된 3층 한 곳에서만 제공하고 나머지 공간은 책 읽기 좋은 공간으로 구분해 계획했습니다. 만화방이자 서점인 만큼 판매되는 책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선에 있어서는 출입 시 경험하는 전이 공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금은 어둡고 불친절하게, 그늘진 곳을 거쳐 진입하도록 의도했는데요. 그 공간을 지나며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복잡한 경리단길의 환경으로부터 잠시나마 환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셈입니다.

 

ⓒMingu Kang
ⓒMingu Kang

 

책을 비치하는 서가와 독서에 적합한 높이의 테이블, 침대이면서 의자인 가구 등 세심한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서가는 그래픽 노블 장르 서적의 평균 높이를 산정해 적정한 간격을 둔 선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비교적 낮게 설계된 테이블 또한 독서 용도로 직접 디자인했죠. 2층에 놓인 침대 겸 의자는 개인적으로 책 읽기 가장 편한 자세를 반영해 설계한 것입니다. 책 읽는 자세를 적용한 다양한 가구를 경험하며 사용자로 하여금 흥미롭고 편안하게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Mingu Kang
ⓒMingu Kang

 

책의 단면을 형상화한 세라믹 소재로 내외부를 마감했습니다. 세라믹을 마감 재료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래픽이 책을 다루는 공간인 만큼 종이와 연관된 형태를 고민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조부님의 오래된 유품인 사전을 보다가 책의 단면을 구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구상을 하던 중 어느 갤러리에서 도예 작가 문평의 작업을 보게 됐습니다. 책의 형태를 세라믹으로 만든 작업이었죠. 종이의 결을 세라믹으로 표현하는 협업을 제안했고 외장재로 쓸 소재까지 함께 정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OONN metaworks

 

통상적으로 외부에 사용되는 마감재는 온도와 빛, 그리고 오염에 강해야 합니다. 동서양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테라코타 타일과 기와 같은 소재가 지붕재로 활용되는 것은 열로 구워 강도가 강하고 오염물이 빗물에 쉽게 씻겨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인데요. 문평 작가의 작업 역시 열로 구운 세라믹 소재라는 점에서 마감재로서 이점을 갖습니다. 또한 소재의 결을 세로 방향으로 계획해 오염 물질이나 먼지 등이 쌓이지 않고 빗물에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Mingu Kang

 

질감이 드러나는 마감이 공간의 인상을 결정하는 듯한데요.

한 가지 재료로 건물을 마감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접근해 보면 복잡미묘한 질감이 눈에 띄지요. 회화의 ‘마티에르matiere’처럼요. 수직 결의 질감은 빛의 방향과 날씨에 따라 건물 입면에 다양한 연출을 더합니다. 빛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저렴하고 훌륭한 건축 재료죠.

 

ⓒMingu Kang

 

공간만 두고 보면 전반적으로 절제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만화와 술이라는 개성 있는 프로그램과의 조화가 흥미로워요.

공간의 주인공은 그래픽 노블이라는 책입니다. 건축은 한발 뒤로 물러나 공간감과 공기감을 만들어 주는 것을 목표로 했죠. 거기에 양념처럼 곁들여진 것이 바로 술이에요. 개인적으로 일상의 순간 중 책을 보며 술 마시는 시간을 가장 선호합니다. 몰입감도 높아지고 평온한 기분으로 책을 대할 수 있어 이 기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클라이언트가 이에 공감해 주어 흥미로운 공간이 탄생할 수 있었죠.

 

ⓒOONN metaworks
ⓒOONN metaworks

 

‘만화 카페’와 ‘만화방’ 사이 어떤 공간인 듯합니다. 그래픽이 앞으로 어떤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나요?

계획 초기에는 과거의 만화방처럼 ‘라면을 팔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우스갯소리로 나누었습니다. (웃음) F&B를 일정 부분 겸한 만큼 실제로 인스턴트 스파게티나 피자 등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여지가 충분히 있죠. 세련된 방식의 공간 운영에는 클라이언트나 저나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편하고 매니악한 연출이 우리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은밀하게 들러 유쾌하게 활용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겁니다.

 

ⓒMingu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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