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현자연 인턴 자료. 컬처램프
지난 4월 12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건축가 김종성과의 만남: 힐튼호텔 철거와 보존 사이’ 좌담회가 열렸다. 문화예술 전문 디지털 미디어 ‘컬처램프’가 기획한 이번 좌담회는 건축물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가 참석해 개발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현장에서 패널이 던지는 질문에 직접 답하며 의견을 나누는 형태로 이뤄졌다.
행사는 김 건축가의 발제로 서문을 열었다. 뒤이어 컬처램프에 밀레니엄 힐튼 서울(이하 힐튼호텔)을 주제로 각기 다른 칼럼을 발표한 홍재승(플랫/폼 아키텍츠 소장), 전이서(전아키텍츠 대표), 지정우(EUS+Architects 공동대표), 오호근(디엠피건축 대표) 건축가의 좌담이 이어졌다. 진행은 근대도시건축연구회 이사인 우대성(우연히, 프로젝트 대표) 건축가가 맡았다.
평일 오전의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행사에는 많은 이들이 참석해 힐튼호텔을 둘러싼 건축계의 여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철거가 결정되기까지
힐튼호텔은 1983년 완공 이후 40년간 자리를 지켰으나 코로나19 이후 수익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결국 2021년 이지스자산운용에 매각됐다. 이지스자산운용은 현대건설과 함께 힐튼호텔을 철거하고, 새로운 호텔과 오피스 타워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에 일부 건축가들은 힐튼호텔이 현대건축의 자산이자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임을 강조하며, 주요 부분만이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와 관련해 새건축사협의회는 지난해 2월, ‘남산힐튼호텔, 모두를 위한 가치’를 주제로「2022 근대 도시건축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고, 같은 해 4월에는 한국건축가협회에서 ‘남산 힐튼호텔과 양동정비지구의 미래’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건축계 내에서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힐튼호텔은 지난 연말을 끝으로 이미 영업을 종료한 상태다.
보존과 활용의 방법
행사를 주관한 컬처램프 함혜리 발행인은 “문화적 토양을 보다 건실하게 다지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이번 좌담회를 기획했다”며, “이 자리가 사회적 담론의 장을 열고 발전적인 대안과 올바른 정책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취지를 밝혔다.
천의영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1980년 당시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은 대부분 일본의 건축가가 설계했으나, 힐튼호텔은 김종성이라는 한국 건축가가 계획해 전 세계 건축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품이 되었다”며 “이러한 건축물을 철거하는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 다른 해법은 없는지 김종성과 중견 건축가가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 건축계에서 ‘힐튼호텔’의 의미를 다시금 돌이켜보고, 보존과 활용에 대한 지혜를 모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건축가의 제안
김종성 건축가는 건축물을 가능한 한 보존하면서도 이지스자산운용의 수익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법과 건축가로서 제안하고 싶은 대안을 소개했다. 또한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당국과 서울시의 행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존하고 싶은 것은 로비를 이루는 네 가지 재료입니다. 벽면의 오크, 바닥의 트래버틴, 구조체를 이루는 짙은 브론즈, 마지막으로 녹색 대리석까지요. 세월의 흔적이 담긴 물성은 재현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은 제분기업 퀴퍼스뮐레Küppersmühle의 공장을 MKM 미술관으로 재생하는 프로젝트에서 미로 같은 기존 부분을 살리고, 그 공간을 지나 새로운 장소에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동선을 계획해 건축물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힐튼호텔 또한 사적 공간이었던 로비를 공공영역으로 전환해 시민을 위한 장소로 자리매김한다면, 역사를 존중하는 서울시의 도시발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건축가 김종성
김종성 건축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최소한의 변경을 통해 객실을 주거 공간으로 바꾸는 안을 제안했다. 호텔보다 주거 공간이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 객실을 고급 아파트로 활용한다면 개발 주체가 최소한의 변형으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기존의 객실은 당시 기준보다 2배 이상 넓은 면적으로 계획돼 지금의 고급 아파트 평면으로 충분히 호환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기존 건축물의 보존을 위해 양보하는 용적률만큼 문화재 당국과 서울시가 높이 제한을 완화하는 행정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며, 개발 주체가 공중권*을 활용해 용적률을 이양하는 실현 방식까지 함께 언급했다.
서울역 앞 8차선 도로의 지하화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도로를 지하로 옮기면 지상이 공원이 되어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진입하고 시야가 열리게 된다. 남대문경찰서를 기동성 좋은 위치로 옮기고 공원의 끝을 힐튼호텔 로비와 잇는다는 구현 방법까지 함께 설명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타인 소유인 건물 구조물의 공중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로, 토지의 효율적ㆍ입체적 이용을 도모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다. 공중권 매매의 대표적 사례에는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 있다.
되짚어봐야할 거리
좌담회에 앞서 패널들은 힐튼호텔 보존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매체 기고를 통해 밝혔다. 지정우 패널은 ‘힐튼호텔, 시간 복합개발과 도심 시민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주제로, 전이서 패널은 ‘Demolish? or Not?(부술까? 말까?)’를, 홍재승 패널은 ‘힐튼호텔, 보존과 철거 사이’를, 오호근 패널은 ‘도시의 정체성을 기록하는 새로운 접근’이라는 주제로 각각 힐튼호텔 개발에 대한 의견을 남겼다. 좌담회에서는 각자의 기고와 연계해 건축물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을 발제했다.
지정우 패널은 건물과 대지를 따로 생각하지 말고 보존과 개발의 방향에서 다각도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정원을 포디움과 적극적으로 연계해 도시 속의 열린 공간으로 이용하는 안을 제시했다.
전이서 패널은 “힐튼호텔이 지어질 당시에는 호텔에 비용을 지불하고 장소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다”며, “힐튼호텔이 시민에게 개방되는 것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패널들은 김종성 건축가에게 1970-80년대 당시 호텔이 남산의 경관을 해치며 들어섰다는 지적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해 김종성 건축가는 “처음에는 ‘한 일(一)’ 자의 디자인을 했는데 남산과의 배치를 보니 너무 ‘너는 너, 나는 나’ 의 인상이 강해서 30도씩 절곡해 남산과 대화하듯 만들었다”고 답했다. 힐튼호텔이 남산 줄기를 막았다기보다는 서울역을 향해 내려오는 능선을 건물이 매듭지었다는 의미다.
홍재승 패널은 “이러한 논의가 용적률 이양, 공중권 등 행정이 발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며 후배 건축가에게 중요한 사안임을 짚었다. 그는 이 사안은 결국 수익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므로 가치 있는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사업 면에서는 어떤 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호근 패널은 무조건적으로 보존만 주장하기보다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담론 형성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도시는 계속 변화하는 곳이므로 서울이 유적처럼 남길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습이 바뀌어도 서울을 서울로 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해요. 우리는 지금 보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실 김종성은 당시 변화를 주도했던 주역이었고, 힐튼호텔은 서울의 현대건축을 이끌고 정체성을 만들었던 건물입니다. 이에 대한 국민 전반의 공감대 형성이 먼저라고 봐요.” -오호근(디엠피건축 대표)
남은 과제
참석자들은 “1970년대 방황하던 건축계에 큰 기틀을 잡은 것이 힐튼호텔”이라며 그 의미를 환기하고,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기능적 논의만 이루어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는 “‘무엇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시대가 당면한 과제”라고 언급하며, “전통을 억지로 재현하기보다 현재의 건축을 보존하는 것이 오히려 가치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김종성 건축가는 “개발주체와 건축계가 윈윈win-win하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행정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제안했다.
진행을 맡은 우대성 건축가는 “작년에 많은 단체에서 이미 힐튼호텔 보존과 그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냈지만 이런 자리를 또 한번 마련한 이유는 영업을 종료했지만 건물이 아직 그 자리에 있고, 건축가 김종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라며, “건축계가 그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좌담회를 마무리했다.
이날 자리에는 건축계 원로와 현역 건축가, 건축과 교수, 건축 전공 학생 등 170여 명이 참여했다. 행사 내용과 패널의 칼럼 등 자세한 이야기는 컬처램프(http://www.culturelamp.kr/)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