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e Factory Town’, 거대한 도시 공장을 가다

[Archur의 낯선 여행] ② 르 코르뷔지에의 고향이자 도시 건축의 태생지, '스위스 라쇼드퐁'
ⓒarchur
글 & 사진. 스페이스 도슨트 방승환  자료. Getty Images Korea, 스위스 관광청, 라쇼드퐁 시립도서관

 

‘Archur’ 라는 필명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도시와 공간을 안내하는 방승환 작가가 <브리크brique> 독자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시지만 그 안에 낯선 장소,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업들을 소개해 새로운 영감을 드리려 합니다.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소개와, 현재에 이르게 된 이야기, 그리고 환경적 맥락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Archur와 함께 이색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보시죠.

 

쥐라 산맥을 등지고 자리 잡은 스위스 라쇼드퐁의 전경 ⓒGetty Images Korea

 

라쇼드퐁La Chaux-de-Fonds은 흑백 이미지로 기억되는 도시다. 근대건축의 대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20대 전반에 설계한 건물의 사진들을 대부분 흑백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인터넷을 통해 컬러 사진을 보면 오히려 흑백사진보다 실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4년 전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그에 대한 전시가 열렸는데, 당시 전시 제목이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였다. ‘아버지’라는 표현이 그의 영향력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일종의 의식처럼 도시로 가기 전날 밤 침대에 기대 지역의 역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라쇼드퐁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는 쥐라Jura 산맥에 있는데, “작년 겨울과 올겨울, 두 개의 계절만 있다”라는 지역의 격언이 있을 만큼 추운 곳이다. 대개 이런 혹독한 환경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이보다 더 가혹한 현실을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이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 계기는 카타리 교파Cathars의 정착이었다. 남프랑스에서 교세를 떨치던 카타리파는 13세기 종교 전쟁(Albigensian Wars)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물질을 악의 근원으로 간주했던 카타리파는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했다. 200년간 이어진 종교재판으로 카타리파는 소멸했는데, 라쇼드퐁이 그 소멸의 장소 중 하나였다. 16세기 말에는 남프랑스 지역의 위그노파Huguenots가 종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개인 차원에서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와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기존 체제와 다른 신념을 지닌 집단과 개인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이 일대에는 독립적이며 반체제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역사적으로도 스위스보다는 프랑스 남부지역과의 관계가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라쇼드퐁을 포함한 쥐라 주(Canton of Jura)는 분리 독립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 연방은 이 일대 시계제조업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수도를 베른Bern으로 옮기면서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라쇼드퐁 중앙역 앞 도시의 풍경 ⓒarchur
라쇼드퐁의 중심축이자 가장 번화한 레오뽈-호베흐 거리 ⓒarchur

 

라쇼드퐁에 도착해 가장 먼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들을 둘러봤다. 대부분 도시 서쪽, 산에 인접한 뿌유헬레 거리Chemin de Pouillerel 일대에 모여 있다. 그 중 메종 블랑쉬Maison Blanche와 빌라 슈보브Villa Schwob에서는 이후 그가 주장한 ‘새로운 건축의 5형식’의 초기 버전을 확인할 수 있다.

빌라 슈보브에서 레오뽈-호베흐 거리Avenue Leopold Robert를 따라 도심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점이 보였다. 혹독한 추위에도 창문이 컸다. 그리고 블록의 크기가 일정했으며, 도로의 폭이 넓었다.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몸도 녹일 겸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검색을 시작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설계한 ‘메종 블랑쉬’ ⓒarchur
‘빌라 터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빌라 슈보브’ ⓒarchur

 

1794년 발생한 대화재는 도시의 일부분을 파괴했다. 큰 재해로 폐허가 된 후 재건을 위해 새로운 도시계획을 수립하는 건 일반적인 과정이다. 라쇼드퐁의 새로운 도시체계를 수립한 사람은 모와즈 페레장띠Moise Perret-Gentil와 건축기사 찰스 헨리 주노드Charles-Henri Junod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상하수도 체계를 보완했다. 시민들의 위생 개선이 목적이었지만 침투성이 큰 지질로 인해 소방용수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도시의 주산업인 시계제조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는 인공조명이 발달하지 않아 정밀한 시계제조를 위해서는 자연광 확보가 필수였다. 그래서 새로운 도시계획을 통해 동지冬至 기준 작업장이 있는 모든 건물 정면에 하루 종일 빛이 비춰질 수 있도록 블록의 방향을 태양 궤적에 맞췄다. 그리고 건물 높이를 제한했다. 블록 안에는 한 개의 켜만 두어 직사광이 들지 않는 북쪽에는 건물을 배치하지 않았다. 또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일터와 집이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주인집, 작업장, 가내작업을 위한 주택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

시계제조업에 최적화된 도시계획은 제대로 작동했다. 1870년 스위스 시계 제조 노동자들의 약 90%가 새로운 도시계획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작업을 했다. 당시 시계제조 방식은 장인 중심에서 분업화된 공장생산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는데, 이러한 변화를 새로운 건물과 도시가 받아줄 수 있었다.

 

1841년 승인된 찰스 헨리 주노드의 계획안 <출처=라쇼드퐁 시립도서관>
1930년대 도시 전경 <출처=라쇼드퐁 시립도서관>
자연광 확보를 위해 태양괘적에 맞춰 배치된 도시의 건물들 <출처=구글어스>
시계제조업을 위한 거대한 기계이자 시스템인 라쇼드퐁 <출처=스위스관광청>

 

카페를 나와 바라본 도시의 풍경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밋밋하고 심심한 디자인의 건물은 거대한 기계 속 부품 같았고 곧게 뻗은 길은 부품을 연결하는 전선이나 회로처럼 보였다. 길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지우고 시계 부속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상상하자 1867년 칼 마르크스Karl Marx가《자본론》에서 라쇼드퐁을 설명하기 위해 쓴 ‘Huge Factory Town’이라는 표현이 공감되었다. 2009년 유네스코UNESCO는 ‘하나의 산업을 위해 도시가 어떻게 계획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라쇼드퐁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거대한 기계 속을 걷다 르 코르뷔지에의 생가를 만났다. 건축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히는《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서 그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The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라고 선언했다. 그가 생각한 “집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한 기계, 안락함이라는 육체의 요구를 만족시킬 목적으로 만든 부지런하고 친절한 기계”였다. 여기서 ‘집’을 ‘도시’로, ‘안락함’을 ‘효율성’으로 바꾸면 당시의 라쇼드퐁을 묘사하는 정확한 설명이 된다.

한 인간에게 태어나고 자란 도시는 토대이자 첫 번째로 참고하는 선례다. 라쇼드퐁을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르 코르뷔지에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언을 했을지 궁금했다. 적어도 집을 기계에 비유하는 파격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랬다면 스위스 지폐에 그가 등장할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쎄흐 거리 38번지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생가 ⓒarchur
도시재건 후 급격하게 늘어난 유대인들이 세운 유대교회당 ⓒarchur
거대한 하나의 기계 부품 같은 도시 내 건물들 ⓒarc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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