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의 경지를 꿈꾸다

[Place_case] ⑩ 이화마을의 보고寶庫 '무아치'
무아치 외관 ©Place_case
글. Place_case (플레이스 케이스)  사진. Place_case, 김예지  자료. 무아치

 

일상에 영감과 풍요를 더하는 공간을 찾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p.lace_case 운영자이자 <브리크 brique> 애독자인 플레이스 케이스 Place_case님을 전문 기고자로 초대했습니다.
실내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공간 디자인PM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장소들을 큐레이션하여 주변 이들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펼치는 공간 이야기를 따라가며 여러분도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새로운 공간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는 오늘, 신구新舊의 균형을 맞추는 보이지 않는 추가 있기라도 하듯 세월의 멋과 가치를 추구하는 빈티지 디자인의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빈티지vintage는 원래 와인 용어로 ‘품질 좋은 포도를 수확한 해’를 뜻하는 프랑스어에 어원을 두는데, 해를 거듭하며 숙성되는 포도주처럼 시간이 축적된 가치 있는 물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통용이 된다.

서울 옛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 성곽길에 자리한 이화마을에는 이러한 빈티지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이 있다. 1960년에 지어진 국내 첫 연립형 주택에서 국적불문의 고가구와 오브제들을 선보이는 보고寶庫와 같은 곳, ‘무아치’이다.

 

무아치 외관 ©Place_case
1층 내부 전경 ©Place_case

 

무아치無我恥는 ‘나 스스로 경계 없이 자유로운 상태’라는 뜻으로 동양과 서양, 옛것과 새것의 구분을 두지 않는 디자인 철학을 반영한 브랜드명이다. 62년된 한국의 근대 주택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아프리카의 목재 스툴이 고려 토기 옆에 놓이고, 유럽의 미드센츄리모던 조명 아래 조선시대 사랑방 가구가 자리한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수집해온 빈티지 물품들을 아들 최진범 대표가 새로운 공간에 맞춰 큐레이션하는데, 세월이 담긴 담백한 미감을 공통분모로 둔 오브제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렇게 시대와 국가를 넘나드는 물건들을 한데 담아내는 집은 무아치가 추구하는 세계를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나란히 지어진 단층집과 2층집 두 채를 연결해 만든 쇼룸은 그 자체가 가진 역사성과 희소성 위에 새로움을 덧입어 깊이와 독특함이 돋보인다.

 

“이 집은 한국의 미드센츄리모던을 보여주는 현장이에요. 우리나라의 근대문화유산인 이곳에서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아우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자 합니다.” – 최진범 무아치 대표

 

1960년에 지어진 집 두 채를 연결해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 ©Place_case

 

집의 형태로 인해 적산가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집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주택영단에서 만든 국내 첫 국민주택이다. 1층은 시멘트블록과 온돌바닥으로 지어졌고, 2층은 목구조로 올려졌으며, 20평 대지에 단층집은 12평, 복층집은 14평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당시 지어진 약 130세대 중 대다수가 시간이 흐르며 증축과 철거를 거쳐 변용되었으나, 지대가 높은 언덕 위 쪽의 집들은 사람들이 떠난 뒤 방치된 채 원형을 유지한 곳들이 많았다. 무아치의 집도 10년 넘게 폐가로 남겨져 있던 곳이었으나 안목 있는 최 부자에게 발견돼 그 고유의 정체성을 최대한 살려둔 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새로운 외관은 이국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단정한 직사각형의 매스 옆으로 박공 지붕이 있는 2층집이 연결된 모습으로, 흰 벽의 아치형 게이트에는 유럽에서 온 빈티지 철창이 달려있고, 그 옆으로는 나무 창틀과 붉은색 시멘트 기와지붕이 넌지시 보인다.

 

두 집 사이의 공간에 만들어진 중정 ©김예지
2층집이었던 공간을 바라보는 뷰 ©Place_case

 

아치를 통과해 들어오면 작은 중정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이 작은 정원은 두 집 사이의 외부 공간에 슬레이트 지붕을 덮으며 탄생했다. 최 대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한 이곳에는 기존 바닥의 온돌을 철거하며 나온 구들장을 깔고, 원래 있던 재래식 작두펌프 아래 석재 물받이를 두어 집의 기억을 기념했다. 한구석에는 집만큼이나 오래된 살구나무가 새로 만든 지붕을 관통해 무성하게 뻗어있어 계절마다 정취를 더해 준다.

중정 양쪽으로는 각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2층 주택이었던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시원하게 뻗은 복층이 나타나는데, 벽을 자세히 보면 2층 바닥이 있던 흔적이 보인다. 1층의 천장을 철거하고 개방감을 극대화하면서도 집의 전반적인 구조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변경한 구간이다. 한층 높아진 천장 아래에 눈길을 끄는 장식은 옛 한옥의 문을 들어 올려 고정시킬 때 사용하던 들쇠(걸쇠)로 당시 복을 상징했던 박쥐의 형상을 한 쇠붙이들을 옹기종기 매달아 둔 풍경에서 소탈한 재치가 느껴진다.

 

2층 바닥의 흔적이 보이는 복층 공간 ©Place_case
두 집이 연결되는 통로 뷰 ©Place_case

 

1 층의 방들은 기존의 썩은 서까래를 보수하고 벽면 마감만 단정히 손질해 갤러리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집 구석구석을 액자처럼 담아내는 창문들은 원형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형태로 제작하되 그 크기와 높이를 조금씩 바꾸어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했다. 각각의 방들은 협소하지만, 그 안에 적당한 여백의 미를 두고 놓인 각국 각색의 오브제들이 풍성한 경험을 안겨준다. 두 집은 중정 뒤쪽의 벽을 헐어 연결했는데, 최 대표는 동선 상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벽체를 최소한으로 터서 원형을 보전하려 애썼다.

 

기존 창틀의 형태와 유사하면서도 무아치의 감각이 깃든 창틀. 잠금장치 또한 옛날 방식을 재해석해 디자인했다. ©김예지
단층집이었던 공간을 바라보는 뷰 ©Place_case

 

집 뒤편으로 가면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은 나무 계단이 나타난다. 2층으로 올라가 발코니에 서면 집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보면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지만, 지어진 당시에는 테라스까지 겸비한 신식 타운하우스로 상류층들이 거주했다고 하니 60년 동안 우리의 주거 모습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체감할 수 있는 스폿이다.

무아치로 환골탈태하기 전 사진을 보면 현재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깨끗이 철거하고 새로이 짓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터이나, 이를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시각視角이 있었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사실 무아치는 최 대표의 아버지인 최홍규 관장 때부터 진행해온 이화동 마을 재생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소이다. 철물디자이너이자 수집가였던 최 관장은 이 성곽마을이 가진 유구한 역사와 가치를 알아보고 2011년부터 골목 내 8채 집을 사들여 보수하고 수리해 마을 박물관과 문화시설을 조성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폐가였을 당시 집의 모습 ©muachi

 

“무아치의 경험은 이 동네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곳은 오는 교통편도 불편하고 골목도 허름하지만, 한국 근대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곳이에요. 세월이 담긴 빈티지 오브제들을 보러 이곳까지 오시는 분들은 분명히 이 동네의 특별함도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최진범 무아치 대표

 

오픈한지 2년 남짓 되었지만 오래됨과 새로움으로 다양한 시대성이 얽힌 무아치는 더 먼 시간과 깊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세월에 따른 마모와 부식을 견뎌내고 현존하는 것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 빈티지처럼, 과거의 장소에서 그 경계를 넓혀가는 무아치와 이화마을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대해 본다.

무아치.
서울 종로구 낙산성곽서1길 7 제 65호
목~일 11:00-18:00 (사전 예약 방문제)
@muachi_seoul


(이 글을 마지막으로 [Place_case] 연재는 마무리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와 애써주신 Place_case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브리크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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