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풍요로움

[Place_case] ⑨ 돌과 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정원, '내추럴 하이Natural High'
©Kyung Roh
글. Place_case (플레이스 케이스)  사진. 노경, Place_case  자료. 푸하하하프렌즈

 

일상에 영감과 풍요를 더하는 공간을 찾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p.lace_case 운영자이자 <브리크 brique> 애독자인 플레이스 케이스 Place_case님을 전문 기고자로 초대했습니다.
실내 건축을 전공하고, 현재 공간 디자인PM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장소들을 큐레이션하여 주변 이들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펼치는 공간 이야기를 따라가며 여러분도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도시에서는 유행에 따라 변하는 공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중 의미 있는 경험과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도 존재한다. 후자는 주로 잘 만들어진 트렌디한 곳을 단순모방한 닮은꼴 공간들인 경우가 많다.

태어나 언어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 모방을 통해 진보해온 우리에게 무언가를 따라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기억의 한 귀퉁이에, 그리고 도시의 한 켠에 오래도록 머무는 공간들은 격格있는 창조적 모방으로 만들어진 곳들이다. 영감의 대상을 본뜨는 것이 아닌, 본질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맞는 고유의 언어로 풀어낸 공간.

서울 녹사평역 근처에는 이러한 모방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 이태원이라는 동네에서 빌린 영감을 절제된 유려함으로 풀어낸 와인바, 내추럴 하이Natural High 이다. 이곳은 ‘무엇을 모방하느냐’보다 ‘어떻게 모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나도’가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곳이다.

 

육교에서 바라본 내추럴 하이의 전경 ©Place_case

 

이곳의 외관이 특별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건축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것이다. 푸하하하 건축사사무소의 한승재 소장은 이 건물이 허름한 동네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놓이길 바랬다. 그래서 리모델링에 고려되는 기본적인 사항들 -주변 환경, 기존 건물의 조건, 자연적 요소-을 그 자체로 모방의 대상으로 변모시켜 내추럴 하이를 이태원에 스며든 회색빛 공간으로 만들었다.

외관의 모상이 된 주변의 요소 두 가지는 녹사평 역사과 건물 앞 6차선로를 가로지는 육교이다. 서로 물리적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역사의 벽체, 육교의 난간, 그리고 내추럴 하이의 파사드는 보이지 않는 거울로 서로를 반사하듯 닮아 있다.

 

녹사평역 역사 내부. 메탈 메쉬 판넬들이 기존 벽면을 덮고 있다. ©서울특별시 문화본부 디자인정책과
내추럴 하이 내부에서 밖을 바라본 뷰 ©Place_case

 

이곳에 오는 길에 녹사평에 내린다면 역사 내부의 오래된 벽을 덮는 안개같은 커튼월을 눈 여겨 볼 것을 권한다. 조금 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부가 메쉬mesh로 덮인 건물이 약간은 데자뷰 같은 장면을 연출할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 얹혀진 판넬이 원 건물이 가진 규칙을 깨뜨리지 않고자 동일한 규격과 비율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너무나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너무나도 눈에 띄지 않는 이 개입은 건물을 리모델링 전보다 오히려 더 ‘원래’ 같은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건물 맞은 편에는 육교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가 거의 맞붙어 있다. 육교의 금속 난간과 내추럴 하이의 외관을 구성하는 금속봉들은 길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서로 이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육교 건너편에서, 위에서, 앞에서 두 구조물을 함께 바라보면 세로선들이 서로 중첩되며 오묘한 일체감을 선사하는데, 이 느낌은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 극대화 된다. 캐노피가 밖으로 뻗어나가며 육교와 선들과 맞물려 내외부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우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과 새 것의 관계, 안과 밖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변의 모습을 흡수한 자연스러운 공간이 되길 원했습니다.” – 푸하하하프렌즈 공동대표 한승재 소장

 

입구를 바라보는 전경 ©Kyung Roh
내부에서 후정을 바라본 뷰. 길의 끝에는 분수가, 조리공간 너머로는 정원의 나무들이 보인다. ©Place_case

 

모방할 대상과 그것의 표현 방식을 도시의 맥락 속에서 찾는 것은 관찰력과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내추럴 하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돌, 금속, 시멘트를 이용해 외관과 내부에 각기 다른 세계를 구현했는데, 같은 재료로 외관에는 도시의 풍경을 담아냈다면, 내부에는 도시에 부재한 ‘풍요로운 정원’의 모습을 표현했다.

꽃과 나무가 있고, 작은 길과 분수 주변으로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는 풍경. 한 소장은 이 와인바를 구상할 당시 어느 날씨 좋은 나라의 광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름의 습한 열기와 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으로 그 요소들을 끌고 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도 언제나 와서 즐길 수 있는, 이곳에 어울리는 풍경을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도심의 무채색 정원은 채도는 낮을지 언정 감도는 그 어느 곳보다 높다. 물성의 표현과 재료의 단위, 비정형의 패턴과 규칙적인 리듬에서 풍성하고 ‘자연스러운’ 정원의 정취가 풍긴다.

 

안과 밖, 바닥과 벽이 만나는 면들 ©Kyung Roh
입구 쪽 다이닝 공간과 키친이 보이는 뷰 ©Place_case

 

수십 개의 금속봉들로 이루어진 천장은 외관의 규칙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내부로 들어오며 회색빛 하늘이 된다. 그 아래로는 대리석과 화강석 조각들이 심겨진 비옥한 콘크리트 땅이 펼쳐진다. 페인트 칠한 금속을 둥글게 사포질을 한 벽체는 천장의 질서를 바닥으로 이어주는데, 세 면이 만나는 모서리들에서 일어나는 물성의 충돌이 지극히 조화롭다. 무미건조한 도시의 회색은 이 공간에서 만큼은 가장 다채로운 색이다.

 

“옛날 페르시아인들은 자연의 모습을 모티브로 카펫을 만들고 그 위에서 생활했어요. 그들이 실과 염료를 사용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기념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돌과 철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자연의 풍경을 기념하고자 했습니다.” – 푸하하하프렌즈 공동대표 한승재 소장

 

©FHHH Friends
빛이 드는 후정의 모습 ©Kyung Roh

 

이태원동의 분위기를 그대로 입은 외관 너머 만들어진 정원에서는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들이 한 번도 본적 없는 풍경 속에서 펼쳐진다. 입구를 서면 후정으로 이어지는 길과 작은 분수가 보이고, 길 좌우로 놓인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그들 앞에 놓인 음식과 와인은 회색빛 공간에서 그 색과 향이 더욱 선명해진다. 좋은 음식과 좋은 공간을 통해 삶의 풍성함을 향유하려는 이들에게 이곳은 진정한 도시의 풍요를 전하는 곳이 아닐까.

 

내추럴 하이.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 248 1층
월-금 12:00-22:00 (토,일은 11:00부터)
Instagram @naturalhigh_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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