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스페이스 도슨트 방승환
‘Archur’ 라는 필명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도시와 공간을 안내하는 방승환 작가가 <브리크brique> 독자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시지만 그 안에 낯선 장소,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업들을 소개해 새로운 영감을 드리려 합니다.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소개와, 현재에 이르게 된 이야기, 그리고 환경적 맥락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Archur와 함께 이색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보시죠.
로마를 가기 전 내가 가지고 있었던 도시의 인상은 트레비 분수의 낭만이나 카톨릭 본산의 신성함, 고대 로마 유적의 처연함이 아니었다. 도시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둘러볼 곳을 선택할수록 ‘로마’라는 역사책은 두툼해졌고, 어느새 책의 첫 장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부담스러워졌다. 여기에 소매치기가 많다, 집시가 넘쳐난다는 등의 후기가 더해지면서 초행자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고 지도에 표시해 놓은 답사지를 마치 도장 깨기하듯 돌아다녔던 첫 번째 방문에서 로마Roma의 로망roman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찾은 로마는 읽기를 중단한 지점부터 읽는 역사책 같았다. 여전히 보고 싶은 곳은 많았고 상상해 볼 상황도 넘쳐났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각 장소와 관련된 사건의 흐름을 정리하기가 벅찼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길고 비슷한 이름을 구분하기가 고단했다. 그러자 로마의 옛 건축물과 광장들이 모두 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상상을 위한 감정이입도 어려웠고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뭔가 전환이 필요했다.
나의 독서 습관 중 하나는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을 때 가볍게 볼 수 있는 소설이나 잡지를 함께 읽는 것이다. 로마라는 긴 호흡이 필요한 도시를 돌아다닐 때에도 잠깐 멈출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떨까?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속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대건축이라면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보니 의외로 로마에도 현대건축물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나의 선택은 ‘로마 국립 21세기 미술관’, 일명 ‘막시(MAXXI)’였다.
놀랍게도 막시는 예술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고 건축가가 가장 많은 나라, 이탈리아에서 현대예술과 건축을 위해 지어진 첫 번째 국립미술관이다. 막시의 건립을 위한 국제 현상설계 공모는 1998년에 열렸다. 당시 전 세계에서 273개 작품이 응모됐는데, 스티븐 홀, 토요 이토, 렘 쿨하스, 장 누벨 등이 제출한 15개의 작품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최종적으로는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안이 선정됐다. 그리고나서 막시는 소장품 수집을 위해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10년에 정식 개관했는데, 이 과정도 참 이탈리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시는 성지순례자들의 여정이 시작됐던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에서 트램을 타고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트램에서 내리면 로마의 역사지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1921년 행정구역으로 지정된 플라미니오Flaminio 지구에 처음 들어선 건 공장이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기간에 군사시설(Caserma Montello)로 바뀌었다. 막시는 그중 일부를 헐고 지어졌다.
많은 것들이 정해진 방향 없이 들어갔다 나가는 움직임과 이를 자극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했던 자하 하디드에게 ‘흐름’과 ‘유동성’은 중요한 개념이다. 막시에서 하디드는 흐름과 유동성을 통해 역동적이고 상호작용하는 열린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설계자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장치는 검은색 통로다. 하디드는 검은색 통로가 건물 안에 리본을 풀어놓은 것처럼 한없이 가볍게 보일 수 있도록 구조체를 매달았다. 그래서 검은색 통로를 지지하는 기둥을 찾아볼 수 없다. 검은색도 천창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는 빛 가운데에서 통로가 도드라져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된 색이다.
검은색 통로는 마치 혈관이나 힘줄처럼 미술관 곳곳을 연결한다. 막시가 개장하기 전 영국 가디언紙에서 건축과 디자인 기사를 담당했던 조나단 글랜시Jonathan Glancey는 자하 하디드가 만든 건축물 중 막시가 가장 훌륭하며, 특히 검은색 통로(글랜시는 ‘계단’이라고 썼다)는 ‘미래로 가는 계단(stairway into the future)’이라고 평가했다.
하나의 큰 건물로 지어지는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막시는 몇 개의 흐름이 묶여 있는 ‘다발’이다. 흐름은 어떤 부분에서 뭉쳐져 로비같이 넓은 공간을 이루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갈라져 외부공간에 면한 틈을 만들기도 하고 방향을 꺾어 전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흐름은 서로 분리된 다섯 건물의 벽이 된다. 실제 막시는 분리된 다섯 개의 건물이 서로 기대어 있는 구조인데, 이를 통해 로마시의 엄격한 내진 조건을 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막시가 소장하고 있는 현대예술품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불현 듯 검은색 통로가 로마 시내의 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의 두터운 역사가 남긴 문화유적을 구불구불한 길이 연결하고 있듯, 동시대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을 검은색 통로가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막시의 검은색 통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해외에서 온 관광객이 아닌 로마의 현재를 사는 시민들이다. 오브제를 담는 단순한 컨테이너(object-container)가 아니라 예술을 위한 캠퍼스(campus for art)를 추구한 막시에서 로마시민들은 예술작품을 관람할 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작업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와 이웃과 만나기도 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초저녁이면 집 밖으로 나와 일부러 도시와 공원을 한가롭게 걸어 다닌다. ‘Passeggiata’라고 불리는 산책 시간을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막시는 미술관이라는 고정된 건물이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흐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광장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국민성으로 개인주의를 꼽지만 실제 유럽 어떤 민족보다 함께 어울려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막시는 국민성을 고려한 현대적 장소다.
역사를 시간의 선형이 아닌 다양한 사건의 조직으로 본다면 예술가가 경험한 사건이 총체적으로 녹아든 예술작품은 현재의 단면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동시대 예술과 건축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로마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막시는 두터운 역사책에 추가될 새로운 챕터이자 로마의 지금을 보여주는 예술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