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시아의 시간

[Story] ‘소리정원’ 공간 이야기
©BRIQUE Magazine
에디터. 박지일  사진. 최용준, 윤현기  자료. 더시너지스트

 

① 케렌시아의 시간 — ‘소리정원’ 공간 이야기
② [Interview] 공간을 통해 돌아본 삶의 궤적 — 더 시너지스트

 


 

케렌시아를 찾아서
주거 문화의 트렌드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가운데,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숨을 고르며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케렌시아Querencia’를 찾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을 의미하는 케렌시아는 스페인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격한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숨을 고르기에 적합한 장소를 본능적으로 찾아간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편 ‘좋아하다’, ‘원하다’라는 의미의 케레querer에서 파생됐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유래는 달라도 케렌시아는 결국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재충전의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소가 투우장에서 위안을 얻는 유일한 장소가 케렌시아라면 현대인에게는 나만의 공간이 곧 케렌시아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에 집중하는 그 순간은 개인을 위한 힐링의 시간이자 바쁜 일상 속 쉼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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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으로 준비하는 노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치과를 운영하며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강윤모, 박경하 부부는 은퇴를 앞둔 시점에 치열하게 일하기보다 삶의 여유를 갖고 새로운 노후를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노후 준비라고 하면 보통 어느 정도의 금액을 모아두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돈만큼 중요한 것이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다. 부부는 노후 준비의 시작으로 과거 운영하던 병원 1층을 취미 공간으로 꾸몄다. 남편은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향실을, 아내는 명상과 함께 요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Yongjoon Choi

 

다소 독특한 외관
예산의 한 골목 끝자락,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 범상치 않은 외형으로 자리 잡은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은 과거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병원이다. 현재는 바로 옆 건물에 병원을 새로 지어 운영하고 있기에 기존 공간은 새로운 쓰임이 필요했다. 건축주에 따르면 해당 건물은 예산 최초로 건축가가 설계한 것으로, 곡면 출입구나 기하학적인 입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지어졌을 당시의 건축 수준을 고려하면 다소 시대를 앞서간 건축물로 보인다. 기능적으로는 읍내 병원과 3세대가 거주하는 주택의 기능을 이원화하면서 각각의 기능과 정서에 맞도록 디자인했다. 특히 코너에 위치한 건물이기에 이웃에 대한 배려와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고루 입면에 반영됐다.

 

©Yongjo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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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은 공간 구획
부부가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취미를 즐길 수 있도록 공간은 두 영역으로 구획했다. 곡선의 현관을 지나면 작은 복도가 나오고 복도의 끝에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바가 위치한다. 넓지 않은 면적이라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음향 공간과 명상 공간을 마주한다. 입구부터 복도까지 대부분의 공간은 어둡다. 대신 슬릿 조명을 적절히 배치하고 반사되는 재질로 천장을 마감해,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면서도 이동할 때마다 빛에 의한 극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복도 천장의 상량문은 현장 철거 당시 발견한 것으로, 철근콘크리트 건물임에도 전통 한옥의 상량식을 따른 흔적이다. 건축주의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역사가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디자인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공간이 가진 역사를 시간 속에 묻지 않고 디자인 요소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 설계자의 의도다.

 

©Yongjo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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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변주하는 빛
두 사람의 취미만큼이나 다른 성향을 공간에 반영하기 위해 빛의 정도를 신중히 고려했다. 각각의 공간에서 빛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실내로 유입되는 자연광과 그로 인해 달라지는 그림자를 만드는 시각적, 경험적 요소가 되어 공간을 다양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게 한다. 명상 공간에서는 명상의 단계에 따라 실내에 유입되는 빛을 조절하기 위한 목재 미닫이 덧문을 두었는데, 개폐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의 패턴이 재료의 질감을 변화시키고 공간에 생기를 더한다. 음향 공간에서도 즐기는 음악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할 수 있도록 간접 조명을 상하부로 이원화했고, 자연광을 즐기고자 할 때는 벽체 마감과 연속되는 창문 세 개를 여닫아 빛을 선택적으로 들이도록 했다. 이 창문들은 닫혀 있을 때에는 벽체의 일부로 인식되고, 열릴 때는 벽체의 일부가 갈라지는 듯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Yongjo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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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요소로서의 소리
소리는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디자인 요소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각 영역에서 소리에 의한 방해가 없도록 구성과 재료를 차별화했다. 명상 공간은 필요에 따라 영역화될 수 있는 가변적 공간이다. 패브릭 버티컬을 이용해 부채꼴 형태로 내부를 감싸는 ‘공간 안의 공간’을 디자인함으로써 더욱 내밀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공기는 순환시키되 정신은 온전히 그 안에서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의도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감각의 확장을 꾀했다. 촉각적으로는 빛에 의한 따뜻함을, 시각적으로는 벽과 천장의 한지 마감에서 오는 부드러움을, 청각적으로는 싱잉볼의 울림에 오롯이 빠져들도록 계획했다. 음향 공간은 음의 확산과 분산, 흡음을 고려해 자작나무 합판을 사용했다. 조직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해 방음 및 공명성이 탁월한 자작나무 합판 396개를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친 끝에 각기 다른 깊이로 이어붙여 스피커 후면과 측면 벽에 고정했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온전한 취미공간은 그렇게 탄생했다. 

 

©Yongjo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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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30년 전 남편이 태어나고 성장한 적산가옥을 허물고 병원을 건축했다. 병원 이전 후 누군가의 사무실로 잠시 쓰이던 건물은 이제 부부가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변모했다. 각자의 성격을 닮은 공간에서 부부는 홀로됨을 즐기거나 취향의 존중이 가능한 손님들을 선택적으로 초대해 취미를 공유하며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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