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곳에 살아가는 이유

[Story] ‘월락동 여러집’ 공간 이야기 #1
ⓒBRIQUE Magazine
에디터. 윤정훈  사진. 윤현기  자료. 스튜디오인로코건축사사무소

 

당연하게 여기던 삶으로부터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의 삶에는 편리함과 고단함이 공존한다. ‘편한 만큼의 버거움’을 감내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낄 때도,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 집값을 마주할 때도 우리는 생각한다. ‘별 수 있나.’ 많은 일자리와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에서는 많은 것들이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간과되고 있는 건 없는지 미처 따져보기도 전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서울에서 일하던 젊은 의사 김진영은 우연한 계기로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수십 년간 같은 자리에서 병원을 운영해 온 그는 서울에서의 삶을 그저 ‘아등바등 버티는 날들의 연속’으로 회상한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함께 일하는 이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집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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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멸 시대, 남원이라는 선택
남원은 2021년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인구감소지역 도시다. 서울 면적 보다도 넓지만 약 950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에 비해 남원의 인구는 7만 명대에 그친다. 지역 불균형은 풀어야 할 문제이지만 작은 도시에서 큰 도시로 향하는 데에는 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많은 기회와 더 나은 환경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김진영, 유지선 부부는 운영하는 병원을 확장해 남원보다 더 큰 도시에서 인생 2막을 열 수 있었음에도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했다. 오랜 시간 머문 동네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자 병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땅의 터를 닦았다. 아파트를 떠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 없을 집을 짓고, 직원들이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임대 주택을 마련했다. 단순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는 아니었다. 이 집은 처음부터 직원과 병원장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이어야 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애당초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이다. 어디서 어떤 삶을 꾸릴지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다. ‘월락동 여러집’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어긋난 공간, 느슨한 연결

 

병원장 가족과 직원 가족이 모여 사는 집
월락동 여러집은 여러 해 동안 남원에서 병원을 운영해 온 건축주가 오랜 준비 끝에 마련한 공동의 보금자리다. 직원들의 주거 부담을 덜고자 짓게 된 이 집은 ‘사택’ 하면 막연히 떠올리는 건물의 모습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아홉 세대가 거주하지만 일반적인 다가구주택과도 사뭇 다르다.
남원 도심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중산간 마을. 북쪽으로는 도로와 아파트를 면하고, 남쪽으로는 지리산과 논밭을 향해 열린 대지 한가운데 같은듯 다른 형태의 건물 다섯 동이 나란히 서 있다. 규모로나 외관으로나 주변에 드문드문 솟은 다른 건물과 결이 달라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고 호기심을 자아낸다. 다섯 지붕 아래에는 인근 병원에서 한솥밥을 먹는 아홉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1층 평면도 ⓒStudio in Loco

 

도심 속 흔한 다가구·다세대주택의 구성은 이런 식이다. 1층에 상가가 자리하고, 그 위에 임대 주택, 최상층에는 건축주의 집이 놓인다. 조망권과 사생활을 확보하기 어려운 도심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월락동 여러집은 이러한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직원주택은 네 동으로 나뉘어 외부 계단실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고, 건축주 집은 다섯 건물 중 가장 뒤편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자리한다. 공간을 통해 건축주와 임대 세대 간 보이지 않는 위계를 완화한 것이다.

 

단면도 ⓒStudio in Loco

 

빛과 바람, 풍경을 향해 열린
평등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는 건축주의 요구는 단순명료했다. 모든 세대가 충분한 빛과 바람, 풍경을 동등하게 누리는 것. 이에 따라 3층짜리 건물 네 동과 2층짜리 건물 한 동을 남쪽을 향해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다섯 동을 일렬로 세우지 않고 조금씩 어긋나게 놓아 동서남북 사방으로 더 많은 창을 낼 수 있게 했다. 주연으로서 충분한 빛을 들일 큰 창뿐만 아니라 조연으로 기능할 작은 개구부를 여러 개 내 연하고 순한 빛이 집 안을 은은히 채우게 했다. 도로, 아파트 단지와 면한 북쪽으로는 큰 창을 내지 않고 사생활 보호를 위해 매스감 있는 입면을 계획했다. 다만 지나치게 폐쇄적인 느낌을 완화하고자 영롱 쌓기나 일부 벽돌을 안쪽으로 밀어 넣는 식으로 조적에 변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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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와 삶터의 분리
월락동 여러집의 아홉 세대는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각 세대는 한 직장에서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이기에 자칫하다가는 집이 직장의 연장선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건축가는 세대 간 원활한 소통과 연결을 도모하기보다, 집에서만큼은 ‘최대한 흩어지고 구분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직원주택을 네 동으로 분절하고 같은 층에 자리한 두 집을 스킵플로어 구조로 엇갈리게 놓았다. 덕분에 각 세대로 향하는 동선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불필요한 마주침이 줄어들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맛도 있어야 하는 법, 필요에 따라 삼삼오오 모일 수 있도록 직원주택 남쪽에 작은 야외 마당을 마련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비큐 파티 등을 즐기며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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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된 모호한 공간, 직원주택
여러집의 세대는 의료 시설 종사자라는 공통점 외에는 가족 구성도, 연령대도, 삶의 패턴도 모두 다르다. 따라서 집은 다양한 거주자를 넉넉히 수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건축주는 자녀가 있는 직원과 혼자 사는 직원 각각을 위하는 공간을 의뢰했다. 이에 직원주택을 두 유형으로 나누되, 일반적인 아파트나 원룸에서 할 수 없는 공간 경험을 주고자 했다. 직원주택은 의도된 모호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주거 공간이라면 항상 한쪽 구석에 놓이던 부엌과 화장실이 집의 가운데 자리한다. 물 쓰는 공간이 중심부에 놓이는 이러한 ‘중심부형’ 구성에서는 거실, 안방, 작은방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따로 없다. 다만 부엌과 주변으로 크고 작은 공간이 여러 개 있을 뿐이다. 덕분에 직원주택 중 작은 유형은 투룸 같은 원룸이고, 방 세 개가 있는 큰 유형에는 8자로 된 회유 동선이 있어 집 안을 탐험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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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삶을 더욱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사는 세대, 홀로 거주하는 세대, 반려견과 함께 집 안을 이리저리 누비고픈 사람, 나만의 취미 공간이 필요한 사람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이곳에선 존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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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인 동시에 나의 집인, 건축주 주택
흥미로운 건 이 모든 것을 의뢰한 건축주의 집이다. 건축주의 주택은 직원주택과 상반된 ‘주변부형’이다. 부부와 세 자녀가 사는 건축주의 집은 중앙을 비우고 벽을 따라 가장자리에 부엌, 화장실, 침실, 다용도 공간을 배치했다. 1층은 거실과 부엌 위주로 구성하되, 남쪽 벽을 파내어 소파 공간과 미니 서재 등 거실의 일부이지만 완전히 속하진 않은 부속 공간을 마련했다. 온 가족이 거실에 함께 있으면서도 그중 누군가는 독립된 영역에서 자기만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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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와 자녀를 위한 모든 방은 2층에 자리한다.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모든 침실은 정남향으로 두었으며, 아토피를 앓는 자녀가 이불을 잘 털 수 있도록 침실 가까이 테라스를 두었다. 노을을 좋아하는 첫째 딸을 위해서는 서쪽에 작은 창을 더했다. 1층과 마찬가지로 2층 가장자리에도 집을 더욱 흥미롭고 사적인 장소로 만드는 공간을 마련했다. 남쪽 지붕과 맞닿은 아늑한 다락, 책꽂이를 품은 서쪽 벽면의 독서 공간이 그것으로, 층고가 낮아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 가운데 오롯한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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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락동 여러집’  전체 이야기 담은 <브리크brique> vol.9  더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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