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반개한 자의 시선

건축가 전성은의 드로잉 전시 리뷰
ⓒEun Chun
글. 전종현  자료. 전성은

 

‘심연의 빛’ ⓒEun Chun

 

처음에는 태양인 줄 알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동그라미가. 자세히 보니 붉은 달인가 싶다.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 때문에. 근데 이번 전시는 목탄 드로잉이 주인공 아니던가. 백지에 색을 칠한 게 아니라 붉은 색지에 목탄으로 음영을 준 것이다. 팔을 천천히 움직이며 끊임없이 지면에 검은 곡선을 채워나가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의 눈은 감겼을까, 떠있을까.

만일 떠있다면 지금 보는 것은 의식의 묘사다. 감겼다면 무의식의 표현이다. 내 예상으로는 ‘반개(半開)’했을 것 같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이 대면하는 심연의 감정을 목도하며 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명상의 여정 중에.

 
‘무한의 소리’ ⓒEun Chun

 

대형 드로잉 작업인 ‘심연의 빛’은 목탄으로 배경을 메워 빈 공간을 전경으로 만든 경우다. 그에 비해 ‘무한의 소리’는 소리의 파동처럼 다가오는 형태를 전경으로 묘사했다. 근데 좀 묘하다. 무엇인가를 그린 건지, 아니면 도리어 그림자를 채워넣어 어떤 존재를 드러낸 건지 헷갈린다. 소리의 파동으로 생각했던 이미지는 붉은 빛으로 넘실거리는 거대한 바다 물결의 그림자로 다가온다. 끝없이 펼쳐진 세계가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그 이면을 잠시 노출하는 것 말이다. 색지와 검정 목탄이 만나 생성하는 전경과 배경의 세계는 결국 개인이 보고 싶은 형태로 해석한다는 게슈탈트 이론을 상기시킨다.

내가 본 것은 소리인가, 물결인가. 붉게 타오르는 잔잔한 태양인가, 붉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면을 노출한 것인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작가가 심연을 표출하는 세계는 붉고, 이는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메타포라는 점. 흰 바탕에 드로잉을 하지 않은 작가의 선택에서 우리의 세계는 이미 결정났던 거다. 우리를 늘 감싸고 있는 욕망은 태양처럼 빛날 수도, 세상의 마지막 빛으로 남을 수도 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작가가 말한 대로 욕망의 극한점 이후에 알게되는 그것의 본질이 왜 무(無)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잉태하는지.

 

‘두 고래’ ⓒEun Chun
‘설원에 깃든 노을 1’ ⓒEun Chun
‘습지꽃’ ⓒEun Chun

 

복잡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붉은 그림 두 점과는 사뭇 다르게 이후 펼쳐지는 10점의 ‘붉은 노을’ 연작은 명징하다. 화사하고 쾌활한 주황빛 노을을 배경으로 구상적 대상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주황빛 작은 화면에는 거대한 고래 두 마리가 출현하고, 방파제에 사람 한 명이 서있다. 강가에 새가 날아다니고, 주황빛을 빨아들인 설원이 펼쳐진다. 나무로 채워진 숲, 슾지꽃 무리처럼 자연이 재현되기도 한다. “붉은 노을빛은 그 어떤 곳도 아름닿게 와닿게 하는 마술이다. 노을이 지는 풍경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인다.” ‘진부한 예가 주는 소소한 감동’이 제대로 기능하는 주홍빛 노을 세계는 작가가 내면의 평화를 느끼는 공간이기도 할 테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Eun Chun
‘부유하는 나의 집 2’ ⓒEun Chun
관계의 건물 이야기’ ⓒEun Chun

작가는 이제 흰 바탕에 옮긴 검은 흔적을 발판 삼아 우리를 현실의 언저리로 데려간다. 도시에서 보는 한강 풍경, 늘 다니던 도로에 갑자기 ‘출몰한’ 산의 모습, 옛 골목에 들어선 건물, 사무실 앞 양재천 풍경은 목탄으로 잡은 검은 덩어리 위에 짙은 잉크가 명징하게 움직이며 현실감을 더욱 높인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는 작가의 예민한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다. 사랑과 마음, 망각에의 욕구, 상상 속의 그네, 그리고 그를 평생 사로잡은 건물과 집의 이야기까지.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쉼의 공간은 ‘아무도 없는 섬’으로 존재를 알린다. 그 섬에는 잘생긴 나무 몇 그루가 서있고 나만을 위해 울어줄 새들이 날아다니며, 멀리서 봐도 그리 크진 않지만 우거진 숲과 해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한 명의 지친 이에겐 충분히 적당한 상상의 안식처다.

‘섬2’ ⓒEun Chun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고 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전시회의 마지막 소재는 흥미롭게도 건물이다. 건축적 어휘를 기반으로 CAD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한 디지털 드로잉은 기하학적 선과 면으로 딱 떨어지는 0과 1로 구성됐다. 하지만 일정한 시선을 지정해 한 장의 종이에 출력한 건물 이미지는 같은 크기의 종이 뭉치를 뒤에 놓고 종이끈으로 묶어 부피감을 의도했다. 종이로 물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디지털이면서 아날로그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는 작업이다.

 

콘셉트 모형 ⓒJaeyoun Kim

아크릴과 금속, 합판으로 만든 건물 콘셉트 모형으로 여정이 끝나는 이번 전시는 가장 개인적인 내면부터 가장 명징한 건물까지 다양하게 다루지만 모든 섹션을 꿰뚫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대상이 모두 작가의 관점과 상상에 기반한 터라 실제 관람객은 예측하고 공감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정확한 핵심에 다다를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말이다. ‘내면의 시선’이란 평범한 단어의 조합보다 더 적절한 전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다. 

 

전시회 전경 ⓒJaeyoun Kim
전시회 전경 ⓒJaeyoun Kim

 


전성은 드로잉전 <내면의 시선>


기간.
 
2019년 3월 8일 ~ 4월 7일 10시~19시 (일요일, 월요일은 휴무)

장소.
이건하우스 갤러리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강연.
2019년 3월 22일 19시 이건하우스 갤러리

협찬.
이건하우스


小雪 전성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건축공학 석사를 받았다. 현재 (주)전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서울시 공공건축가, 세종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 Sanvitale, Wing’s valley, Masion K 등 다수의 주택 설계와 대구가톨릭대학교 김종복 미술관 등이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수장보존센터 설계경기 우수상(2013년)을 수상했다.
2006년 <Transfiguration of the space 1, 2>를 시작으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대건축특별전 <장소의 재탄생>, 광복 70주년 기념 특별전 한국주택 70년사 <9평의 희망에서 우리의 도시로>, <도시의 오마주> 전시 큐레이팅 및 전시 디자인을 총괄했다. 건축 칼럼니스트로서 <조선비즈>에 ‘전성은의 행복한 건축’을 연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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