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에 새 삶을

[no more room] ④ 근대 양조장의 재탄생, ‘산양 양조장’
ⓒDoyeon Gwon
에디터. 김지아  사진. 권도연  자료. 스튜디오 히치

 

환경을 둘러싼 크고 작은 목소리와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점검한 기획 연재 ‘no more room’을 시작합니다.
버려진 것들을 재해석해 활용한 공간과 서비스, 환경에 관한 고유의 철학을 가진 기업과 브랜드, 업사이클링을 실현하는 크리에이터, 도시 생태를 고민하는 공공과 개인의 활동을 고루 담았습니다.
재생과 순환, 공존이라는 무거운 키워드보다는 ‘지구와 도시를 지키는 일’이 곧 나를 위한 것,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① 도로 위 트럭 방수포가 어깨 위 가방으로, 프라이탁FREITAG
② 홈퍼니싱 기업, 이케아IKEA가 지키려는 것
③ 복합문화공간 부천아트벙커 B39의 리모델링 이야기

④ 근대 양조장의 재탄생, ‘산양 양조장’
⑤ 플라스틱 프리에 도전하는 ‘알맹상점’
⑥ 새활용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공의 움직임
⑦ 동네공원의 파수꾼 ‘서울환경운동연합’
⑧ 자연과 도시의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끝)

 


 

경북 문경에 위치한 산양 양조장은 1944년 지어진 적산가옥 형태의 건축물로, 근대 문경 지역의 시대상을 간직하고 있다. 1960년대 문경은 석탄 산업이 번창하면서 지역 전반에 활기가 돌아 같은 시기 술을 빚는 양조장 역시 나란히 번성할 정도였다. 산업의 수혜를 입은 산양 양조장은 1980년대 후반까지 호황을 이어가다 석탄 산업이 쇠퇴기를 맞이하며 서서히 그 힘을 다해 1998년 결국 폐업을 선언하고 가동을 멈춘다.

양조장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온 산양 양조장은 지난해 문경시의 추진으로 복원과 리노베이션을 거쳐 동시대의 건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건물이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을 섬세하게 진단해 지속 가능한 건축을 구현해 낸 스튜디오 히치의 박희찬 소장에게 산양 양조장에 대해 물었다.

 

산양 양조장 동측 입면, 2020(new) ⓒDoyeon Gwon

 

70년 역사의 근대 양조장

산양 양조장은 문경시에서 의뢰한 스튜디오 히치의 첫 작업입니다. 작년에 두 차례에 걸쳐 큰 상을 수상하셨죠. 양조장과 처음 연결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영국에서 실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경험 삼아 여기저기 둘러보러 다녔어요. 주변 지인분들이 지방에 자문을 하러 간다고 하면 따라다니기도 하고, 용역을 한다고 하면 도와드리기도 했죠. 그렇게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는 선배 소장님이 경북 문경으로 자문을 간다고 하셔서 따라갔어요. 그때 허름한 폐허로 남아 있는 양조장 건물을 보게 됐죠.

 

산양 양조장 남측 입면, 2018(before) ⓒStudio Heech

 

처음 만난 양조장 건물은 어땠나요?

말로만 듣던 적산가옥 형태의 근대 건축물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어요. 전율이 있었죠. 초기 모더니즘 건축물을 보면 특유의 혁신성과 감동이 느껴지잖아요. 산양 양조장은 기둥이 두껍고 지붕이 큰 한옥 목구조와 달리 매우 가늘고 정교한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적산가옥 형태의 건축물이었어요.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기 때문에 갖는 독특한 건축적 특성들도 있었고요. 한국 전통 주거 양식과 시간의 흔적이 뒤섞인 건물의 모습에서 20세기 초의 모더니티modernity를 읽을 수 있었어요.

 

산양 양조장 동측 입면, 2018(before) ⓒStudio Heech
산양 양조장 북측 입면, 2018(before) ⓒStudio Heech

 

설계에 앞서 아카이브 작업을 먼저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카이브 작업은 리노베이션 작업에 앞서 건물의 상태를 기록하고, 동시에 기존 건물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진행한 작업이었어요. 양조장이 1944년에 지어진 건물인 만큼 증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원형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죠.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 알게 된 건물의 사연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당시 지역에서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지역의 유지였어요. 1대 소유주는 영주 군수였고, 이후에 4번 정도 주인이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돼요. 1998년 폐업한 이후로는 마지막 주인의 주거 공간으로 남아 있었는데요. 건물이 많이 훼손된 상태여서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이후에는 문경 시청이 양조장 건물을 매입해 문화재 심사를 받았는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건축적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지정에서 제외됐어요.

 

보존, 복원, 개입의 과정

시에서는 건물이 지닌 건축적 가치를 지키는 원형 복원의 방식을 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장님의 생각도 같았나요?

문화재 등록에 실패한 경험 때문인지 시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원형 복원에 대한 계획만 갖고 있었어요. 외관을 똑같이 복원해서 원래대로 만들면 문화재 등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죠. 하지만 저는 문화재 등록을 위한 원형 복원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건물이 갖고 있던 성격이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죠. 문경시에도 그렇게 제안을 드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누가 그 얘기를 들어줄까 싶은데, (웃음) 문경시 공무원들이 제 계획을 믿고 맡겨 주셨어요.

 

산양 양조장 동측 입면, 2020(new) ⓒDoyeon Gwon

 

산양 양조장이 지닌 건축적 가치는 어떤 것이었나요?

1944년에 지어진 건물이니 이 땅에서 7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어요. 적산가옥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한국의 근대를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잖아요. 양조장은 아마도 그 시기에 문경 지역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과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을 거예요. 한국 사람들에 의해 지어져 70여 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사용한 거죠. 문경의 3대 양조장 중 하나였으니 술도 아주 많이 생산했고, 특히 산업화 시대에 지역 노동자들에게 쉼터가 되기도 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건물이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산양 양조장 북측 입면과 외부 공간, 2020(new) ⓒDoyeon Gwon

 

건축적으로 보면, 술을 숙성시키는 양조장이었기 때문에 갖는 특징들이 있어요. 전통적인 구축 방식으로 볼 때 가구식(filigree construction)과 벽식·고형식(solid construction)의 방식이 섞인 독특한 평면 구성을 갖고 있었죠. 가늘고 정교한 목재 프레임과 약 1m 두께의 왕겨가 채워진 두꺼운 벽식 구조가 공존하고 있었어요. 온도 조절을 위해 왕겨를 채워 넣었죠.

지붕의 구조나 목재 트러스, 한국 전통의 내부 창호 등도 건축적 가치를 지닌 요소들이었어요.

 

다목적 홀, 2020(new) ⓒDoyeon Gwon

 

리노베이션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근대 건축을 복원해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오늘날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영국에서 마구간과 그릇 공장 리노베이션 작업을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양 양조장의 사례와 공통점이 있었나요?

규모와 역사 면에서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었죠. 기계적인 원형 복원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적 가치가 있는 부분을 극대화하면서도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냈다는 점, 그리고 건축가의 창의적 개입을 통해 버려진 자산을 동시대의 장소로 새롭게 소환했다는 점이 유사했어요. 다만 영국은 보존이나 복원 프로젝트가 건축 시장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어, 복원 전문 컨설턴트나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기가 수월했어요.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근대 건물 리노베이션의 경우, 보존이 쉽지 않아 완전히 철거 후 복원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철거하지 않고 기존의 구조를 취하기까지 어떤 노력이 필요했나요?

철거하고 건물을 새로 지어 복원하면 구조, 기계, 전기, 내외부 마감 등 모든 요소를 예측 가능한 상태로 설계하고 공사 예산을 책정할 수 있어요. 반면에 철거하지 않고 남기는 상태로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면 철거 단계에서부터 예측이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에 대응해야 하죠. 예컨대, 산양 양조장에서 지붕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천장을 열어 보니 과거 화재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된 목재 트러스truss가 발견되었어요. 결국 설계 단계에서 더욱 정밀한 전략을 수립해야 했고, 공사가 시작된 후에는 수립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있었죠.

 

평면도(before) ⓒStudio Heech
평면도(after) ⓒStudio Heech

 

리노베이션 과정을 통해 건물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원형 복원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엇을 남기고 교체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했어요. 건물의 남측과 동측 입면은 기존의 목조 양식으로 복원했고, 훼손 상태가 심해 붕괴 위험이 있던 북측 입면은 해체한 후 새롭게 세웠어요. 오랜 세월 증축과 개축을 반복해 원형 파악이 불가능한 서측면의 여러 부속 공간들은 철거해 주방과 기능실로 대체했고요.

 

기존 사무실 내부, 2018(before) ⓒStudio Heech
사무실, 2020(new) ⓒDoyeon Gwon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기존의 목재 기둥을 살린 점이에요. 목구조를 남기기 위해 기둥에서 썩은 하단부를 잘라내고 T자형 철물을 이용해 새로운 재료와 연결한 후 고정했어요. 사실 기둥을 허물거나 교체하면 공사도 쉽고 비용도 적게 들어요.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기존 재료가 담고 있던 시간의 흔적이 탈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대균 착착건축사무소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부자연스럽게 변해버리는 거죠.

 

기존 목기둥의 썩은 하부를 절단하고 T형 철물로 신재를 연결한 기둥 접합부, 2020 (new) ⓒDoyeon Gwon

 

전반적인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건축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바뀐 부분이 있다면, 기존의 어둡고 낮은 층고의 사입실(술을 숙성시키는 공간)을 오픈된 다목적 공간으로 바꾼 거예요. 2m에서 약 3.5m로 높아진 다목적홀 공간은 다양한 이벤트와 전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기존 사입실 내부, 2018(before) ⓒStudio Heech
다목적 홀, 2020(new) ⓒDoyeon Gwon

 

실내 천장에 노출된 트러스 구조도 눈에 띄어요.

북측의 기존 목재 트러스는 해체한 후 인천의 공장으로 보내 보수 과정을 거치고 다시 현장으로 옮겨와 설치했어요. 일반적인 목조 건축 복원이나 보수 작업들은 목수에 의해 현장에서 이루어져요. 그렇게 하지 않고 공장에서 정교하게 보수하고 연결 부위 접합 디테일까지 마무리하도록 했어요. 일반 구조재보다 강도가 높고 변형이 적은 구조용 집성목 ‘글루램Glulam’을 사용했죠. 당시 양조장을 목구조로 지었던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인 만큼, 리노베이션에도 우리 시대에 맞는 기술과 기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부 글루램(구조용 집성목) 콜로네이드, 2020 (new) ⓒDoyeon Gwon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옛 자재를 재사용하시기도 했죠.

북측 외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나온 흙이나 돌을 현장의 미장공이 물로 씻어서 미장할 때 다시 사용했어요. 오동나무 판재와 기존의 목창호도 부분적으로 재사용했고요. 건물을 이루고 있던 다양한 재료들을 군데군데 다시 사용해 의도적으로 그 흔적을 남겼어요.

 

산양 양조장 북측 입면, 2020 (new) ⓒStudio Heech
기존 목조 심벽을 유지한 체 증축된 기능실, 2020 (new) ⓒStudio Heech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산양 양조장은 과거의 시간을 존중하며 현재와 미래를 고려한 지속 가능한 건축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 프로젝트예요. 지금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 시설로 자리매김했어요. 지역에서 여러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가치가 담긴 건물을 오늘날 새롭게 이어갈 수 있도록 재탄생시켰죠. 청년 문화 시설을 새로 만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옛 건물을 파괴하고 새로 짓는 일은 환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사회에 큰 피해를 입혀요. 리노베이션 작업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 환경에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점에 있어서 산양 양조장은 자랑스러운 건물이에요.

 

다목적 홀, 2020 (new) ⓒStudio Heech

 

산양 양조장은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될까요?

산양 양조장은 문경 시민이 주인인 공공건축이자 건축적 가치를 드러내는 자산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시민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공공의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문경시의 지속적인 노력도 필요하겠죠. 더 이상 술을 생산하지 않지만, 지역 근대화의 역사를 가진 건축 유산이자 지역 사회의 연대와 청년 창업, 지역 문화의 부흥을 상징하는 문경의 새로운 문화 허브로 자리 잡기를 기대합니다.

 

ⓒStudio H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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