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이야기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 ‘스페이스 (논)픽션’ 출간

에디터. 윤정훈  자료. 마티

 

“이 글들은 공간에 대한 나만의 픽션이다. 공간은 우리가 픽션을 쓰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스페이스 (논)픽션>은 공간에 대한 사유를 담은 책이다. 소설가 정지돈이 건축 전문지 <SPACE>에 연재한 에세이, 전시 및 리서치 프로젝트에서 청탁받은 원고를 한 권에 묶어 펴냈다. 여느 도시나 건축을 다루는 책이 그러하듯 유명 건축가의 건물을 탐닉하거나 획일적 풍경의 주범으로 일컬어지는 아파트 단지에 대한 비판은 없다. 지극히 사적인 해석으로 점철된 글들은 “공간에 대한 각자의 진실을 상기하기 위해” 쓰였다. 책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러한 계기가 만들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마티

 

책은 공간에 대한 정의로 시작한다.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고리양자중력이론의 정의를 빌려 물리적 범위에 그치지 않고 공간의 개념을 확장한다. 물리학자 리 스몰린의 주장에 따르면 공간은 문장에 비유될 수 있다. 단어가 없는 문장은 존재할 수 없듯 공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책 속 공간에 대한 정의는 이렇게 일단락된다. “공간은 상호작용의 범위”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어디든 그곳이 곧 공간이다. 크기나 시간대, 공간을 점유한 존재나 그의 행동과 관계 없이 말이다.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공간이라면 공간 담론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는 다름 아닌 사용자다. 정지돈은 넓은 도면에 선을 그어가며 도시를 계획한 적 없어도, 내 집 하나 마련한 적 없어도 도시에 발 딛고 사는 누구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문가가 정해놓은 사용법에 그치지 않고 공간에 대한 사소한 생각과 추억을 하나둘 꺼내어 보일 때, 우리를 옥죄던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잊고 있던 개개인의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건축의 문외한이지만 도시의 거주민으로서, 한국의 아파트나 주택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전문가다. 건축가도 건축주도 아니지만 사용자로서는 누구 못지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만나는 건축이나 공간과 관련된 글 중에는 사용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게 거의 없다. 사용자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도시와 건물에는 건축가나 도시 계획가, 정부가 정해놓은 사용법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어리석고 상식과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이란 뭐고 교양이란 무엇인지 묻기 시작하면 질문은 끝없이 불어난다. 도시는 계획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다.” (6쪽)

 

사회적 규범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책은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공간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가령 정지돈에게 ‘화이트 큐브’로 비판받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거리의 거실”이다. 사계절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쾌적하고 안락한 그곳은 돈 없는 스물셋의 정지돈이 “지저분한 자취방에서 벗어나 도피할 수 있는” 이상적 장소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작품을 보러 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전시를 봐야지, 영화를 봐야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실상은 어떤 습관에 의해, 공간을 둘러싼 맥락이나 의례가 편하고 좋아서 가는 건지도 모른다. 진지한 평자들은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미술관(극장)에 와서 작품은 안 보고 말이야. 그러나 작품이 그렇게 중요한가. 진짜? 내게 화이트 큐브는 거리의 거실이었고 블랙박스는 거리의 침실이었다. 작품을 뒤로 밀어 놓을 때 비로소 공간의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22쪽)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아파트 단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의 추억의 바탕이 된 “노스탤지어의 근원”이고,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한 기차역이나 공항과 같은 경유 공간은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각종 절차로 번거롭기 짝이 없을뿐더러 국적, 인종, 계급 문제가 공공연히 정당화되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 정의한 공간이 물리적 범위를 초월하듯 정지돈은 시간, 이동, 기억, 역사, 테크놀로지, 자본, 예술을 넘나들며 공간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어떤 글은 읽고 나서도 이해가 어려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낙담보다는 읽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책의 편집자는 “독자들 모두가 자신만의 경험을,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효용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쓸모 있는 독서가 있을까?

 


정지돈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내가 싸우듯이』『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편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 장편소설『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모든 것은 영원했다』『…스크롤!』, 산문집『문학의 기쁨』(공저)『영화의 시』『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등을 썼다.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6년 문지문학상, 2022년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으며 2018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다.


도서명.
스페이스 (논)픽션

출판사.
도서출판 마티

판형 및 분량.
130×225mm, 184쪽

가격.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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