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장경림 글 & 자료. 스튜디오베이스 STUDIOVASE
집은 사람과 함께 자란다
여행이라는 것은 ‘돌아옴’의 전제가 있다. 돌아오는 그곳에는 집이 있다. 그래서 여행은 이상이고 집은 현실이다. 여행에서는 흥분이, 집에서는 평안의 호르몬이 생성된다. 생을 마감할 때 자신의 고향에 뼈를 묻듯 회귀의 본능은 자연스럽다. 따뜻하고 편안하며 보호해 주는 집은 나를 위한 최고의 조건이다.
집은 사람과 함께 자란다. 새 집은 마치 새로 산 신발처럼 깨끗하지만 낯설고 불편하다. 뒤꿈치가 살짝 까지고 자연스럽게 더러워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소파와 화분의 위치를 바꾸고 새로 산 그림을 건다. 마당에 모과나무를 심고 파란색으로 대문을 칠해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집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 그렇게 집은 사람과 하나가 된다.
불특정한 다수가 사용하는 공간과 다르게 집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래서 사용자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디자이너는 삶의 이야기 속에서 모티브를 찾는다. 집은 그 이야기를 지속하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공간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디자인은 결국 사용자가 완성한다. 디자이너는 그것의 여지를 생각하며 디자인해야 한다. 여지가 없는 공간은 감정을 단절시킨다. 현상을 쫓기 보다는 거시적인 관념 아래의 디자인은 집의 수명을 연장한다.
풍경 속의 안식처
작은 침실의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저녁 노을의 풍경을 생각했다. 집의 터는 아름답고 고요한 북한강을 적당한 거리와 높이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서종면 문호리는 서울 도심에서의 진입성이 탁월해서 양평에서 외지인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에 우후죽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다소 어수선한 모습이다. 대로와 강에서 적당하게 떨어진 거리는 이러한 간섭과 과도한 습도를 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땅은 뒤편에 연결되어있는 비탈로 인해 정오가 되어야 볕을 온전히 받지만, 노을이 지는 저녁 풍경을 향해 열려 있다.
의뢰인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일상에서 벗어나 외부로부터 보호받는 안식처로서의 공간을 원했다. 비탈을 등지고 있는 땅은 강을 향해 열려있지만, 집의 정면은 강을 향하지 않고 해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남쪽을 바라보도록 배치했다. 지역의 특성상 여름에는 고온 다습하고 겨울에는 그늘의 얼음이 웬만해서 녹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 어느 곳에서나 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요를 사용하는 2층 작은 침실에서만 강을 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외부는 집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간소하고 단정한 형태를 취하고 주변 토양과 비슷한 벽돌의 색과 질감으로 시간의 감수성과 겸손함이 느껴지길 바랐다.
밀도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리듬
갈대밭 뒤에 면한 주차 공간의 곡면 담장과 진입로 계단의 부드러운 선은 둥글게 성토된 잔디 마당과 이어지며 두 개의 매스를 연결하는 건축물의 곡선 관절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관절은 내부에서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중심이다. 꺾여 있는 두 개의 매스 내부에서는 하나의 마당을 바라보며 각각의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거실과 주방의 기능을 하는 1층은 크고 단순하다. 거실에는 벽난로가 중심을 잡고 있다. 난로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통석은 외부의 삼나무 데크 위에 세워진 낡은 디딜방아와 만난다. 벽면 전체는 천연의 회벽으로 마감되어 습도에 반응한다.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곡선의 벽은 오목한 외부 형태의 반전이다. 중앙의 계단 바닥은 돌과 나무의 이분화된 물성을 경험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작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2층은 의뢰인의 개인 공간과 손님 공간으로 나뉜다. 개인 공간은 일본 스타일의 좌식 거실과 요를 사용하는 최소 면적의 침실, 긴 복도형 드레스룸과 커다란 창이 있는 욕실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반대 편은 테라스가 딸린 게스트룸과 욕실이 있다. 잔디가 깔린 테라스는 비탈을 향해 열려 있다. 황금회화나무를 심은 아주 작은 마당은 보라색 꽃이 피는 비탈과 연결된다.
2층 거실은 복도보다 두 계단이 높다. 상대적으로 낮은 공간감을 형성하며 한지 들창과 함께 동양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부가 개방된 창의 크기는 1층의 커다란 창들과 대비되어 극적 효과를 유도한다. 더불어 반복되는 공간이 갖고 있는 밀도의 변화는 고유의 리듬을 만들며 건축물을 구성하는 또다른 감정의 축이 되도록 하였다. 그 변화는 외부 진입로의 계단에서부터 시작되어 드레스룸의 긴 터널을 지나 욕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욕실의 천장은 원목의 루버 사이로 인공의 빛이 떨어지며 높이를 과장한다. 비스듬히 동쪽으로 난 창은 아침 햇살 속 입욕의 경험을 제공한다.
진입부와 마당의 한 가운데에는 솔바람에 반응하는 로케트 향나무가 반긴다. 은빛이 섞인 탁한 녹색의 나무들은 조경의 주를 이루며 흙색의 벽돌집과 하나가 된다. 마당보다 내려앉은 주차 공간은 키 높은 갈대가 자동차를 숨기고 과실수와 초화류가 심겨있는 비탈의 숲은 집을 감싸 안으며 보호한다.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고요한 은신처가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