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윤현기 글 & 사진. 구보건축 GUBO Architects
전봇대와 집
최첨단 기반시설로 깨끗하게 정비되는 아파트 단지가 보편적 주거 개발의 해법으로 활용되는 요즘, 도시 안에서 골목 한 쪽을 지키는 전봇대는 오래된 동네의 상징이다.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영위하기 위해 온갖 전력, 통신 케이블을 공중에서 분배하는 지지대 기능을 하면서, 동네의 풍경에 가장 큰 인상을 남기는 사물이기도 하다.
서울 서계동에 1971년 완공한 2층 건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덕지덕지 얽힌 케이블을 힘겹게 받친 채 건물 모퉁이에 선 전봇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은 건물을 ‘전봇대집’이라고 명명하고, 자칫 동네 경관의 방해물로 인식될 수 있는 전봇대의 존재를 긍정해 우리 건물의 일부분으로 읽기 위해 노력했다.
오래된 시간을 드러내기
기존의 낡은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면서 부각하려 했던 부분은 50년 전에 축조하며 쌓인 흔적들을 다시 수면 위로 불러오는 것이다. 골목과 단절돼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던 저층부의 벽들은 주요 구조 부위만 남겨두고 최대한 덜어내어 가볍고 투명한 공간을 길 위에 드러내고자 했다.
기존 기둥에 오랜 세월 덧붙어 있던 불필요한 장식물을 떼어내고, 조적으로 둘러싸인 기둥의 거친 면을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드러냈다. 더불어 별도의 조명을 사용해 그 텍스처가 건물 디자인의 일부가 되도록 의도했다. 그리고 유리 벽으로 감싼 거친 기둥과 골목길 사이에 새로운 시간이 덧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흰색으로 도장한 철판으로 만든 긴 화단을 두었다. 이는 조경이 부족한 골목길에 녹색 공간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구축에 담긴 시간의 디자인
전봇대집의 2층은 방 네 칸과 주방 겸 거실을 지닌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집을 사무실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치면서 기존의 집이 지니고 있던 기억을 사무실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전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방을 나누는 벽체의 스킨을 걷어내고 조적의 벽을 드러내, 기존 방 구획이 자연스럽게 사무실의 각각의 워크스테이션으로 사용되도록 했다. 또한 구조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 벽체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조적벽과 슬래브가 만나는 상부를 덜어 내어 빛과 소리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건물이 축조된 과거의 내러티브를 공간화하는 동시에 여러 개의 벽으로 잘게 나뉘어 공간이 협소해 보일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디자인 선택이었다.
기존 주택으로 쓰였던 건물은 외부를 향하는 창이 부족해 실내가 다소 어두웠다. 이 부분을 개선해 밝은 사무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계단실 코어 벽 상부에 천창을 내어 빛이 부드럽게 사무 공간에 흐르도록 했다. 이 천창은 기존 슬래브를 부분적으로 절개해 만들었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드러난 철근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건물이 지닌 시간을 디자인의 주요 요소로 전용한다’는 전봇대집의 디자인 방향을 유지했다.
즉흥성의 건축
서계동 전봇대집은 컴퓨터 위의 도면과 모델링을 통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돼 시공된 건물이라기보다는,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마주침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디자인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랜 시간의 속살을 긍정하고 전봇대집 디자인의 정체성으로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서계동 전봇대집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장의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낡은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탐구하는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이 조그마한 도시적 개입이 어둡게 잊혀 가는 작은 동네의 골목을 새롭게 밝히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