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정경화 글 & 자료. CIID
결실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중국의 중추절衆秋節, 프랑스의 투생La Toussaint, 우리나라의 추석까지, 한 해의 수확에 감사를 올리고 기쁨을 나누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이루어져 온 전통이다. 추수동장(秋收冬藏)이란 말처럼, 농경사회부터 인류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키워 가을에 거둬들이며 겨울에 저장하는 삶을 반복해 왔다. 특히 추수하는 시기를 잘 보내지 못하면 그해 겨울은 아주 혹독하기에 그들의 삶도 위기를 맞았다. 이처럼 오랜 기간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다가올 삶을 준비하는 추수는 어찌 보면 모험에 가깝다.
외국에서 오랜 타향살이를 한 건축주 또한 평생 여러 장소를 거쳐 마침내 한남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본인의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은 참으로 낯설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을 텐데, 고된 여정을 마무리하고 한 장소에 자리 잡을 결심을 한 건축주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땅 고르기
4m가 넘는 대지의 높낮이 차, 5m 높이의 인접 대지 옹벽, 일방통행 도로, 본래 차도였으나 계단으로 사용되는 도로. 여러 조건으로 미루어 볼 때 거주하기에 비옥한 대지는 아니었다. 우선 땅과 건물의 관계부터 정리했다. 일조사선의 제약으로 인해 건축물은 남측의 전면도로 방향으로 바짝 붙어야 했다. 다행히 전면도로는 비교적 평지였다. 골목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주차장과 임대공간을 우선 배치했다.
임대공간은 계획 초기부터 동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갤러리나 쇼룸을 기획했지만, 주 출입구에 평행 주차장을 배치하다 보니 필로티의 뒤쪽으로 이격될 수밖에 없었다. 낮아진 대면율을 개선하기 위해 임대 공간을 복층으로 만들고, 건축물 코너에 쇼윈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넓게 트인 창을 설치했다.
단독주택 주 출입구는 계단형 이면도로의 가장 높은 지점에 배치해 임대공간과 동선을 완전히 분리했다. 건축주의 노후 생활을 대비해 전면도로 주차장 후면부에는 엘리베이터 진입로(부출입구)를 두었다.
볏짚 엮기 & 쌓기
일조사선의 적용을 받는 대지는 층이 높아질수록 사용할 수 있는 바닥면적이 줄어든다. 그 결과 단독주택의 전용면적은 36평이 채 되지 않았다. 제한된 면적 안에서 요구된 프로그램은 많았기 때문에 여러 경계를 잘 엮어 쌓아 올리는 구성 방식을 택했다.
주 출입구를 통해 한 층을 올라오면 다이닝 공간과 주방, 거실이 나타난다. 이 세 공간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배치하고, 창 너머의 차경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닿도록 해 공간이 넓어 보이도록 했다. 나머지는 작은 서재와 화장실, 팬트리를 배치했다.
위층은 욕실, 외부 욕실, 침실/드레스룸/세탁실, 화장실의 세 그룹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특히, 도심의 주거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다 보면 공간의 개방감이 낮아지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욕실과 침실 사이에 천창으로 채광이 가득한 투명한 외부 욕실을 두어 시각적으로 열리도록 했다.
외부 욕실과 드레스룸 사이의 계단을 올라가면 남산과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다락이 나타난다.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공간이다.
공간을 엮고 쌓으며 배치한 구성은 입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평의 느낌이 강조되는 벽돌 입면에 유리·금속·다른 패턴의 벽돌을 함께 사용해 변화를 주었다. 가로로 긴 창, 도로 모퉁이 측에 수직으로 이어지는 창문과 금속패널, 세로로 세워 쌓은 벽돌이 어우러지며 주택과 임대공간은 한 건물에서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