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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의 묵정밭

[Life in greenery] ⑧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미감을 '파주 스타일'로 만든 이현주 무구MUGU 대표의 들꽃과 사람
ⓒ무구
글. 이현준 에디터  자료. 무구

 

무구의 이현주 대표는 편집자로 일하며 오랫동안 그림책을 만들었다. 책을 만드는 틈틈이 들꽃과 버섯을 채집하고 도감을 읽었다. 더 많은 꽃들이 보고 싶어 절화에 관심을 두게 됐고, 지난 2016년엔 회사를 그만두고  런던으로 꽃을 배우러 다녀왔다. ‘무구無垢’는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을 뜻한다. 스타일을 넘어 마치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있는 그대로의 꽃을 지향한다.

개인 작업에 관한 어떤 강박 같은 게 있다고 했다. 수업이나 외부 작업이 없을 때면 늘 꽃과 단 둘이 마주한다. 그렇게 만든 꽃은 미러리스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게재하고 소통한다. 그의 꽃, 그의 사진들을 두고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파주 돌곶이길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가 이현주 대표를 만났다. 그 무구했던 시간들을 여기 옮겨 <브리크 brique> 독자들과 나누려 한다.

 

무구 이현주 대표 ⓒBRIQUE Magazine

 

청미래덩굴・완두콩
초롱꽃으아리인동초

 

ⓒ무구

 

“인동초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꽃이에요. 저 어릴 때 외할머니가 인동초 덩굴을 잘라서 말려두었다가 제가 감기에 걸리면 파뿌리랑 같이 약처럼 끓여주셨어요. 인동초엔 그런 추억도 얽혀 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자란 식물이라 더 좋아해요. 자생식물만이 가지고 있는 강인함이랄까, 어떤 당당함이 인동초에 있어요. 초롱꽃과 청미래덩굴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감은 이렇게 오래 된 꽃들에 있어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도, 아마 산에서 인동초나 청미래덩굴을 보셨을거잖아요. 그 분들이 제 꽃을 보시고 ‘예쁘구나, 곱구나’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꽃을 꽂으면서 생각했어요.”

 

풀과 꽃을 만지며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많은 경우 그들의 유년 시절에 풀과 꽃이 있었다. 주변 환경이 초록의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거나, 어머니가 유달리 꽃을 좋아하셨다는 누군가도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어린시절에 흡수했던 그 정취와 촉감, 향기와 소리 모든것들이 돌아보면 지금이라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기여했다는 것이다. 

 

ⓒBRIQUE Magazine

 

“서울 도봉동에서 태어났어요. 도봉산 바로 밑이에요. 거의 시골의 모습이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십여 분 걸어 나가면 산 밑에 논 밭이 보여요. 친정 어머니는 아직도 거기 살고 계셔요. 지금 돌이켜 보면 할머니를 따라서 버섯을 캐러 나물을 뜯으러 다녔던 경험이 참 큰 영향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와의 시간 중에서 가장 뇌리에 깊히 남겨진 기억이 있어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요.(웃음)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외할머니와 함께 버섯을 캐러 갔다가 겪은 일이에요. 그날도 할머니를 따라 뒷산에 갔죠. 할머니가 앞장 서서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고 버섯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순간 어린 제 눈에 할머니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사람으로 비춰진 거 있죠. 산이라서 배경은 온통 초록색이었어요. 녹색으로 물든 배경 속에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사람. 그때 그 웅대한 초록색 장면과 순간이 다 큰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신비로운 감각으로 제게 남겨져 잊혀지지가 않아요. 아마도 그때 그 경험과 기억이 지금 꽃과 풀을 만지는 저의 정서,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나 싶어요.”

 

플록스델피늄・베로니카
디디스커스
・공작초・클레마티스
아미초
・라벤더

 

이현주 대표의 어머니 ⓒ무구

 

“친정인 도봉동 저희 집 앞에 있는 담벼락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저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사진 속의 엄마가 서 있는 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제 작업의 바탕에는 저 자신과 제가 사는 곳, 그리고 가족이 있다는 걸 늘 생각해요.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색깔의 꽃들로 한아름 가득 큰 꽃다발을 만들고, 제 꽃을 든 엄마의 모습을 찍었어요.”

 

나고 자란 시간과 역사를 더듬는 것. 꽃과 열매가 비롯된 뿌리를 기억하는 것. 이현주 대표와 무구가 응시하고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난 모양은 당최 무슨 스타일이라 부르면 좋을까 궁금해졌다. 자유분방한 프렌치 스타일? 응축된 브리티시 스타일? 

 

명료한 대답이 들려왔다. “파주 스타일.(웃음) 가끔 외부 원데이 수업에 나가서 누군가 ‘선생님 꽃은 어떤 스타일이냐’ 물으면 파주 스타일이라고 대답해요. 이곳에 살아서 만들 수 있었던 것, 서울에 살았으면 만들지 못했을 것들이거든요.”

 

모감주나무 열매덩굴별꽃
고구마잎산마줄기방동사니
강아지풀개밀

 

ⓒ무구

 

“2년 전 봄 텃밭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고구마 순(하트 모양의 커다란 잎)이 그렇게 예쁘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어요. 시장에서 파는 소재보다 훨씬 생기있고 아름다워 보여서 뭔가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텃밭 주변에는 산마줄기나 덩굴별꽃 같은 들풀 종류가 많으니까, 그것들도 조금씩 잘라와서 꽂은 거예요. 방동사니, 개밀, 강아지풀 같은 것들은 텃밭에서는 잡초로 보기 때문에 어차피 다 뽑아서 버리거든요. 그런 생명이, 그냥 초록 풀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초록의 만 가지 색조에 취하고 말았다. 무구의 꽃은 종이와 마끈, 때로는 커다란 잎사귀로만 단순 포장한다. 미세 플라스틱으로 잔류할 플로럴폼은 사용하지 않고 치킨와이어와 침봉을 쓴다. 그러고보니 그가 선반에 모아 둔 기이한 모양의 화기에 눈이 간다.  

 

ⓒBRIQUE Magazine
프랑스 작가 세실 달라디에Cécile Daladier 의 화기 ⓒBRIQUE Magazine

 

“프랑스 작가 세실 달라디에Cécile Daladier의 화기에요. 들꽃을 위한 화기를 만들어요. 화려하고 과한 어레인지 보다는 한 두송이 잘라 꽂을 수 있죠. 안에 물을 조금 채우고 어떤 꽃이든 꽂아 넣기만 하면 돼요. 그 밖에도 오래된 사발에 꽂는 것도 좋아해요. 우리 할머니가 엄마를 낳고 미역국을 드셨다던, 일제시대에 제작된 막사발이예요. 뭔가 특별한 걸 하고 싶을 때면 사발을 꺼내요.”

 

민들레 홀씨코스모스소리쟁이
댕댕이덩굴 열매털별꽃아재비
누리장나무 열매

 

ⓒ무구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도예가 세실 달라디에의 화기에 가장 처음으로 꽂았던 꽃들이에요. 작가가 이 화기를 만들면서 상상했을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 작품이 멀리 한국까지 와서 잘 있어요, 그리고 이곳의 가을은 이런 느낌이에요’ 하고요. 보통 가을은 단풍이나 오렌지톤의 꽃을 많이 떠올리지만, 사실 들풀의 세계에서는 여름의 연장이에요. 다만 잎사귀의 색깔이 좀더 옅어지고, 두께는 얇아지고, 촉촉함이 조금 가셔요. 수분이 날아가 여리고 가벼워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민들레 홀씨는 가을과 잘 어울리고, 그래서 꼭 넣고 싶었어요.”

 

그가 초록 이외의 색깔을 구성하는 방식이 사뭇 궁금했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배경에 덧입히는 색도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데 한 몫을 할 터였다.  

 

“계절마다의 테마가 있긴 해요. 컬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장 많이 얻는건 식물원에서에요. 포천에 있는 평강식물원을 좋아해요. 거긴 들꽃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데, 들르면 계절에 따라 가장 눈에 띄는 색깔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가을에는 노랑과 보라. 시장에서 꽃을 고를 땐 채도 위주로 컬러 팔레트color palette를 구성해요. 비슷한 색상에 명도만 달리 하는 그라데이션 구성이 아니라, 각자 색상은 달리해도 선명한 정도를 비슷하게 맞춰내는거죠.”

 

코랄작약벨크레마티스양귀비
장미산딸기잎둥굴레
한련화정향풀

 

ⓒ무구

 

“저는 주로 얼굴이 작은 꽃들로 작업을 하는 편이라, 장미나 작약을 쓸 일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가끔은 아주 화려하게 꽃을 꽂고 싶은 날이 있어요. 그럴 때 가장 좋은 소재가 작약이에요. 명확하고 색깔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마구 피어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철저하게 내 눈이 즐거운 것만 생각하면서 꽂았던 꽃이에요.”

 

‘명확하고 색깔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마구 피어나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런 순간들을 뭉근히 품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삶은 지루하기 그지없을거란 사실, 급기야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는 인간은 본디 모순덩어리다. 인고의 시간은 끝끝내 꽃을 밀어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초록이 주는 힘에도 관심이 커지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위로를 받아요. 채집할 때보다도 그냥 산책을 하며 꽃과 풀을 볼 때 더 큰 위안으로 다가와요. 꽃 작업 자체는 스트레스일때가 많고 치열해요. 마지막에 사진이 원하는대로 나오지 않으면 참 힘들죠. 물론 잘 됐을때야, ‘아, 얘랑 나만의 다른 세계가 열렸다(웃음)’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건 위로보다는 성취감에 가깝죠. 채집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 수업 때 쓰려면 마흔 줄기 가량이 필요한데 충분할까’ 계산한다거나 생각할 게 많고요. 여기 파주에서는 조금만 위로 걸어올라가면 산길이 나타나요. 저는 자주 그 길을 오르니 사계절을 지켜봐요. 꽃과 초록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데서 큰 위로를 받아요.”

 

스위트피옥스포드 스카비오사

 

ⓒ무구

 

“런던에 있을 때,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길에 쓰레기가 좀처럼 없는 동네였는데, 누가 남의 담 밑에 맥주병을 두고 갔더라고요. 흰 담 앞에 놓인 병 두 개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뭔가 나를 부르는듯한 느낌이라 처음엔 지나쳐 갔다가 이내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어요. 이 병에 뭐든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마침 수업 때 쓰고 남은 꽃을 가지고 있었고, 병에는 맥주가 조금씩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꽃을 꽂았어요.”

 

여태 런던의 어느 담벼락엔 그날 꽂은 꽃들이 맥주 효모와 행복하게 취해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말았다. 담벼락과 빈병을 갸륵히 바라보는 그에게 어떤 공간을 꿈꾸냐고 물었다.

 

“좋은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냄새, 빛, 소리. 물건이 아닌 것들. 저에겐 그런게 더 커요.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도망치고 싶지 않은 공간,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요. 지금보다 더 시골로 가서 땅에 선 집을 꾸미고 살고 싶어요. 이를 테면 비무장지대. 파주에서도 더 올라가면 ‘해마루촌’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런 시골로. 울타리가 있고, 집이 있고, 그 앞에 나무가 있고. 왜, 어린 아이들이 빤하게 그리는 집 아시죠, 그냥 그런 집이요. 지은 지 오래돼 콘크리트 사이로 초록이 비집고 올라오고, 돌멩이가 있고. 그런 풍경이 좋아요.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사는 모습도 꽃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냥 그자리 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의 꽃을 계속해서 만들고 싶어요. 그러니 제 사는 모습 자체도 좀 더 시골스럽고 싶은가봐요.(웃음)”

 

상사화사위질빵강아지풀
방동사니코스모스황매화
모감주나무

 

이현주의 대표의 시할머니 ⓒ무구

 

“시댁이 진천이라 마을에 들풀이 많아요.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조금씩 잘라와 테이크아웃 커피컵에 꽂았는데, 시할머니가 아주 좋아하셨어요. 몸이 불편하셔서 집 밖으로는 거의 못나가시거든요. 그래서 밖에서 온 꽃이 더 좋으셨나봐요. 꽃이랑 같이 사진을 찍어드리려고 했는데, 강아지 복실이가 갑자기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 순간이 찍힌 거예요. 셔터를 누르고 1초 뒤에 컵은 모두 쏟아졌어요.”

 

ⓒBRIQUE Magazine

 

돌곶이길에 늦은 오후가 내리고 있다. 그가 내어 준 나무그릇 위 무화과도 어느새 뱃속으로 사라졌겠다. 키가 큰 볕에 드리운 늦여름의 표정, 말간 그의 얼굴이 여남은 단어들을 흩어내고 있었다.  

 

“저는 제가 만든 꽃이 그릇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긴 가지는 길게, 키 큰 꽃은 높게, 연약해서 쉽게 쓰러지는 꽃은 흐르듯, 해를 보고 단단하게 꽃대를 올리는 꽃은 직선으로. 원래 땅에서 피어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며 자리를 잡아주려 해요. 풀이 아무렇게나 자란 묵정밭이나 물웅덩이 옆에 반 그늘진 땅 같은 것들을 자주 떠올려요. 그런 곳들은 대개 사람 손이 잘 닿지 않고, 그래서 늘 살아 있어요.”

 

이현주 대표가 심은 구근에서 올해 처음 세상에 나온 은방울꽃과 세실 달라디에Cecile Daladier의 화기 ⓒ무구

 

유전자를 조작해 예쁜 머리를 돋보이게 키운 꽃, 특수합금 기술로 재현한 초록이 과연 우리가 고대하던 미래일가? 순박한 자연 그대로의 얼굴. 유행하는 프렌치 스타일 대신 철따라 길따라 난 모습대로 모아 낸 파주 스타일. 어쩌면 우리가 바라던 ‘내일’은 눈부신 첨단이 아니라 흐리터분한 ‘무구無垢’에 있는지 모르겠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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