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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취향

[Life in greenery] ⑦물건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취향으로. 카피라이터 출신 원예가 박기철이 사는 식물의 시공간
글. 이현준 에디터  자료. 식물의 취향

 

원예가 박기철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록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여주와 이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2011년까지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원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서울 율곡로 가든타워에 ‘식물의 취향’이라는 가드닝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특정 기법으로 형태가 재해석된 국내의 야생 초목을 소개하고, 외부 공간의 식물 설치와 교육을 통해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 식물을 소재로 한 사진이나 텍스트 작업 등 식물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소개하는 함축적인 의미로 그는 스스로 ‘원예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일차적인 식물 소재의 재배와 유통에서 벗어나 공간과 이미지를 생산하는 ‘창작자’의 역할을 꿈꾼다.

 

박기철 원예가 ⓒBRIQUE Magazine

 

변변한 간판도 없어 좀체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알아야 발걸음할 수 있는 운니동 ‘식물의 취향’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오후가 차올랐다.  채 다섯 평이 되지 않는 공간에 백 가지 빛과 그림자가 너울댔다. 공간을 향한 ‘식물의 취향’다운 애정과 그의 손길이 다시 창조하는 야생 초목들, 그리고 원예가 박기철이 진단하는 초록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종로구 운니동 가든타워 1층에 위치한  ‘식물의 취향’ 가드닝 스튜디오 ⓒBRIQUE Magazine

 

식물의 취향

 

브랜딩을 하면서 느낀 게 있다. 네이밍이란 결국 쉽고 명확하며, 콘텐츠를 드러낼 수 있어서 장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요즘 식의 멋진 이름들,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의 집합, 영문 약자나 비문식의 이름들을 경계한다. 이름을 지을 때 특별한 고민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식물의 취향’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고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생활하며 필요한 ‘의·식·주’의 취향처럼, 식물 각자에게도 그들의 취향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초록에게 ‘의’란 화기나 화분, ‘식’이란 각 식물군에 적합한 토양, ‘주’란 식물이 놓이게 될 공간이 아닐는지. ‘식물의 취향’이면서 원예가 박기철의 ‘식물 취향’이기도 한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고, 공간·전시·책 출간을 희망하기도 했다. 어떤 곳에 사용해도 좋을 이름이 바로 ‘식물의 취향’이었다. 

 

ⓒBRIQUE Magazine

 

식물의 취향은 예쁜 화기에 단순 분갈이를 한 식물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다. 분갈이 이후 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특정 기법을 녹여 식물의 선과 형태를 재해석해낸다. 이 과정을 ‘후반작업’이라 표현한다. 가지치기로 잎을 솎아내는 ‘전지’, 가지에 철사를 감아 구부려 의도한 방향으로의 생장을 유도하는 ‘철사 감기’ 같은 기본 분재 기술에서 파생 시켜 만든 나만의 기법이 몇 가지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술들이 적용된 작업이 완성되는 시점에 미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히 해나간다. 이 후반작업을 지속하면 하나의 식물이 가진 내용도 풍부해지고 형태도 아름다워진다. 

 

박기철 원예가가 식물들로 연출한 강남구 수서동의 ‘식물관PH’ ⓒBRIQUE Magazine
박기철 원예가가 식물들로 연출한 강남구 수서동의 ‘식물관PH’ ⓒBRIQUE Magazine

 

단어들 : 야생 초목 · 가드닝· 식물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분재, 조경, 화초 등이다. 식물의 취향이 하는 작업과 결과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 단어를 사용해 나를 소개했을 때 그들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미지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분재’ 하면 어르신들께서 구불구불한 소나무 등을 매만지는 장면이 그려질 수 있다. ‘조경’ 하면 건축법과 조경법 내에서 저급한 재료로 물량만 맞춰내는 관행이 떠오를 수 있다. ‘화초’ 하면 왠지 무지막지한 화분, 개업 화환 같은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애초부터 식물의 취향이 하는 작업의 포지셔닝을 달리하고 싶었고, 기존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부터 지양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분재를 합니다’ 대신 분재의 소재가 되는 ‘야생 초목을 가지고, 분재에서 활용하는 특정 기술 및 기법을 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합니다’로 대체하는 식이다. ‘조경’ 은 ‘가드닝’으로, ‘화초’는 ‘식물’로 바꾸어 쓴다. 

 

ⓒBRIQUE Magazine

 

가든타워, 운니동

 

운니동-재동-계동-가회동-원서동.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산책 코스다. 종점은 늘 여기 옛 공간 사옥 앞이다. 그땐 상암동에 살 때여서, 그 앞에서 파란색 버스를 타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길 건너편의 이 풍경을 바라보게 됐다. 남산타워가 어렴풋이 보이고, 골목 뒤편엔 운현궁으로 난 쪽문이 있다. 이 근방엔 1970년대 같은 시기에 세워진 건물이 세 채가 있다. 현대 사옥, 삼환빌딩, 그리고 가든타워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근대화 시대에 올라간 건물들이다. 당시엔 건축양식이 다채롭지 않았기에 해외의 특정 사례를 차용했거나, 당시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이 지은 건물이겠다. 내가 감각하는 서울은 이 빌딩들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 놓은 운니동의 풍경에 가까웠다. 이 시대의 건축에서만 느낄 수 있던 투박한 질감과 형태가 가장 서울답다고 생각한 거다. 모든 건물이 궁을 둘러싼 데다 수많은 외국인이 왕래하는 상권도 형성돼 대부분의 빌딩이 건물 외관에 영문 이름을 병기한다.

 

2008년 대학생이었던 박기철 대표가 깊이 간직한 운니동 가든타워만의 정취 ⓒ식물의 취향

 

지극히 서울다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이 풍경이 나에겐 참 흥미롭게 다가왔다. 안국역을 기점으로 저편은 시끌벅적하고 호들갑스러운 면이 있는데, 이편은 늘 이렇게 호젓하다. 이 풍경에 매료된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분위기를 간직한 공간에서 일을 하고 싶다, 하는 막연한 소망을 품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무렵,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이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이곳은 가든타워 내에서 운영하는 매점이었다. 지금도 철문에 문구·우표·복사·팩스 스티커 자국이 남아 있다. 광고홍보학을 전공하고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광고회사에 입사에 광고와 브랜딩 관련 일을 했다. 식물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이 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자리, 이 공간이었다. 

 

매점이었던 시절의 흔적 ⓒBRIQUE Magazine

 

4년의 기다림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당장 이곳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을 보낸 경기도 이천에 2011년 온실을 지어 스튜디오 삼아 일을 시작했다. 일을 개시함과 동시에 대형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받았다. 운이 좋게도 먹고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 공간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다. 대중에게 개방은 하지 않았지만, 나만의 스튜디오가 있다고 해도 서울 안에서 대중과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이 되는 공간이 없다는 것은 ‘식물의 취향’이라는 브랜드에 리스크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터였다. 가든타워 외에 대안이 되는 공간들도 여럿 있었지만 여기, 이곳이어야만 했다.

 

2011년 이천에 마련한 온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BRIQUE Magazine

 

그렇게 장장 4년을 이 공간 하나만 바라보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 여간하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이만한 원형탈모도 얻었다. ‘멍청하다’, ‘미친 게 아니냐’ 하는 주변의 반응도 꽤 됐다. 다섯 평도 안 되는 그런 공간을 왜 그렇게 기다리고 있냐는 거였다. 심지어 모 클라이언트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기도 했다. 소유한 빌딩 1층에 권리금, 월세, 보증금 모두 제하고 들어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빌딩 내부에 식물을 설치해 가꿔달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연습장이 될 터였고 그래서 벅차고도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그다음의 결과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식물의 취향이 첫발을 내딛는 공간이 도산대로 어딘가의 대형 빌딩, 500평을 웃도는 커다란 건물 1층에 자리하는 게 과연 맞을까? 아마도 ‘식물의 취향’이라는 브랜드가 내놓는 결과물, 추구하는 방향성, 전개하는 콘텐츠 모든 것들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표정을 해야 했을 것이다. 공간이 위치한 지역적 특징, 공간의 성격에 맞춰서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한 제안들마저 정중히 거절하고 이 공간을 기다렸다. 어느 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당시 이곳 매점 할아버지를 찾아가 ‘툭’하고 내려놓았다. “인제 그만 제게 넘겨주시죠.” 할아버지는 아무 일 없단 듯 그러마고 했고, 그 주에 계약이 성사됐다. 한 달 후 거짓말처럼 빈 머리카락이 채워졌다. 

 

ⓒBRIQUE Magazine

 

가든타워 안 이 공간은 어렸을 적부터 산책하며 봐 오던,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를 지키던, 나의 개인적인 기쁨이 묻은 공간이다. 편리한 교통과 접근성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이 공간 안에서 ‘식물의 취향’이라는 브랜드를 전개한다면 상업적으로 훌륭한 열매를 맺으리라는 확신까지 있었다. 거대 클라이언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만큼 내가 계획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겠다는, 그런 확신과 신념이 되어 준 공간인 것이다.  

 

ⓒBRIQUE Magazine

 

물건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취향으로

 

식물의 어제 : 유통과 시스템

 

‘양재동 화훼시장’하면 개업 화분과 화환들, 그리고 우리나라 화훼업계를 다져온 분들이 떠오른다. 과거에는 화훼시장이라는 유통 구조를 만들기 위해 1세대, 2세대 선생님들께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애를 쓰셨다. 농장에서 생산된 소재들을 전국의 화훼시장 망에 공급하는 일련의 과정에 집중하는 유통업이었다. 따라서 심미적인 요소에 치중할 수 없었고 단순 분갈이를 해서 외적으로 촌스럽더라도 결과물을 만들어 판매를 이뤄내는 것이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시장의 논리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경쟁이 과열되면 공급가를 낮출 수밖에 없고, 박리다매로 옮겨가면 형태들은 자꾸만 못생겨지고 촌스러워지고, 질은 저하된다.

 

식물의 오늘 : 소비되는 이미지

 

요즘에는 식물과 초록에 대한 관심사가 높아지면서 심미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도 생겨나고 과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다. 식물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멋 부림에만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쁜 화기, 예쁜 소품, 예쁜 인테리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식물 작업에 대한 완성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식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지 않는다. 이미지를 소비할 뿐이고 예쁜 껍데기를 찾아 나설 따름이다. 소셜미디어(SNS)의 영향이 크다. 요즘은 어떤 공간이 내놓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태그하기에 바쁘다. 그저 여기 왔다는 사실을 사진 찍어 알리는 것이다. 콘텐츠가 훌륭하지 않아도, 커피가 맛이 없어도, 과장을 보태 똥을 팔아도 사진을 찍고 위치를 태그해 SNS에 내보일 수 있는 공간이라면 많은 사람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과연 우리가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바가 없다. 양질의 고민이 지속된다면 좋은 방향성과 목적을 가진 가드닝 문화가 완성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이다. 

 

ⓒBRIQUE Magazine

 

요즘 젊은 세대가 만들어내는 식물 관련한 설치 형태의 작업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이미지, 어떤 레퍼런스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었는지 대번에 찾아낼 수 있다. 여타의 작품과 다르게 식물로 만드는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저작권에 대해 참 무감각한 것 같다. 어떤 이미지나 타인의 작업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걸 그대로 베낄 게 아니라 좋은 자극과 영감을 받고 끝낼 일이다. ‘나라면 어떤 식으로 해석할까’에 그쳐야지, 그 결과물을 그대로 카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어디서 본 듯한 공간들이 양산된다. 식물에 대한 관심도는 상승하고, 젊은 층의 소비도 이끌어낼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겉멋에만 물들어 있다는 한계점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과정 속에 있다. 식물의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초록과 공간 또한 많아질 것이다. 

 

식물의 내일 : 기술과 취향의 경계에서

 

식물은 이제 하나의 취향이다. 우리 이전 세대 사람들에겐 꽃이나 식물을 좋아하고 가꾼다는 것이 전혀 특별할 것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취미 정도였지, 멋이나 취향의 영역은 아니었다. 요즘은 다르다. ‘나는 식물을 좋아해’라는 문장을 말하자면 그 안엔 ‘난 이런 것까지 좋아해’, ‘나는 이런 것도 소비할 줄 알아’라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이 시쳇말로 ‘쿨함’, ‘힙함’을 내포하게 된 것이다. 식물이라는 콘텐츠가 드러낼 취향이 하나가 더 생겼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BRIQUE Magazine

 

앞서 말했듯, 식물을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봐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식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미묘한 초록의 선과 형태, 컬러와 뉘앙스를 구별해 내고 선호도를 부여할 만큼 눈썰미가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 관심이 언제가 드높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데, 인간의 수고로운 노력을 과학과 기술이 대신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다양한 품종과 수종이 개량·개발될 테고, 수입 유통 경로가 확장되어 인간이 가꾸고 누릴 수 있는 식물군과 소재는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더불어 식물 관리법에 대한 정보가 더 밀도 있게 확산되고, 관련한 수업도 많아져 대중의 식물에 대한 지식 습득도 활발해질 것이다. 역시 기술의 발달로 지금보다 훨씬 편리하게 식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화기도 개발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애를 쓰지 않아도 아름다운 식물을 곁에 두고 가꿀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올 거라 확신한다. 옷을 살 때를 떠올려보면 쉽다. 특정 브랜드가 좋아서, 이 맵시와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사지, 내가 옷을 직접 디자인해 지어 입으려고 사지 않는다. 식물 또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꾸는 것보단 옷과 기호품처럼 취향에 기반한 소비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BRIQUE Magazine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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