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김윤선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양성모, 최진보 자료. 구보건축사사무소
나 혼자 산다
바야흐로 1인 가구 전성시대다. 혼라이프를 즐기는 ‘혼족’이 늘어나고, 2000년대 이후 최저점을 찍은 혼인율과 ‘비혼’ 관련 뉴스가 헤드라인에 등장하는가 하면, 황혼 세대들은 ‘졸혼’을 선포한다. TV에서는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고, 마트에는 1인용 소포장 상품이 성행한 지 오래다. 통계청의 최신 인구 총조사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수의 29.3%. 서울의 경우 전체 가구 수의 3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세 집 중 한 집은 혼자 사는 1인 가구라는 이야기다. 2047년에는 그 비중이 37.3%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 혼자 산다
1인 가구 증가는 주거 시장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관련해 현재 주거 시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키워드 중 하나는 단연 ‘공유’다. 1인 가구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공유 주거 모델이 생겨나고, 대기업에서도 앞다투어 공유 주택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 그렇다면 공유 주택이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한 리서치 기업의 조사에 따르면 공유 주택 거주를 희망하는 이유로 경제적 부담 감소와 외로움 해소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꼽혔다. 개인이 독립된 공간을 가지면서도 거실과 주방, 화장실 등을 공유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만큼 합리적인 가격으로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커뮤니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변화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빠르게 나타나는 이 시대, 지금 우리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혼자서도 잘 살기 위해 우리 사회와 개인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2020년 서울, 우리가 ‘함께 혼자’ 사는 법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청운광산’은 1인 가구를 위한 공유 주택이다. 이 집은 서울시가 소유하고 서울주택도시공사(이하
SH)에서 관리하는 토지를 장기임대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이하 HUG)의 사회임대주택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을 받아 지은 서울시 토지임대부 사회주택이다. 2017년 ‘토지임대부 사회주택 공모 사업’을 통해 공유 주택 기획, 운영사인 서울소셜스탠다드와 건축 설계를 맡은 구보건축사사무소가 사업자로 선정되어 진행한 민관 협력 프로젝트로, 사회와 개인이 힘을 합쳐
마련한 대안이라는 데서 그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캐내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의미를 담아 ‘청운’이라는 지명에 ‘광산’을 붙여 이름 지었다는 청운광산. 이 집을 통해 2020년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혼자’ 살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발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청운광산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북악산 아래 유서 깊은 작은 동네 궁정동에 열한 개의 표정을 가진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열한 명의 1인 가구가 함께 사는 집, 청운광산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서울의 숨은 동네, 궁정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안전가옥이 있었던 동네로 많이 알려진 궁정동. 지금은 안전가옥이 있던 터가 근린공원으로 바뀌면서 경비실로 쓰는 건물 한 채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공원과 주한 교황청 대사관, 단독주택 몇 채만이 자리를 잡고 있는 조용한 동네. 공공주택이 들어선다고 하면 으레 들끓는 민원도 없었다. 오랫동안 정치적인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고, 민간인이 출입하기 힘들어 그 명성에 비해 비교적 숨은 동네였던 이곳. 청운광산을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지면, 동네의 분위기가 새롭게 전환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긴 원래 우리 땅입니다만
현황도로도 도로다
대지 일부를 뒷집에서 통행로로 쓰고 있었다. 지적도상 도로가 아니지만, 주민이 오랫동안 통행로로 이용해온 사실상 도로인 ‘현황도로’인 것. 이 경우 현황도로도 도로로 인정돼, 결국 대지 일부를 도로로 내놓아야 한다. 같은 시기에 공사를 하던 옆집이 2.3m를, 청운광산이 3.7m를 내어 기존 현황도로보다 넓은 폭 6m 도로가 새로 생겼다. 이로 인해 대지 가용 면적은 263m²에서 194m²로 대폭 줄어들었다. 서울시가 대지와 공사비를 빌려주는 공공성이 있는 사업임을 내세워 건폐율이라도 원 대지 면적에 적용할 것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주체가 민간이기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줄어든 면적으로 사업성을 다시 검토해 가구 수와 공유 공간 면적을 하향 조율해야만 했다.
사대문 안 집 짓기 필수코스
건폐율 40%, 용적률 160%, 4층 이하 층수 제한의 의미
보통 2종일반주거지역은 건폐율 60%, 용적률 200%를 적용받는데, 이곳은 자연경관 지구로 묶여 있어 건폐율 40%에 용적률 160%, 4층 이하 층수 제한이 있었다. 이 숫자의 의미는 4개 층으로 쌓아 올린 ‘박스’ 형태로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 법에서 허락하는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여 개발하려고 한다면 새로운 건축적 시도나 공간을 만들 가능성, 이를테면 외부공간이나 데크 등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
문화재 시굴조사 대상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에 있는 대지 대부분은 건축 행위 시 문화재 시굴조사를 해야 한다. 지역마다 기준이 다르나 보통 대지의 10% 정도를 시험 조사하고, 이때 가치가 있는 문화재나 유물이 발굴되면 대지 전체를 조사한다. 발굴된 유물은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넘어가고, 1년 넘게 공사가 지연될 수도 있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진척시켜야 하는 사업자 입장에선 복불복인
셈. 발굴 비용은 소규모 공사인 경우 시에서 지원해주기도 하지만 지원받기까지 반년 이상 걸려 보통 사업자가 부담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시굴조사 때 밥그릇이 하나 나왔는데, 유물 가치가 없어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됐다.
나무와 콘크리트의 극적인 만남
나무 + 철근콘크리트
단순하고 평범한 벽돌 건물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목구조와 철근콘크리트조를 결합한 복합구조를 가졌다. 여러 아이디어를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했으나 목구조를 적용하는 것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견고함이나 단단한 맛은 떨어지지만, 집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목구조는 독일에서 만든 구조용 집성목 패널로, 국내 반입 후 구조 회사에서 계획에 맞게 재가공했다. 가공과 조립이 비교적 간편해 공사 기간이 짧아졌다. 폭 90cm로 규격화한 구조용 집성재를 레고처럼 조립하고 연결해 큰 판을 만들어 벽체와 천장, 바닥에 사용했다. 여기에 중목구조를 함께 적용해 강도를 높였다.
단일구조 vs 복합구조
복합구조를 적용한 것은 공사비 절감과 주변 민원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이 컸다. 초기에는 전체를 목구조로 계획했으나 비용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여기에 적용된 구조용 집성목 패널은 철근콘크리트보다 1.5배 정도 비싸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집에서 물을 많이 쓰는 우리나라 문화 때문이다. 서양은 건식 문화가 보편적이지만 우리나라는 온수 배관도 많고 시공사도 경험이 적어 이에 대한 기술적 확신이 부족했다. 샤워실, 화장실, 세탁실, 주방 등 물 쓰는 공간을 한데 모아 혹여 배관에서 물이 새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철근콘크리트조를 적용했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개인실과 거실 등에는 목구조를 적용했다. 그 때문에 공사비는 예상한 것보다 많이 나왔지만, 그래도 2~4층 규모의 목구조 건설에 열흘이 안 걸린 점은 앞으로 도심에서 소규모 공사를 시행할 때 주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법으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조재 = 마감재
독일산 스프러스 나무를 사용했다. 유럽은 목구조가 보편적인 만큼 관련 산업이 훨씬 커 자재가 비교적 저렴하다. 나무 색깔도 온화한 톤이 많은 것이 장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구조재로 쓸 만한 큰 나무의 물량이 적고 단가가 비싸 수입산을 쓰는 것이 경제적이다. 목구조를 적용한 공간 내부에는 구조재가 그대로 마감재가 되도록 노출 마감을 했다. 마감을 하지 않으면 공사비가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도리어 마감을 하지 않으니 지저분한 전기선이나 배관을 숨길 공간이 없어져 계획 단계에서의 섬세함과 시공자의 수고로움이 더 많이 필요했다.
열한 개의 표정 있는 집
서로 다른 1인 가구 11명이 함께 사는 집
초기 기획 설계에서는 5개 층 규모에 1~2층에는 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하고, 3~5층에는 방마다 발코니가 있는 12개의 개인실과 넉넉한 공유 공간을 계획했다. 욕실엔 욕조와 천창을, 옥상에는 정원과 텃밭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면적 제한과 공사비 문제로 초기 계획안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구성해 지하 1층과 1층에 근린생활시설을, 2~4층에 11개의 개인실과 공유 주방을 마련했다. 근린생활시설은 10년간 장기임대로 발효식품 음식점이 입주해 이 집의 앵커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한다. 공유 주방은 층고가 높은 4층에 배치해 좀 더 여유로운 공간감을 주고자 했다. 운영을 위해 최소 11명의 1인 가구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고, 개인실 면적은 최소화해야 했다. 안목치수로 2.7m x 3.4m로 세 평 남짓한 11개의 개인실은 침대와 작은 책상, 붙박이장이 들어가는 간소한 구성이다. 다만 계단실을 비교적 여유 있게 계획해 2층과 3층 사이 전망 좋은 계단참에 눅Nook을 두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등 입주자 간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창을 최대한 많이 뚫어 개방감을 높이고, 벽을 최소화해 넓은 공간감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11개의 창
11개의 개인실은 남쪽에 9개, 북쪽에 2개가 있는데, 각 실의 창을 모두 다른 형태로 설계했다. 용적률과 건폐율 제한으로 단순해진 건물 외관에 리듬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입주자들이 각자 다른 표정의 방을 가짐으로써 획일적인 주거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건축적 재미를 찾기 위한 시도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면 창문 크기에 대한 민원이다. 공사 초기에는 민원이 없었는데, 막상 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집 경계부에 있는 세 집에서 창이 너무 크다고 민원을 제기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민원이 들어오니 구청에서도 설계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상황. 사실 법적으로 인접 대지 경계에서 2m 이내에 있지 않으면 차면 시설을 할 필요가 없다. 법적 의무는 아니었지만 결국 북쪽 2개 방은 시트지와 블라인드를 부착해 최소한의 조처를 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는 11개의 가구
처음에 설계를 맡은 구보건축이 창문 형태에 맞춰 열한 개 개인실에 전부 다른 가구 디자인을 제안했다. 창의 형태가 다른 만큼 개인실 가구 구성도 자연스럽게 달라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창호와 가구를 결합해 책상, 화분 받침대, 벤치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창호·가구 일체화 유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고, 스튜디오 프레그먼트가 최종적으로 가구 디자인을 맡았다. 스튜디오 프레그먼트가 주목한 것은 1인 가구의 삶의 형태. 좁은 방 안에서 하나의 가구를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여행용 가방을 보관할 수 있는 수납공간도 마련했다. 가구의 쓰임별로 멜라민 소재에 차등을 두어, 많은 사람의 손이 닿아 높은 내구성이 요구되는 주방 가구는 HPM(High Pressure Melamine), 상대적으로 손을 덜 타는 개인실 내부 가구는 LPM(Low Pressure Melamine)으로 마감했다. 양쪽 끝 방에는 책상을, 가운데 방은 화장대를 두어 생활 패턴이나 성향에 맞게 입주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집은 때로 동네의 얼굴이 된다
초기에는 목조 주택이니 외장 재료도 통일성 있게 나무 사이딩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뒤틀리고, 색도 빠지는데 이런 점이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다. 내구성이 약하고 유지관리가 불편하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간편하고 비용도 저렴한 빨간 벽돌이 선정됐다. 공사비가 빠듯한 상황에서 벽돌 선택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런데 이웃집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민원이 제기됐다. 밝은 톤이 주를 이루는 동네와 조화를 이루는 밝은 색상의 벽돌로 외장재를 바꿔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조율을 거쳐 벽돌 색상을 바꿨고 서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건축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시 속에서 하나의 환경이자 풍경이 된다. 이것이 건축이 공공성을 갖는 이유. 사적인 내 집도 예외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