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태진 객원에디터 자료. 개별 표기
[서울, 어떻게 살 것인가] ‘서울감자도Seoul Potato Plan’는 박혜리가 기획하고 도시·건축 전문가 스물 아홉 명을 모아 함께 진행한 서울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영국 도시계획가 패트릭 애버크롬비Patrick Abercrombie가 대런던계획(1944)에서 선보인 ‘사회 및 기능 분석도’, 이른바 포테이토 플랜의 방식을 빌렸습니다. 도시를 익은 감자처럼 경계가 부드러운 덩어리로 그려 살아 있는 집합체로서의 서울에 다가가려는 시도입니다.
박혜리는 도시를 “소우주라 부를 수 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구성해 낸 복잡한 집합 유기체”라고 말합니다. 서울을 그린 지도는 이미 충분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수치화된 지도 너머 주관적인 서울에서 새로운 객관을 길어 올리려 합니다. 스물다섯 개 자치구에 살거나 그곳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전문가들이 각자의 동네를 맡은 이유입니다.
출간 이후 저자들이 직접 자신의 지역을 이야기하는 릴레이 북토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성 안에서 출발해 북쪽, 서쪽, 동쪽, 남쪽으로 권역을 옮겨가고 그 사이에 인프라와 산업이라는 두 개의 주제 회차가 놓입니다. 이 연재는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매회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기록하되 하나의 질문을 품고 접근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글 싣는 순서.
① 종로구와 중구: 서울의 비어있는 중심 — 황두진, 지정우
② 서울 북쪽, 도시와 자연의 접점에서 — 박미숙, 이길훈, 김준호, 김세진
③ 서울 서쪽: 연결, 단절, 그리고 관계 — 박성진, 우대성, 이진오
④ 도시인프라, 기후인프라, 그린인프라 — 온수진, 박승진, 이우주, 추소연
⑤ 서울 동쪽: 강과 구릉의 도시성 — 김인철, 조성룡, 이인규
⑥ 생산과 소비, 주거와 일터의 혼합도시 — 이은경, 신은기, 최혁규, 이순석
⑦ 서울 남쪽, 원조 영동 옛 강남 — 서지영, 조항만, 박혜리, 김기호

서울 성동구와 송파구, 강동구. ‘서울감자도’ 북토크 다섯 번째 회차는 한강을 끼고 남북으로 놓인 세 자치구를 다뤘다. 모이는 자리는 성동구 성수동의 아르키움 사옥이었다. 성동구를 맡은 김인철 아르키움 건축사사무소 대표가 2020년에 지어 옮겨온 건물이다.
세 구를 하나로 묶은 기준은 강이었다. 그런데 강동구를 맡은 이인규는 다른 기준을 먼저 꺼냈다. 1963년까지 서울에 포함돼 있던 것은 성동구뿐이었다. 강동과 송파는 물론 강남과 서초까지 모두 서울 교외였고, 편입되면서 성동구 산하 출장소로 들어왔다.
“사실은 우리는 범 성동구였다. 그래서 성동구에서 하는 것이 맞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 이인규
1943년에 생긴 성동구에서 1975년 강남구가, 1995년 광진구가 갈라져 나왔다. 강남구에서는 1979년 강동구가 떨어져 나왔고, 송파구는 그 강동구에서 다시 갈라졌다. 북쪽 편에서 강북 4구가 성북구 하나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쪽도 사정이 비슷하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북쪽에서는 산이 먼저 경계를 그었다면 동쪽에서는 그 경계를 사람이 그었다는 점이다.

강을 육지로 만들다
육속화陸續化는 섬을 육지에 이어 붙이는 일이다. 1915년 지도를 보면 이 일대에는 잠실도와 부리도라는 두 섬이 있고 강이 두 갈래로 흘렀다. 개천에 가까워 비가 많이 오면 배로 건너고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건넜다.
“육속화라는 말을 저도 이번에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강을 육지에 속하게 만드는 겁니다.” ― 조성룡

1971년 잠실섬 육속화로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메웠다. 1974년 잠실지구종합개발 기본계획이 제방 축조와 공유수면 매립을 담았고 이듬해 잠실아파트 1단지에서 5단지가 올라갔다. 메워진 남쪽 물길의 흔적이 석촌호수다.
조성룡은 이 사업의 성질을 짚었다. 물만 메우면 땅이 생기니 토목으로 끝나는 일이었고 그래서 한강변에 인프라가 집중됐다. 그렇게 생긴 땅은 사실상 공짜였다. “시장이 되면 누구나 매립부터 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문제는 그 땅에 무엇을 지었느냐다.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라 옛길도 마을도 없었다. 지을 수 있는 것은 아파트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그의 설명이다. 1948년 조선주택영단을 이어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생기고 1964년 마포아파트가 준공된 뒤, 여의도와 압구정을 거쳐 잠실로 이어지는 단지들이 한강을 따라 들어섰다. 그는 이 시기를 상전벽해로 요약했다. 공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바뀌었다는 점을 거듭 짚었다.

강동, 켜켜이 쌓인 주거의 지층
이인규가 강동구에 붙인 제목은 켜켜이 쌓인 서울의 주거 지층이다. 재건축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의 기억과 일상을 기록하려 1인 출판사 ‘마을에숨어’를 만들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펴낸 작가다. 뒤에 그 단지에 관한 논문도 단행본으로 냈다.
그는 강동구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부터 꺼냈다. 솔직히 내세울 것이 많지 않다고 했다. 대신 집이 아주 많고 그 집들이 시대 순서대로 쌓여 있다. 지도를 펼치면 도시 조직이 세 가지로 갈린다. 서쪽 구시가지에는 골목이 이어지다 끊기는 자연발생적인 조직이 있고 가운데에는 구획정리로 길과 필지를 격자에 맞춘 조직이 있으며, 동쪽에는 단지 하나가 블록 하나인 대단지가 있다.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걷다 보면 차례로 나타난다.

가장 아래 지층은 천호동과 암사동, 옛 성내동 일대다. 1936년 놓인 광진교가 기준점이 됐다. 한강에 놓인 세 번째 다리이자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두 번째 다리였는데 그때 이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광주와 충주, 강원도에서 출발한 물자가 이 다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광진교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자리가 천호동 구사거리다. 천호동은 천 개의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 붙을 만큼 번화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기존 맥락과 무관한 직선들이 그어졌다. 강동에서 강남까지 평행하게 뻗은 세 개의 도로다. 그중 하나가 양재대로다. 지형도 옛길도 고려하지 않은 선이었다. 광진교 옆에는 천호대교가 놓였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논밭을 반듯한 필지로 바꿨고 그 위에 단독주택과 다가구가 들어섰다. 다만 집이 이미 많던 곳은 손대지 못했다. 그래서 강동구에는 구획이 정리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지도에서 나뉘어 보인다.
그다음은 아파트다. 1970년대 말 착공한 둔촌주공아파트가 1980년 말 준공됐다. 잠실주공 다섯 개 단지를 막 끝낸 대한주택공사 인력이 공백 없이 투입돼 하루 100호씩 올린 결과였다. 지하주차장을 만들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대지 면적이 62만㎡다. 서울 아파트 단지 평균의 스무세 배이고 창덕궁보다 넓다.
“둔촌 1동이 하나의 단지일 정도로, 행정동 하나가 하나의 단지인 스케일이죠.” ― 이인규

그는 이 규모를 군사정권 시기에만 가능했던 유형으로 봤다. 성동구에 편입된 텅 빈 땅과 그 시대가 맞물린 결과라는 것이다. 명일동은 강동구에서 유일하게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고덕 일대에서는 1980년대와 2010년대에 두 차례 그린벨트를 풀어 단지를 만들었다. 그가 가져온 서울 대단지 순위표를 보면 상위 열일곱 곳 가운데 열한 곳이 송파와 강동에 있다.
그가 꼽은 마지막 지층은 아직 쌓이는 중이다. 고덕 비즈밸리가 강동구에서 유일한 업무지구로 개발 중이다. 강동대교와 구리암사대교에 이어 2025년 고덕토평대교가 놓였다. 집만 짓던 구에 직주근접과 도시성이 들어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객석에서 지도를 두고 질문이 나왔다. 단지가 하나 크게 자리를 잡으면 거기서 축이나 리듬이 이어지는 것이 도시계획의 상식인데, 남쪽 둔촌주공과 북쪽 명일동 단지는 건너뛴 채 마주 보고만 있는 이유를 물었다. 둔촌이 지어지던 1970년대 말에는 올림픽 개최가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종합경기장 예정 부지는 서울 편입 이전부터 지정돼 있었다. 그 사이에 끼인 땅이 강동구에서 가장 싼 땅이었고, 길도 나지 않아 대한주택공사가 한 번에 매입할 수 있었다는 답이었다.

송파, 모래 위의 도시
조선 후기의 송파는 상업도시였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배로 올라온 물산이 광나루와 송파나루에서 풀렸고 서울의 동쪽 관문이 됐다. 조성룡의 자료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직전까지 객주집이 270호에 이르는 손꼽히는 장터였다고 적혀 있다.
그 대홍수가 다음 장면이다. 이듬해 제작된 경성시 수재도를 보면 한강을 중심으로 내사산과 외사산 사이가 모두 하얗게 잠겨 있다. 산이 많고 물이 가운데로 모이는 지형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잠실종합운동장이 있는 일대가 통째로 잠긴 해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그 땅에는 삼성산이라 불린 언덕과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있었다. 두 토성의 발굴이 본격화한 것은 올림픽을 준비하며 일대를 파헤치는 과정에서였다. 1984년 올림픽공원 공사 도중 몽촌토성 유적이 드러났다. 풍납토성은 이미 집이 들어차 있었고 몽촌토성 위에는 체조경기장과 펜싱경기장, 수영장이 올라갔다. 집을 많이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가 사업이었고 그 사업으로 서울이 파괴됐다는 것이 조성룡의 표현이다.
20여 년 사이에 이 지역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1983년 서울시 현상공모로 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아파트를 설계하고 지금도 그곳에 사는 그의 평가다.
그 단지에서 그가 시도한 것은 분명하다. 주차 동선과 보행 동선을 분리하고 필로티로 보행 공간을 연속시켰다. 마을마당에서 단지상가를 거쳐 공원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고, 세 개 층 단위로 높이를 달리해 마당에 햇빛이 들게 했다. 단지 안 지하주차장은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둔촌주공이 지하주차장 없이 하루 100호씩 올리던 시기에서 몇 해 뒤의 일이다.

그래서 그가 아쉬워한 것은 남은 것이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잠실에는 시장이 없다. 가락시장과 신천역 쪽 새마을시장 정도가 전부고 창문 하나 없는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몽촌토성 주차장 부지에 지은 소마미술관이 강남 지역의 유일한 미술관이다.
“백화점만 있고 시장 없고 도서관 없고 책방 없고. 이게 도시입니까?” ― 조성룡
마지막은 잠실주공 5단지였다. 옛 부리도 자리다. 2017년 주거복합시설 국제설계공모와 2018년 재건축 국제지명설계공모가 잇따라 열렸다. 길가 구간을 준주거로 풀어 그 자리가 지역의 중심이 되게 하자는 조건이 걸렸고, 청년이 일하고 창업할 공간을 지하에 두고 광역환승센터와 엮는 안이 당선됐다. 주민 반발로 해약되고 재건축은 아직 시작되지 못했다.
“원 플러스 원이에요. 아파트 한 채를 하면 두 채를 가질 수 있다. 편의점에서 하던 말이 일상 용어가 돼버렸죠.” ― 조성룡

성동, 이제부터 만들어지는 도시
김인철이 성동구에 붙인 제목은 자연의 질서와 도시의 맥락을 회복해야 하는 성동구다. 발표는 지도 모양에서 시작했다. 행정구역 경계가 말 머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땅은 말과 인연이 깊다. 조선시대에 군마를 기르는 목장이 있었고 마장동이라는 지명과 축산시장이 그 흔적이다. 섬이 아닌데 뚝섬인 것은 한강이 범람할 때마다 그곳이 섬처럼 떠올랐기 때문이고, 연무장은 군사 사열과 훈련을 하던 자리다.
지형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평평하다. 한강이 중랑천과 청계천의 물길과 합류하는 지점에 퇴적으로 만들어진 땅이기 때문이다. 해발 100m를 넘지 않아 치수가 정비되기 전에는 걸핏하면 잠겼다. 사람이 정주하기 좋은 땅은 아니었다. 대신 남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낮은 산들이 구릉을 이룬다. 그래서 성동구는 한강을 향해 열린 땅이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공장이 들어선 것은 근대화기였다. 신발 공장과 자동차 공업사, 철물점이 밀집한 공업지대가 됐다. 2000년대 이후 그 시설들이 밀려나면서 공장의 높은 층고와 단순한 구조가 카페와 전시장이 됐다. 지금의 연무장길이다.
그가 감자도를 준비하며 확인한 것이 하나 있다. 성수동을 지나는 전철만 유일하게 고가로 놓였는데 그 고가 아래가 하천이었다. 자연 하천이 아니라 인공 수로가. 목장 시절 건국대학교 교정의 연못까지 중랑천 물을 끌어가던 수로를 복개하고 그 위에 철도를 얹었다. 지금 그 고가철도는 연무장길의 번화함이 자기 동네로 건너오지 못하게 막는 경계가 돼 있다.

성동구의 조건은 강남과의 거리로 설명했다. 포화에 이른 강남의 도시성이 동호대교와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전이되는 접점에 성동구가 있다는 것이다. 촉매는 서울숲이었다. 조선 왕실의 사냥터였고 1908년 서울에 상수도를 공급한 최초의 수원지였으며 경마장과 골프장을 거친 땅이 2005년 공원이 됐다.
지금 성동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작은 필지에 올라가는 건물들이다. 준공업지역이라 건폐율 60%에 용적률 400%가 기본인데 조건을 채우면 인센티브가 붙는다. 붉은 벽돌로 지으면 건폐율이 70%로 올라간다. 권장 용도를 넣거나 땅의 일부를 공개공지로 내놓으면 용적률이 480%가 되고, 공공시설을 제공하거나 지하철 연결통로를 만들면 800%까지 간다. 45평 땅에 주차 여섯 대만 확보하면 건물이 올라간다. 공장 용지는 지식산업센터와 코워킹 스페이스가 됐고, 성수 IT 산업·유통개발진흥지구를 준공업지역 전체로 넓히는 계획이 있다.
“좋은 결과들이 나오면 좋은데, 잘못하면 자칫 조잡한 붉은 벽돌 빌딩들이 여기저기 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게 됩니다.” ― 김인철
예정된 개발도 크다. 옛 삼표레미콘 부지에는 미래형 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내용은 주상복합이다. 성수 전략정비구역에는 한강변 아파트가 들어선다. 강북 도심과 강남이 재개발과 재건축을 두고 다투는 사이, 성동구는 이제부터 만들어지는 도시가 됐다. 그 풍경이 어떻게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아침마다 걱정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도시가 되었는가
건축가의 역할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아파트를 지으면 주거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여기는 기대 속에서 건축가가 도시에 대한 담론을 쥐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조성룡은 용어로 답했다. 대한주택공사의 영문 명칭은 하우징 코퍼레이션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우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일본은 1970년대에 집단주택, 1980년대에 집합주택이라는 말을 쓰다가 80년대 말에 하우징으로 바꿨다. 우리는 아직 공동주택에 머물러 있다.
“하우징은 집 자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땅을 만들고 계획하고 설계하고, 누가 대상인지 누구를 위해서 짓는 건지를 다 평가하는 겁니다.” ― 조성룡
영국 사람들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 주택을 두고 100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그게 싹 끊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법이 바뀌지 않는 이유로는 위계를 들었다. “전부 토목이 위로 올라가 있어요. 그 사람들이 기득권이고 절대 놓지 않는 거죠.” 그러면서 “제가 그걸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앞으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다 드러누워야 돼요”라며 “과장해서 얘기하면 이게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인철의 진단도 같은 쪽을 가리켰다. 공학 카르텔이 건축 정책과 국토 정책을 다 결정하고 있고 건축직은 국장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발표 끝에 전한 말도 그랬다. 한 철학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프리츠커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건축 문화에 대한 국민의 집단 지성이 형성돼 있지 않으니까 건물은 부동산, 건축가는 설계하는 기술자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조성룡의 자료 마지막 장에는 2024년 프리츠커상을 받은 야마모토 리켄이 지난 10월 4일 고시된 요코하마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거주는 인권이고 사람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말이 함께 적혀 있었다. 여든한 살이고, 2014년 세곡동 보금자리주택을 설계해 한국에도 집을 지은 건축가다. 그 장은 공공성과 민주적 방식의 실천을 적어둔 항목들 옆에 놓여 있었다.
김인철이 내놓은 답은 덴마크였다. 나라가 작아 건축과가 한 곳인데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은 설계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간다고 했다. 감각이 좋은 학생이 설계를 하고 활동적인 학생이 시공으로 간다는 이야기였다.
“건축은 좋은 건축가 한 사람이 있어서 좋은 건물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좋은 정책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 김인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