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태진 자료. 별도 첨부
[보도자료 밖의 책들] 매주 편집팀의 메일함에는 수많은 신간 소식이 쌓입니다. 때로는 저자의 정성 어린 메시지와 함께 증정본이 도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은 이의 마음과는 별개로 에디터로서 깊게 읽고 소개할 만한 책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지루한 영화도 있느냐는 질문에 “틀린 영화는 없다. 영화마다 옅은 진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에 깊이 동감합니다. 메일함에 당도한 책들 역시 저마다의 옅은 진심을 품고 있을 것이니까요. 다만 좋은 영화나 좋은 책은 가만히 앉아 있는 내 앞에 배달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봉작과 신간 사이에서 보석 같은 작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영화관으로, 그러니까 서점으로 직접 발길을 옮겨 구석구석 뒤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재는 매끄럽게 정제된 보도자료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드넓은 서가에서부터 동네 서점의 비좁은 길목까지, 에디터가 직접 발품을 팔아 선택한 ‘현장 기록’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많이 담기보다 오래 남을 책을 골라보겠습니다. 베스트셀러보다 지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품은 책을 살펴보려고요.
글 싣는 순서.
① 에디터가 선정한 책 큐레이션 – 사과의 건축, 목수의 연장,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② ‘공간은 자유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한가한 질문하기 –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③ 끝내 사람을 향해 기울어진 건축 – 정재은 영화감독 에세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첫인상
그동안 정기용 건축가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린 시절 MBC 프로그램 ‘느낌표 – 기적의 도서관’에 출연한 건축가 아저씨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연출한 정재은 감독의 기록이다. 감독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했고 여러 인터뷰 프로젝트를 통해 오랫동안 건축을 관찰해 왔다.
영화는 대장암 후유증으로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 정기용을 약 1년간 따르며 기록한다. 그리고 그가 추구한 인간과 자연, 건축의 감응에 주목한다.
책은 영상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 영화의 메이킹필름과 같다. 책에는 ‘편집의 예술’이라 불리는 다큐멘터리 특유의 상황과 렌즈 뒤편에서 발견한 감독의 감정과 망설임이 담겨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아도 한 편의 영화를 읽은 것 같다. 어쩌면 편집의 또 다른 편집인 셈이다.

거울이 된 시간
“거울이 나를 따라다니는 건가? 내가 보여주기 싫은 것도 보고야 마는 거울이?”
나는 이제 막 건축가 정기용을 만나 당신을 주인공으로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을 한 참이었다. 거울이라. 그의 물음이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2009년 겨울, 그렇게 나는 거울이 되었다. –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중에서
영상 속 정기용의 긴 머리칼은 화가를 연상시켰다. 굳게 다문 입술은 맹렬함을 머금고 있었다. 실테 안경 너머의 눈에는 사물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건축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 작품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활용해 삼청동 사무실의 번다한 풍경, 땅에 낮게 엎드린 자두나무 집, 2010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감응(感應), 정기용 건축전’ 준비 모습 등을 담았다.
그의 건축 서사의 방점인 무주 공공건축 이야기 역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정기용은 공공건축에 있어서 사용자의 의견과 편의성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디자인적 고찰로 풀어낸 공간 해석보다는 사용자와 공간, 자연의 연결을 구현하려는 의도로 비춰진다. 스스로를 장돌뱅이라 칭한 그는 사용자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자 한다. 흙건축협회 활동은 그의 소박함을 반영한다.

무주 공공건축의 이면
그는 1996년부터 10년간 무주군에 30여 개의 공공건축물을 설계했다. 등나무 운동장, 안성면 주민자치센터, 진도리 마을회관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무주군으로부터 최소한의 설계비만 받았다. 어쩌면 그에게 건축은 세상을 상대로 하는 봉사활동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공공건축의 이상은 절차와 관습의 무게 앞에서 한계를 보인다. 무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무실에는 10억 원이 넘는 적자가 남았다고 한다. 그는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을 알면서도 설계를 해나갔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10억 원의 빚보다 무주에 건축 씨앗을 심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과 영화에는 무주 공공건축에 대한 행정의 일방적인 개보수가 벌어진다. 그는 무주 건축 답사에서 등나무 운동장과 면사무소에 설치된 태양광 집열판을 두고 탄식한다.
“잘해 줘도 가꾸질 못하고 망치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는 어떻게 여기다 이거를 지을 생각을 했나.”
정기용은 무주의 담당 공무원을 앞에두고 아픈 몸을 짜내며 쉰 목소리로 힘겹게 항의한다. 감독은 공무원들의 난감한 모습을 보며 갈등의 조정자가 된다. 그도 무주를 이렇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감독의 감응이 동인이었다.


삶의 궤적이 남긴 부산물
공공 건축은 막대한 공공자원이 투입되는 만큼 형태와 기능의 당위성과 도덕적 잣대가 엄격하게 요구된다. 그래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건축가는 종종 건축보다 더 커다란 에너지에 의해 소외되곤 한다.
영화는 당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현상 설계를 둘러싼 건축가들의 의견을 통해 국내 공공건축이 지양해야 할 도시 모델을 꼬집는다. 도시의 자부심보다 스타 건축가의 상징성을 위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영화 후반, 정기용이 칠판에 적어 내려간 문장이 오래 남는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

한편 그의 건축이 개념적 완성도나 조형적 밀도에서는 다소 미흡했다는 주변 건축가들의 평가 역시 의미심장하다. 결국 생각을 형태로 증명하는 일 또한 건축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직원들이 이동식 침대를 메고 산을 오르는 순간이다. 정기용은 침대에 누운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산중턱에 도착한 그는 하늘과 바람, 나무,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이폰으로 촬영된 흐릿한 화면은 오히려 그 순간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정기용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자신만의 옳음을 붙들고 끝까지 살아보려 했던 한 사람의 궤적이었다. 지금도 그의 궤도가 남긴 흔적은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삶 속에서 천천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도서명.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저자.
정재은
출판사.
플레인아카데미
출간일.
2025년 08월 30일
분량 및 판형.
232p, 120×171mm
정가.
2만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