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스럽다는 착각

[환상 너머의 치앙마이] ③ ‘캄 빌리지’에서 발견한 문화의 중첩
글 & 사진. 치앙마이(태국)=김태진 에디터

 

[환상 너머의 치앙마이] 우리는 오랫동안 치앙마이를 저렴한 휴양지나 디지털 노마드의 낙원으로만 기억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현대적인 건축과 공간들은 태국 사회의 복합적인 구조와 깊은 역사를 정직하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세 곳의 공간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태국의 현재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여정은 ‘태국창의디자인센터(TCDC) 치앙마이’입니다. 일찍이 형성된 디지털 노마드 생태계를 체험합니다. 두 번째는 ‘마이암MAIIAM 현대미술관’입니다. 리노베이션 건축이 보여주는 매끈한 현대성과 사립 컬렉션이 지닌 특수성, 나아가 이면에 자리한 질문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캄 빌리지Kalm Village’를 통해 태국 디자인의 뿌리를 탐색합니다.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지배 계층의 고급스러운 미감으로 자리 잡았던 중국식 건축 양식이 현대의 로컬리티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보기 좋은 장소를 나열하기보다 공간의 파사드 뒤에 숨겨진 시스템과 권력,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이 독자 여러분에게 태국이라는 나라를 한 층 더 깊게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일과 여행의 흐릿한 경계, 치앙마이라는 유목 생태계 — TCDC 치앙마이
② 반사광 경계에서 마주한 치앙마이 — 마이암 현대미술관의 유리 타일이 비추는 것, 감추는 것
③ 태국스럽다는 착각 — 치앙마이 캄 빌리지에서 발견한 문화의 중첩


 

가파른 전통 란나 양식보다 절제된 각도로 정리된 지붕 능선. 중국 사극에서 보던 지붕 능선이 떠올라 이곳이 태국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BRIQUE Magazine

 

로컬리티는 정말 고유한 것일까

한국과 중국,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다. 생활 양식과 디자인에서도 공통된 결이 많다. 태국을 중심으로 한 미얀마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역시 유사한 로컬리티를 공유한다.

태국의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쪽으로는 미얀마,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맞닿아 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중국 운남성과도 가깝다. 이 지역들은 오랜 시간 전쟁을 겪었지만 동시에 활발한 무역과 문화 교류를 이어왔다.

태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남쪽의 아유타야 왕국과 북쪽의 란나 왕국이 오랜 시간 지역을 지배했다. 한반도가 백제와 신라로 나뉘어 있던 시기와도 닮아 있다.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 문화는 타이 루(Tai Lue) 계열을 뿌리로 둔다. 이들은 수백 년 전 중국 남부에서 남하해 이 지역에 정착한 집단이다.

이동과 정착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문화는 고정되기보다 끊임없이 변형되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로컬’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과연 단일한 지역과 고유한 문화라는 것이 존재할까.

 

캄 빌리지에서는 공예 전시와 워크숍이 수시로 열린다. 건축은 고정된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갱신된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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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안에 겹쳐진 문화의 층위

치앙마이 올드타운의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캄 빌리지는 한눈에 ‘로컬’처럼 보인다. 붉은 진흙 기와지붕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읽힌다. 자연스럽게 ‘태국스럽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다른 장면이 드러난다. 넓게 열린 중정과 지붕의 능선은 치앙마이에서 흔히 보던 형식과는 결이 달랐다. 중국의 사극에서 자주 보던 지붕의 능선이었다. 태국 북부의 민족이 중국에서 넘어왔으니 그들의 건축적 문법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캄 빌리지 내부에서는 지역 장인과 협업한 전시와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전통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며 다시 해석된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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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과 중정으로 이어진 동선 사이사이에는 소규모 전시와 상점이 자리한다. 방문자는 자연스럽게 공간을 걷는 동시에 태국의 공예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BRIQUE Magazine

 

건축과 인테리어 전반에는 현대적인 아시아 디자인과 태국의 전통 미감이 함께 놓여 있다. 캄 빌리지는 두 개의 중정을 중심으로 아홉 채의 건물이 배치된 구조다. 모든 건물은 주변 맥락을 고려해 2~3층 높이로 제한되었다. 짙은 회색 벽돌과 업사이클링된 티크 고재가 주요 재료로 사용했다. 특히 목재는 오래된 가옥을 해체해 얻은 부재를 다시 조립해 완성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설계한 어반 아키텍츠Urban Architects는 타이 루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배치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마을’에 가깝게 계획했다. 골목과 중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치앙마이 올드타운의 도시 조직을 대지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의도했다. 지붕의 각도와 층위 역시 전통 란나 양식보다 더 단단하고 직선적인 인상을 준다.

구조 디테일에서도 흥미로운 선택이 드러난다. 기둥과 보가 만나는 결구는 정교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데, 현장에서 장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공간을 조정해 나갔다고 한다. 목수들은 현장에서 조정해나가며 자신들의 기술을 공간에 반영했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적 선택은 역사적 맥락과도 연결된다. 란나 왕국 시절 중국은 중요한 교역의 중심이었다. 비단과 자기, 공예 기술은 물질의 이동을 넘어 하나의 미감으로 함께 유입되었다. 그 미감은 그대로 복제되지 않고 지역의 조건 속에서 다시 번역되었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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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 빌리지에 사용된 목재는 오래된 가옥을 해체해 얻은 티크 고재다.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재료가 새로운 공간의 일부로 다시 조립되었다. ©BRIQUE Magazine

 

다시 묻는 로컬리티

문화는 이동한다. 그리고 변형된다. 우리가 오늘날 ‘태국적’이라고 부르는 이미지는 단일한 기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혼종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캄 빌리지는 그 과정을 하나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북방에서 내려온 건축 문법과 치앙마이의 기후와 재료, 그리고 교역을 통해 축적된 감각이 겹겹이 쌓여 있다.

로컬리티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이동과 교차의 결과물 아닐까.

결국 로컬이란 그 지역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만들어낸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 캄 빌리지는 그 진행 중인 시간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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