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환상, 그리고 스캔되는 실존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⑤ 공간 이후의 건축
글. 김성아  에디터. 정지연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기술은 최적화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만듭니다. AI는 가능성이 높은 선택을 고르고, 인간은 가능성이 없어도 마음이 끌리는 길을 택합니다. 이같은 비합리성은 결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이 감정적 필연 위에서 태어나기에 기술의 시대에도 건축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재는 건축을 둘러싼 기술적 변화의 과정에서 건축가라는 존재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 지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도구를 넘어 사유로 – 건축가의 새로운 손
② 창조자에서 조율자로 – 건축가의 초상
③ 보이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공간으로 – 가상성 시대의 건축가
④ 세계를 감당할 방식을 작곡하는 건축가 – 저자성(authorship)의 재배치
⑤ 흐름과 환상, 그리고 스캔되는 실존 – 공간 이후의 건축 

 

“여러 층에 걸쳐 실내의 벽들이 보였다. 그 벽들에는 아직도 벽지가 붙어 있었고, 여기저기 바닥이나 천장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중략) 그곳에는 정오의 시간들과 질병들, 인간의 숨결과 수년 된 땀의 흔적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끈질긴, 침묵하는, 그리하여 결코 끝까지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보았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중

 

1910년 파리의 거리에서 릴케(Rainer Maria Rilke)가 목격한 것은 건물의 파괴가 아니라, 공간이 머금고 있던 시간의 ‘배설’이었다. 옆집이 헐려 나가며 수십 년간 은폐되었던 안쪽 벽이 드러났을 때, 그곳에는 시멘트의 물성이 아니라 그 속을 채웠던 인간들의 축축한 생애가 화석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릴케에게 건축은 벽과 지붕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숨결과 땀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기억의 지층’이었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릴케가 목격한 그 생생한 노출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다만 이제는 물리적인 망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와 알고리즘의 세밀한 칼날을 통해서다. 현대의 기술은 공간을 파괴하지 않고도 그 내부를 낱낱이 훑어내며,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던 형이상학적 성소의 껍질을 벗겨낸다.

건축의 역사는 사실 ‘공간(Space)’이라는 형이상학적 범주를 물리적 실체로 포획하려 했던 처절한 점유의 기록이다. 비트루비우스가 ‘견고함(Firmitas)’을 천명한 이래, 건축은 늘 벽과 바닥이라는 물리적 계통으로 안팎을 가르고 그 사이의 공백을 인간의 목적에 귀속시키는 권위적 질서였다. 근대 모더니즘의 ‘기능적 분할’ 아래 공간은 용도에 맞춰 엄격히 구획되었고, 인간은 규격화된 상자 속에서 효율을 수행하는 부속품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21세기 디지털 네트워크와 고도화된 연산 기술은 이 견고한 도그마를 근본부터 침식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물리적 장소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자의 지각과 실시간으로 공명하며, 데이터의 밀도에 의해 일상의 좌표를 재설정한다. 여기서 공간은 더 이상 측정 가능한 기하학적 부피가 아니라, 접속의 강도와 신호의 순도에 의해 매 순간 재정의되는 인터페이스(Interface)로 전이된다. 이것이 우리가 대면한 ‘공간 이후(Post-Space)’의 풍경이다. 공간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정보로 가득 차 있으며, 기계적 지각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연산의 장(Field)으로 변모했다.

공간이 인터페이스로 변모했다는 것은, 이제 공간이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연산’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는 팔란티어(Palantir)와 같은 데이터 분석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온톨로지(Ontology) 기술’은 현대 건축과 공간 비즈니스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데이터 공학에서 온톨로지란 ‘개념 간의 관계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의한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이나 미국-이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팔란티어의 시스템은 위성 지도 데이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정 건물의 에너지 사용량, 주변 차량의 이동 경로, 지하 시설의 진동 패턴이라는 파편화된 데이터를 ‘공간 온톨로지’를 통해 결합한다.

 

“이 창고는 평범한 건물이 아니라, 500m 이내의 통신망과 연결된 ‘물류 허브’이며, 현재 내부 온도가 상승하고 있는 ‘활동 상태’이다.”

 

기계는 공간에 의미(Semantics)를 부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AI 에이전트는 타격 목표를 설정하거나 방어 전략을 수립한다. 이러한 기술은 현대 공간 비즈니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타벅스가 매장을 낼 때, 그들은 경험적으로 목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해당 좌표를 둘러싼 유동 인구의 흐름, 소비 성향, 주변 건물과의 연결성을 온톨로지화하여 ‘성공 확률’이라는 데이터 값으로 변환한다. 이제 공간의 가치는 평당 가격이 아니라, 그 공간이 얼마나 많은 ‘의미 데이터’를 생산하고 연결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2026년 미국-이란 전쟁은 AI가 전쟁 공간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작전을 실행한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미지=Gemini 활용 필자 제작>

 

영화 ‘매트릭스(1999)’의 센티넬은 음파와 자기장을 통해 공간을 감각한다. 이는 공간이 더 이상 인간 중심적으로 인식되는 장이 아닐 수 있음을 드러내는 철학적 전환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 거대 주거 단지의 벽을 타고 넘는 작은 구형 로봇 ‘스파이더’의 침입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건축적 관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를 의미한다.

이 군집 로봇들은 인간처럼 문을 열고 복도를 걷거나 시각적 질서를 감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건물을 ‘통과’하는 대신 건물을 ‘스캔’한다. 스파이더들에게 벽은 물리적 장벽이 아니라, 온도와 진동, 전자기 신호가 흐르는 ‘데이터 표면’이다. 공간은 좌표와 열신호의 집합체로 해체되며, 건축은 형태(Form)가 아니라 탐색 가능한 ‘센서적 사건의 장’으로 재정의된다. 과거의 건물은 사람이 길을 찾기 위해 설계되었다. 평면도는 인간의 보행과 시선을 가이드하는 지도였다. 그러나 이제 건물은 기계가 정보를 추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의 로봇 ‘스파이더’ <이미지=영화공개자료>

 

이러한 변화는 현대 건축의 설계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BIM과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은 더 이상 도면 제작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거주를 위한 물리적 구조인 동시에, 기계적 알고리즘이 즉각적으로 검색하고 연산할 수 있는 ‘공간 데이터베이스’ 그 자체다. 과거의 디지털 도면에서 ‘문’은 단순히 선 두 개로 그려진 기호였지만, 공간 온톨로지가 적용된 오늘날의 건축 데이터베이스에서 ‘문’은 “통과할 수 있음”, “시선을 차단함”, “열릴 때 에너지가 손실됨”과 같은 수많은 의미적 속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기계는 이제 건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의미들의 연결망으로 ‘읽는다’. 건축가는 이제 벽을 세우는 대신, 기계적 에이전트들이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스캔 가능한 환경(Investigable Environment)’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설계의 중심이 ‘인간의 시선’에서 ‘센서의 해상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의 소멸은 시간의 적층 방식마저 바꾸어 놓는다. 영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에서 드론들이 외계 유적을 스캔하며 내부 구조를 3D로 재구성하고 과거의 사건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 유적은 돌덩이가 아니라 (실제로는 우주선), 기술적 개입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실시간으로 배설하는 ‘기억의 저장체’가 된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는 기술을 인간 기억의 외재화, 즉 ‘기억 보철(Mnemotechnics)’*로 보았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 저, 김지현 , 박성우 , 조형준 역. 자동화 사회 1: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 새물결. 2019

우리가 기억을 뇌 대신 스마트폰에 저장하듯, 건축 역시 인간의 경험을 물리적 구조물 바깥의 데이터 서버에 저장하는 ‘보철물’이 된다는 뜻이다. 물리적 실체가 소멸되는 디지털 트윈 환경에서의 건축은 이제 사건의 로그 파일(Log file)로 기능한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에서 사건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하는 장면 <이미지=영화공개자료>

 

이러한 ‘시간의 공학’은 건물을 하나의 ‘살아있는 알고리즘’으로 만든다. 도시 전체를 디지털로 구현하여 일조량, 풍향, 보행자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버추얼 싱가포르(Virtual Singapore)’는 성능 시뮬레이션을 넘어, 특정 건물이 지어졌을 때의 미래를 미리 계산하는 ‘예지 장치’로 작동한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행동을 규정하는 확률적 근거로 치환된다.

건축가는 이제 어떤 공간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데이터가 인간의 미래를 규정하도록 허용할 것인가’라는 시간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와 함께 ‘장소의 공간’이 정보의 네트워크인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에 의해 잠식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뉴욕의 ‘더 셰드(The Shed)’는 4,000톤의 외피가 이동하며 사건에 반응하는 ‘동적 건축(Kinetic Architecture)’의 정점을 보여준다. 공간은 이제 고정된 부피가 아니라 접속의 강도에 의해 재정의되는 가변적 플랫폼이다.

 

더 셰드(The Shed), Diller + Scorpido Architects. <출처=https://en.wikiarquitectura.com/the-shed-diller-scofidio-renfro-new-york_06-2>

 

반면에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비판했던 ‘정크스페이스(Junkspace)’는 흐름의 효율성만을 위해 끝없이 확장되어 장소감을 말살한 공간들이다. 현대 건축가는 반응형 플랫폼을 설계하는 동시에, 정크스페이스라는 ‘의미의 사막’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기술이 공간을 데이터화할 때, 건축은 더욱 강력한 ‘환상’을 제조한다. 리차드 바그너(Richard Wagner)가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구축한 ‘환상적 심연(Mystic Abyss)’은 연주자의 노동을 은폐하여 공간을 신화적 환상으로 치환했다. 프라다 에피센터나 애플 스토어의 결벽증적 미니멀리즘은 복잡한 설비와 데이터 처리 과정을 완벽하게 은폐하여,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환상을 준다. 건축은 이제 형태를 짓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통제실에서 송출되는 ‘환상의 주파수’를 설계하는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프라다 에피센터 <출처=https://buro-os.com/projects/prada-epicenter-new-york>

 

공간 컴퓨팅 시대에 건축은 사용자의 시야에 어떤 정보를 배치하고 빛과 소리를 어떻게 변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감각 인터페이스의 설계’로 확장된다. ‘건축적 분위기’는 이제 디지털 파라미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조율될 수 있다. 이러한 ‘감각 인터페이스로서의 건축’에 대한 갈망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에서 선보인 필립스의 ‘전자 시(Poème électronique)’ 작업은 현대 디지털 건축의 진정한 조상이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엔지니어이자 작곡가인 이아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그리고 음악가 에드가 바레즈(Edgar Varèse)가 협력한 이 프로젝트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디어 재생기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크세나키스는 수학적 파라미터를 통해 파빌리온의 외형을 설계했고, 내부에서는 바레즈의 전자 음악과 함께 강렬한 빛의 연출이 펼쳐졌다. 당시 관객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소리와 빛이 공간을 ‘조각’하는 낯선 경험을 마주했다. 이는 현대의 가상현실(VR)이나 반응형 환경이 지향하는 ‘통합적 감각 공간’의 역사적 원형이다. 이 협업은 건축이 더 이상 벽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기술과 예술이 결합하여 인간의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 ‘전자적 공간’을 창조하는 일임을 증명했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에서 ‘전자 시(Poème électronique)’가 연출된 필립스 관 <이미지=archdaily>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HA)의 연구 그룹인 ZHA CODE가 주도하는 설계 실험은 이제 형태의 미학을 넘어 행동의 공학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유니티 ML-에이전트(Unity ML-Agents)와 같은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툴킷을 이용해 가상의 보행자들에게 공간을 ‘학습’시킨다.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제안한 ‘파라메트릭 세미올로지(Parametric Semiology)’ 이론에 따르면, 건축은 물리적인 외피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기호 체계**다.

**출처=https://patrikschumacher.com/operationalising-architectures-core-competency-agent-based-parametric-semiology/

이 시스템 안에서 가상의 에이전트들은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공간을 배회하며 ‘가시성 확보’나 ‘최단 경로 이동’과 같은 미션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알고리즘이 부여하는 보상(Reward) 점수를 획득한다. 시스템은 수만 번의 반복 시뮬레이션을 통해 에이전트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내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벽의 곡률이나 개구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수정하며 평면을 최적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승리 뒤에는 기묘한 공허함이 감돈다. 알고리즘이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효율을 극대화할수록, 공간은 마찰이 제거된 매끄러운 ‘무균실’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률적으로 가장 완벽한 경로를 제시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길 위에서 인간이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의 가능성은 거세된다. 인간의 실제 경험은 알고리즘의 보상 체계처럼 선형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아무리 정교한 AI라 해도, 오후의 햇살이 벽면의 미세한 마모를 비출 때 느껴지는 장소의 깊이나 계단 난간의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의 정적 같은 ‘감각의 잉여(Sensory Surplus)’는 포착하지 못한다. 기능 중심의 데이터 모델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연산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잡음(Noise)’으로 간주되어 삭제된다.

그러나 건축의 진짜 기억은 바로 그 쓸모없어 보이는 잡음의 지점에서 생겨난다. 알고리즘이 ‘신호(Signal)’라고 부르는 효율의 층위 너머, 시스템이 버리고 지나간 이 감각적 잉여들을 수집하여 다시 공간의 살결 속에 불어넣는 것. 데이터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고독과 영감의 자리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기술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건축가’라는 실존적 주체를 요청해야 하는 이유다. 건축가는 최적화된 경로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폐기한 잔해들 속에서 삶의 무늬를 직조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건축가의 역할은 알고리즘의 최적화 너머로 확장된다. AI가 기능적 데이터 모델로서 ‘잡음(Noise)’이라 간주하여 삭제해버리는 것들, 예를 들어 창문 너머로 부서지는 오후 4시의 빛의 각도, 거친 노출 콘크리트가 주는 차가운 촉각, 혹은 아무런 목적 없이 놓인 벤치가 만드는 짧은 머뭇거림이야말로 인간이 그 공간을 ‘장소’로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건축가는 ‘경험의 시뮬레이터’여야 한다. 기능적으로 완벽한 동선 속에 의도적인 불편함을 배치하거나, 빛을 반사하고 흡수하는 물성(Materiality)의 대비를 통해 기계가 스캔할 수 없는 ‘정서적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물성은 단순히 재료의 선택이 아니라, 디지털의 매끄러움에 대항하는 인간적 저항의 표시다.

건축가는 데이터가 흐르는 파이프라인 위에 인간의 감각이 걸려 머물 수 있는 ‘걸림돌’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이 걸림돌들이 모여 비로소 공간은 기능적 데이터에서 실존적 경험으로 격상된다. 모든 것이 가상화될수록 우리는 실존의 흔적을 갈구한다. 왕슈(Wang Shu)는 폐기된 기와를 통해 장소의 기억을 되살리고,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는 건축의 절반을 거주자의 몫으로 비워둔다. 이는 기술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인간이 여전히 중력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질적인 재료가 만나는 경계면을 다루는 태도는 건축 디테일의 시작이자 끝이다. 돌과 금속, 유리와 콘크리트가 만나는 얇은 접점에서 건축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그러나 그 경계의 완성도는 도면의 선과 치수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손끝에 남는 암묵지로 존재하며, 설계 도면의 논리적 질서 바깥에서 형성된다. 도면은 선과 숫자로 세계를 정리한다. 그러나 건축의 감각은 그 체계 바깥에서 생겨난다. 재료가 서로 밀고 스치는 순간의 긴장, 빛이 표면을 타고 흐르며 드러내는 미묘한 깊이, 시간이 지나며 표면에 남는 마모와 흔적 같은 것들이다. 이런 요소들은 도면의 기호 체계에 쉽게 포획되지 않는다. 대개 그것은 명확한 도식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건축가의 사유가 스쳐 지나간 흔적으로만 남는다. 건축은 언제나 규정된 것과 규정되지 않는 것 사이에서 형성된다.

최근 건축 정보 모델링은 관계 모델을 넘어 온톨로지 기반 공간 모델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지식 구조 위에서 인공지능은 수많은 평면과 단면, 3차원 모델을 분석하며 공간 구성의 패턴을 추출하고, 기능적 배치나 동선을 자동으로 생성한다. 사용자의 이동 데이터와 체류 패턴을 결합해 특정 프로그램에 가장 효율적인 공간 구성을 계산하기도 한다. 건물은 점점 더 거대한 데이터 모델처럼 다루어진다. 동선은 최적화되고, 프로그램은 통계적으로 분석되며, 구조와 설비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조정된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점점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건축 공간의 핵심을 완전히 포착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건축에는 계산되지 않는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건축을 떠올려 보자.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 구성의 논리보다 재료가 시간 속에서 드러내는 감각이다. 벽돌 표면의 거칠기, 돌벽에 스며드는 습기,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빛의 밀도 같은 것들이다. 이런 요소들은 기능적 모델에서 거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각의 층이야말로 건축을 기억하게 만든다. 구마 겐코(Kuma Kenko)의 작업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건축은 종종 구조적으로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많은 재료의 층을 겹친다. 얇은 목재 루버, 반투명한 막, 반복되는 작은 구조체들.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제거해도 될 것 같은 요소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잉여가 공간의 리듬과 깊이를 만든다. 이러한 요소들은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쓸모가 없다. 건물의 프로그램을 더 합리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계산 모델이라면 가장 먼저 삭제될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건축의 기억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빛이 벽을 스치는 방식, 계단을 오르며 느끼는 리듬, 난간의 금속이 손바닥에 남기는 온도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기능이 아니라 경험의 잉여에 가깝다. 건축가는 바로 그 잉여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데이터 모델이 주목하는 것은 관계와 성능, 효율이다. 반면 건축가는 그 체계에서 빠져나온 것들을 바라본다. 계산이 제거한 잡음, 알고리즘이 무시한 미묘한 차이, 기능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의 여백들이다. 그러한 ‘잉여’야말로 건축의 감각이 스며드는 자리다.

그래서 건축 공간은 언제나 두 겹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다룰 수 있는 구조다. 동선, 면적, 프로그램, 구조와 설비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 위에 얇게 얹힌 감각의 층이다. 빛의 농도, 재료의 온도, 공간이 만들어내는 침묵 같은 것들이다. 인공지능은 첫 번째 구조를 점점 더 정교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구조는 여전히 인간의 감각에 의존한다. 모든 것이 계산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건축은 아직 계산되지 않는 것을 지키는 마지막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축가는 여전히 필요하다. 새로운 형태를 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알고리즘이 제거한 것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다. 계산은 언제나 불필요한 것을 지운다. 건축은 그 불필요한 것들 속에서 시작된다. 효율의 논리는 공간을 설명하지만 공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는 공간이 해체된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묻기 위해, 잠시 1717년 프랑스 궁정의 쳄발로 앞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의 ‘신비로운 바리케이드(Les Barricades Mystérieuses)’는 건축이 도달해야 할 ‘공간 이후’의 상태를 음악적으로 예언한다. 여기서 ‘바리케이드’는 장벽이 아니라, 겹겹의 음형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간섭, 즉 세계를 바라보는 ‘필터’다.
쿠프랭은 화음을 한꺼번에 누르는 대신, 잘게 쪼개어 시간의 허공에 흩뿌린다. 이 류트 스타일(style brisé)의 연주는 마치 건물을 수억 개의 점으로 분해하여 기록하는 라이다(LiDAR) 스캔의 ‘포인트 클라우드’를 닮았다. 쿠프랭이 소리의 입자로 음악의 질감을 짜 올렸듯, 현대 기술은 단단한 공간을 데이터의 파편으로 분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파편들이 겹겹이 쌓여 안개 같은 층을 이룰 때, 차가운 공간은 비로소 ‘신비로운’ 정서가 흐르는 장소로 변모한다. ‘신비로운 바리케이드’는 어딘가로 급히 나아가는 대신, 같은 자리를 맴돌며 그윽한 울림의 두께를 더해간다. 이는 현대 미니멀리즘 음악이나 최첨단 공간 기술이 꿈꾸는 ‘공기(대기)의 설계’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기계와 인공지능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다듬을 수는 있어도, 그 안에 깃든 ‘쓸쓸함’이나 ‘안도감’까지 빚어내지는 못한다. 유하니 팔라스마(Juhani Pallasmaa)가 말했듯 건축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몸 전체로 감각하는 ‘기억의 침전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공간을 점으로 쪼개어 분석할 때, 우리는 그 점들 사이의 여백에서 삶의 온기를 찾아내는 존재여야 한다.

***유하니 팔라스마 저, 김훈 역. 건축과 감각, 시공문화사, 2019

인공지능은 공간을 생성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그리움은 부재를 인식하는 인간만의 고통이자 축복이다. 어떤 공간을 간절히 그리워해 본 건축가만이 타인에게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장소를 지을 수 있다. 건축가는 기술이라는 매끄러운 바리케이드 사이사이에 ‘인간적 잉여’와 ‘기억의 틈새’를 남겨두어야 한다. 아마도 미래의 건축가는 설계자라기보다 편집자에 가까울 것이다. 알고리즘이 생성한 수많은 가능성들 속에서 삭제된 감각을 다시 찾아내고, 잉여로 남겨진 경험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어내는 사람이다. 기술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이 완전히 설명되는 순간, 건축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아마도 끝까지 남게 될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아직 공간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은가?”

 

이 연재의 시작에서 던졌던 질문에 이제 답할 수 있다. 공간은 데이터로 가득 차 있으며 기계에 의해 스캔되고 있다. 그러나 그 빽빽한 데이터의 바리케이드 속에서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매끄러운 연산의 결과물을 다시금 불완전한 신체의 경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네 번째 글에서 저자성이 재배치되었고, 다섯 번째에서는 공간 그 자체가 해체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해체된 잔해 위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주체, 즉 포스트휴먼 에이전시를 마주해야 한다. 기술은 우리를 가상으로 끌어올렸지만, 건축은 우리를 다시 그리움이 머무는 땅으로 불러내릴 것이다.

다음 회차인 ‘인간 이후의 건축 – 포스트휴먼의 거주와 새로운 지형학’에서 우리는 기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진정한 의미의 ‘장소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김성아 Sung-Ah Kim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건축 설계와 컴퓨팅을 접목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미국(Harvard University)과 스위스(ETH)를 오가며 1990년대에 무르익던 설계 자동화와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영화, 음악, 전쟁사와 지리, 언어 등의 잡학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건축(2021)’, ‘건축학과 교수의 클래식 음악 수첩(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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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해서 특별하다기보다는, 특별해야 해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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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없지만, 건축의 선은 남는다

[브리크 아카이브 큐레이션] ② 선으로 남은 건축, 드로잉 기록으로 이어지다

혼자면 상상, 함께면 일상, 살다 보면 문화

[브리크 세션: 박창현 건축가] 예산의 한계를 기획의 힘으로 돌파하는 ‘써드플레이스’의 주거 솔루션

건축 이어달리기

[사사로운 공공건축] ⑥ 임영배, 김광수&김아영, 임태희의 ‘광주시민회관’

땅속 깊이 새긴 순교의 그릇

[종교건축 산책] ① 서울시 중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태국스럽다는 착각

[환상 너머의 치앙마이] ③ ‘캄 빌리지’에서 발견한 문화의 중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