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하는 집

[스페이스 리그램] ⑩ '최초의 집'이 들려주는 집의 의미
최초의 집 ⓒ유어마인드
글. 김은산  자료. 유어마인드

 

‘기억극장(아트북스, 2017)’, ‘애완의 시대(문학동네, 2013)’, ‘비밀 많은 디자인씨(양철북, 2010)’ 등을 통해 사회적인 분석과 미학적인 시선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작업해온 김은산 작가가 ‘스페이스 리그램space regram’이라는 연재로 <브리크brique> 독자와 대화의 문을 엽니다. 인문학과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한 그는 인문서점 운영과 사회주택 기획, 지역 매체 창간 등을 통해 공간과 사람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한 컷의 사진을 매개로 도시인의 일상을 돌아보는 그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짧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기대합니다.

 

이 글을 끝으로 연재를 마치게 된다. 연재를 하는 동안 영감을 준 한 권의 책이 있다. 건축을 전공한 젊은 여성이 쓴 <최초의 집>이라는 책이다. 책에는 다음 같은 부제가 달려 있다. ‘열네 명이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의 풍경’. 제목 그대로 열네 명의 ‘최초의 집’에 관한 기억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작가는 그들이 구술하는 첫 번째 집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를 도면과 스케치로 옮겨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58년생부터 89년생까지 한 세대의 집에 관한 기억이 모아졌다.

 

최초의 집 ⓒ유어마인드

 

열네 명의 집은 작가의 말대로 건축가의 이상을 담은 대단한 건축물이 아니다. 허름한 농가주택부터 도시의 단독주택과 상가주택, 다가구 주택과 복도식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어디선가 마주쳤을 법한 집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집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집이 아니라 기억할 수 있는, 첫 번째 경험을 담은 장소였다. 원가족과의 모든 경험이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친구와 어울려 놀던 길과 동네가 그곳에 있었다. 무수히 바라보던 천장과 벽, 넘나들던 문턱, 열고 닫았던 창문과 방문, 오르내리던 계단과 대문은 말없이 그 시간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열네 명 중엔 태어나서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고 지금껏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집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첫 번째 집의 모든 것은 ‘원래 있던 것’이며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유년의 장소가 그렇듯이.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삶의 형태가 변하면서 집도 변화한다. 집의 변화에는 가족의 변화가 그 배경으로 자리한다. 사람들은 거실의 공간적 맥락을 통해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통주택에서 거실의 역할을 맡았던 것은 안방이었다. 양옥으로 단독주택이 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상을 펴고 밥을 먹는 일’이 가족의 일상이었다.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되면서 거실이라는 공간을 갖게 됐지만 그것을 어디에 배치할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사람들은 결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초기의 아파트 구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실이 없거나 있어도 방처럼 분리할 수 있도록 문을 달았다’고 회고한다. 거실이 집의 중심 공간으로 집 한가운데 자리 잡고 다른 방으로 가려면 거실을 통과해야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문은 사라졌지만 거실은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도 누구도 활용하지 않는 공간으로 남는 일이 많았다.

집집마다 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은 안방을 대체할 다른 공간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자 ‘안방’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가족, 어떤 관계성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표지인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경계와 심리적인 경계는 서로 맞물려 있고, 하나의 변화는 다른 하나의 변화로 이어지면서 두 경계를 통해 형성된 개인의 변화로 연결된다. 공간의 변화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개인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삿짐을 부려놓듯 지어진 도시의 집들은 정주의 시기를 거치며 불규칙 속에서 동네를 만들어 나갔다.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어진 집들이 모두 그러했다. 아파트는 그런 자연스런 무질서 속에 단일한 공간의 욕망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공간의 지형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집’은 모두 달랐지만, 이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은 그 지형에 갇힌 채 모두가 그것을 납득해야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최초의 집’이 부여한 공간에 대한 욕망을 따라 자신만의 방을 찾고 다른 사람의 방을 궁금해하면서 언젠가 자기만의 집을 꿈꿨던 그곳에 가까워진 사람도 있을테지만.

그러나 적어도 ‘최초의 집’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서사와 경험, 감정적인 애착이 담긴 이야기였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집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자신을 말해주고 있을까. ‘최초의 집’에서 우린 얼마나 멀어진 것일까.

‘집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방향이다.’ 여성주의 지리학자가 건네는 말이다. 우린 종종 집에 갇히거나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곳으로서 집. 나를 말하는 공간으로서 집, 우리 자신이 회복되기 위한 장소로 집을 말할 때 또 다른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s. 몇 달 전 <최초의 집>을 쓴 작가의 이른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 대한 글로 애도를 대신하고 싶다. 그리고 ‘최초의 집’으로 연결되는 또 한 사람, 엄마와 엄마의 집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최초의 집 ⓒ유어마인드

 

(이 글을 마지막으로 김은산 작가의 [스페이스 리그램] 연재는 마무리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와 애써주신 김 작가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브리크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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