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도 올드머니룩Old Money Look이 있을까?

[정해욱의 건축잡담] ⑩ 정통과 퓨전의 변증법에 관하여
©Haewook Jeong
글. 정해욱 미드데이 공동 대표 ·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콜라보레이터

 

요즘 패션 분야에서 ‘올드머니룩old money look’이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부자들의 차림새’라는 다소 노골적인 의미를 포함해서인지 패션을 잘 모르는 필자에게도 이 트렌드의 대두는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단어 자체가 시대의 보편적인 디자인 욕망과 모순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놓고 오래된 상류층을 표방하겠다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생각해 보면 ‘올드old’라는 말은 그 자체로 유행의 대척점에 있어야 하는데, 유행의 선두를 지칭하는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은 흥미로운 모순이다. 그간 진짜 올드머니들은 스스로 올드머니처럼 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반대의 트렌드라니. 이 흥미로운 지점은 패션에 국한시키기 보다는, 다른 디자인 분야와 건축까지 좀 더 넓게 포괄하여 살펴보아도 유의미할 수 있겠다 싶다.

이 단어를 좀 더 보편적으로 살펴보면, 올드머니라는 말에서는 쉽게 넘볼 수 없는 위엄 혹은 권위를 향한 노스텔지어가 느껴진다. 뉴머니가 아니라 올드머니인 것은 시대를 초월하고자 하는 바람 또는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싶은 마음의 반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올드머니는 단기간 내에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뉴머니는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만, 올드머니는 노력한다고 함부로 획득할 수 있는 지위의 것이 아니다. 올드머니 앞에서 뉴머니는 근본 없는 집단일 뿐이다. 그런 올드머니가 트렌드가 꿈꾸는 모습으로 대두한 것은, 역설적으로 한낱 가벼운 유행으로 곧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속성을 보장받아 오랫동안 권위를 보장받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만큼 이 시대의 권위가 쉽게 휘발되거나 희석되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유추해 보게 된다.

이같은 현상은 20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과잉 공급과 그로 인한 과잉 경쟁의 결과가 기저에 깔려 있는 듯하다. 20세기 후반에서 지금까지는 뉴머니가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시대였다. 동시에 새로움을 위시하는 아방가르드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하지만 새롭고 멋진 것에 대한 공급이 많으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별로 새롭지 않고 멋지지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존재감을 뽐내면 누구도 존재감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유로 새롭게 등장한 웬만한 것들로는 권위가 좀처럼 보장되지 않으니, 올드머니와 같이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품과 분위기에 기대보려는 것이 이 유행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올드머니룩을 두른 오래된 상류층의 권위 있는 기품과 같은 메타포는 사실 시민사회가 오랫동안 사회에서 걷어내기 위해 애쓰던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정치 사회적인 부분에서 탈권위脫權威를 위한 수많은 투쟁의 서사가 있다. 그 이면에는 독재 속의 질서보다는 자유로움 속의 혼돈을 택해온 역사가 자리한다. 하지만 이 역사를 모르는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혼돈의 무질서함을 개선해야 할 비판적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올드머니룩의 대두는 누군가에게는 시민사회에서 다시 귀족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변증법적 욕망이 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올드머니룩은 최근 어느 아파트의 분양 광고에서 등장했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와 같은 궤에 놓이게 된다.

 

도심의 신축 아파트 (사진은 칼럼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Haewook Jeong

 

올드머니룩은 요리에도 비유가 가능할 것 같다. 올드머니룩은 레시피로 비유하면 정통 레시피에 가까울 수 있다. 정통 레시피는 때로는 지루하지만 기준을 제시하고 퀄리티를 보장한다. 그 반대에는 퓨전 레시피가 있을 것이다. 퓨전 레시피는 새롭고 흥미롭지만 잘못되면 난해함과 조잡함만 남긴다. 전자는 질서를 세우는 역할이고, 후자는 지어진 질서를 뒤엎거나 변주하는 역할이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은, 경쟁적인 공급 과잉의 시대에서 상대와 달리지기 위한 목적으로 강박적인 퓨전 레시피(주로 뉴머니를 중심으로)가 지나치게 많이 쏟아졌다는 점이다. 어쩌면 올드머니를 추종하게 된 것은 열화된 퓨전 레시피가 세상에 뿌려 놓은 무질서한 조잡함에 신물이 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은 시각적 또는 형식적 새로움을 향한 혁신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대부분의 현대 디자인 분야가 당연하게 추구해 온 것들과 정면으로 대치한다.

최근 자동차 디자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다. 최근 자동차 디자인의 흐름을 보면, 클래식한 디자인이 되레 힙하게 대접받는다. 요즘 세대들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동차는 직각 형태의 정통 오프로더off-loader다. ‘영 타이머’라는 이름으로 레트로 유행에 선택받는 모델들도 모두 쿠페로서 혹은 세단으로서의 유형적 특징이 시각적으로 아주 분명한 모델들이다. 이것은 해당 카테고리의 원형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원형의 스테레오 타입을 시각적으로 강화하는 지점에서 각진 형태가 더 사랑받기도 한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향수가 유형학적 원형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분명한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쏟아지는 모델은 혁신성이라는 기치 아래 유형학적 원형에서 어떻게든 탈주하려 하는 크로스오버 디자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성의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디자인의 맹목적 추구를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도심의 오래된 아파트 (사진은 칼럼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Haewook Jeong

 

사실 건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건축에서도 정통 레시피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전주의적이거나 혹은 건물의 유형학적 원형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질서 있으면서도 약간은 고리타분한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이러한 건물은 잘 탄생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런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반대로 퓨전 레시피는 아주 흔하다. 주변에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을 보면 뭐라도 소위 디자인 요소를 하나 더 넣어서 나름의 개성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공과 민간을 불문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구난방으로 구멍을 뚫거나 덩어리를 엇갈리게 쌓거나 하는 방식으로 불규칙적 조형의 건물 스타일을 아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지금까지 지어진 수많은 못생긴 공공청사들과, 현상설계에서 숱하게 쏟아지는 정체 모를 조형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디자인이란 뭔가 다르고 새로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대개 이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으면 형태적 새로움과 형태적 복잡함을 동의어로 간주한다. 반대로 질서 정연한 대상의 반복은 지겨움을 내포하기에 금기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것은 창의 혹은 혁신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디자인은 형태적 요란함은 있어도 기품 있는 분위기는 없다. 물론 이는 서로 다른 생각의 갈래라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충동 때문에 퀄리티가 떨어질 경우인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설픈 퓨전은 조잡함만 남긴다. 대개 이런 경우의 디자인은 건물의 유형적 질서를 망쳐버린다.

우리나라의 아파트의 외관 디자인은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건물 동의 머리 높이까지 줄 맞춰 질서 있게 도열한 아파트 디자인은 도시경관을 망치는 흉물처럼 간주되었다. 아마도 열화된 정통 레시피에 의해 과잉으로 쏟아진 고리타분함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을 주입하고자 조례의 제정부터 심의 기준 강화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중구난방 높이와 난잡한 외부 마감의 신축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오히려 정신이 사나워진다. 차라리 줄 맞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느낄 수 있던 편안함이 그리워진다. 지난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압구정 아파트 단지 재건축에서도 제출된 그 어떤 안보다 현재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요즘의 건축 디자인 흐름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물론 거주자가 노후한 아파트에서 겪는 불편함은 또 다른 문제다).

이같은 흐름은 건축 분야에서 나타나는 올드머니룩의 전조증상일지도 모른다. 거주의 불편함이 심각하지 않다는 가정 아래, 한강 변의 비싼 신축 아파트보다 부유한 동네의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더 고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부유했던 과거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난잡한 디자인과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임대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화려하고 복잡한 신축 근생 건물보다 정직하게 지어진 오래된 상가에 가게나 사무실을 여는 것이 더 힙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이 경우 ‘올드’에는 방점이 찍혀도 ‘머니’에는 방점이 없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강박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한 대부분의 디자인이 다음 세대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도시가 너저분해져 갈수록 사람들은 차라리 근본 있는 질서를 회복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올드머니룩은 조만간 건축 공간에도 주요한 경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최고의 이상적인 대안이라고는 단정짓긴 어렵지만 말이다.

 

도심의 신축 아파트 (사진은 칼럼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Haewook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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