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통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

[Archur의 낯선 여행] ③ 카를로 스카르파와 마리오 보타의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철문과 다리 ⓒarchur
글 & 사진. 스페이스 도슨트 방승환

 

‘Archur’ 라는 필명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도시와 공간을 안내하는 방승환 작가가 <브리크brique> 독자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시지만 그 안에 낯선 장소,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업들을 소개해 새로운 영감을 드리려 합니다.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소개와, 현재에 이르게 된 이야기, 그리고 환경적 맥락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Archur와 함께 이색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보시죠.

 

한 해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하지만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 성당Chiesa Parrocchiale di Santa Maria Formosa이 있는 그랜드 카날Grand Canal 동쪽은 관광객보다 베니스 시민들이 더 많은 동네다. 분홍색 외관의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The Querini Stampalia Palace’은 성당이 있는 광장에 면해 있다. 베니스 내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렇듯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도 겉과 속이 다르다. 베니스는 도시의 옛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 외관 변경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베니스 사람들은 외관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내부만 리노베이션해서 사용하고 있다.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도 16세기에 지어졌지만 내부는 몇 차례에 걸쳐 리노베이션 됐다.

저택을 소유했던 퀘리니 스탐팔리아 가문은 베니스가 처음 형성될 때 정착했던 가문 중 하나다. 13세기에는 도시에서 가장 부유했지만 피에트로 그라데니고Pietro Gradenigo 총독의 독단적인 운영에 반대하다 정치적 활동을 제한 당하기도 했다.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었던 지오바니 퀘리니Giovanni Querini는 선대들의 수집품을 관리하는 일에 전념했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 마리아 리포마노Maria Lippomano가 가지고 있었던 책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죽기 전 가문의 재산이 학문 연구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재단을 설립해 줄 것을 시에 청원했다. 현재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이 저택 내 미술관을 비롯해 도서관, 기록보관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의 철문과 다리 ⓒarchur

 

1949년 저택의 일부를 리노베이션하기 위해 이탈리아 예술사학자이자 재단의 디렉터였던 주세페 마자리올Giuseppe Mazzariol이 감독으로 선임됐다. 그런데 그는 1층에 전시 및 회의공간을 배치하는 계획에 반대했다. 이유는 겨울철에 해수면이 상승하는 아쿠아 알타Acqua Alta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로 리노베이션은 결국 10년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리노베이션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마자리올의 동료였던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다. 스카르파는 마자리올의 걱정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더 염려할 만큼 과감한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저택 앞을 지나는 수로를 아예 1층 현관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물이 통과할 수 있는 철문과 섬처럼 생긴 계단을 설치했다. 철문은 동양적인 느낌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설계돼 있는데, 실제 스카르파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생을 마감한 곳도 일본 센다이였다. 계단은 접안 시설이 되기도 하고 수공간의 조경 요소가 되기도 한다. 계단과 연결되는 바닥 옆에는 물이 넘치지 않도록 난간이 설치돼 있는데, 만약 난간 높이만큼 물이 차오르면 마치 곤돌라처럼 물보다 낮은 높이에서 현관을 이동하는 생경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스카르파는 베니스의 바닷물이 차오르는 현상을 겨울이 오는 징후로 생각했고 이런 변화를 현관에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수로의 물을 현관으로 끌어들이고 설치한 계단 ⓒarchur
해수면 상승을 대비해 난간을 설치한 현관 바닥 ⓒarchur
해수면 상승을 고려하여 단차를 두고 난간을 설치한 현관 바닥 ⓒarchur

 

물은 뒷마당에서도 주요한 소재다. 뒷마당에서 물은 사각형의 수조와 원형의 작은 구리 물쟁반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수로를 따라 흐른다. 어디에서나 물을 접할 수 있는 베니스지만 교묘하게 연출된 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사각형 수조와 콘크리트 미로가 설치된 뒷마당 ⓒarchur
뒷마당에 설치된 원형의 구리 물쟁반 ⓒarchur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저택 앞에 설치된 계단도 스카르파의 작업이다. 기존 출입구는 건물 서쪽을 지나는 좁은 골목길을 향해 나 있었는데, 스카르파는 기존 창문을 헐고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설치했다. 계단은 광장 부분의 두 단만 이스트리아 석재(Istrian stone)가 사용됐을 뿐 나머지는 철과 낙엽송 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베니스의 수많은 다리 중 가장 가벼워 보인다. 이 외에도 무분별하게 설치된 기둥과 벽체를 말끔하게 철거한 주 전시실, 난방장치를 가리는 벽체 처리, 트래버틴travertine으로 만들어진 문, 기존 계단 위에 판(plate)만 얹은 계단 등에서 카를로 스카르파 특유의 감각적인 재료 사용과 창의적인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무분별하게 설치된 기둥과 벽체를 말끔하게 철거한 주 전시실 ⓒarchur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저택의 다리 ⓒarchur

 

스카르파의 작업이 있고 31년이 지난 1994년 재단은 기존 저택에 인접한 크림색 외관의 건물을 매입했다. 그리고 스카르파와 마자리올의 제자였던 마리오 보타Mario Botta에게 리노베이션 설계를 맡겼다. 보타에게 이곳은 스승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베니스 건축대학에 다닐 때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20년간 심지어 설계비도 받지 않고 세 차례에 걸쳐 작업에 참여했다. 가장 먼저 스승의 작업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스카르파가 고려하지 않았던 기능을 자신이 설계한 건물 1층 현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승이 설계한 철문과 비슷하게 기하학적 문양으로 된 철문과 창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보타의 철문과 창문은 동양적 느낌이 나는 스카르파의 것과 달리 보타 특유의 모던함이 느껴진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현관과 철문 ⓒarchur
마리오 보타의 조형성과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는 현관 계단 ⓒarchur

 

2013년 마지막 작업 때 보타는 스카르파가 설계한 다리를 대신할 새로운 다리를 설계했다. 기존 난간을 두고 계단만 스승이 사용했던 이스트리아 석재를 사용해 스승이 했듯이 기존 계단 위에 판을 얹었다. 특이하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한 단만 양쪽으로 길게 늘리고 끝에 벤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Z’자로 접었다. 이외에도 흑백대비를 이루는 철재와 석재가 함께 쓰인 현관과 마자리올 홀Mazzariol Hall, 기하학적 패턴으로 설계된 현관의 붉은색 계단, 그리고 여기에 회색 철제가 가미된 계단실과 엘리베이터 홀 등에서 마리오 보타 특유의 엄정한 재료 사용과 절제된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벤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끝을 Z자로 접은 다리 첫 단 ⓒarchur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다리 ⓒarchur

 

보타의 건축에서는 스카르파 건축에서 느껴지는 건물이 점점 오래될수록 그리고 원래 기능이 바뀌어도 여전히 품위 있어 보이도록 하는 고민을 읽을 수 없다. 스카르파의 건축을 보고 있으면 저택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보타의 건축은 언제나 새 것 같다.

대화를 꼭 말로 할 필요는 없다. 퀘리니 스탐팔리아 저택에서 스승과 제자는 30년의 시간을 두고 공간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마자리올 홀 ⓒarc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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