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온 듯 살기, 해와 달과 바람과 함께

[Story] 빛의 우물 '정, 은설 井, 銀雪' #3
ⓒBRIQUE Magazine
에디터. 윤솔희 객원에디터  사진. 윤준환, 윤현기  자료. 정영한 아키텍츠 YounghanChung Architects

 

건축가도 실험이라고 부르는 집을 호기롭게 수락한 이들, 건축주 정슬기, 설윤형 부부다. 평생을 공동주택에서만 살아봤다면서 어떤 배짱으로 이처럼 계단과 창문은 많고 실내 벽과 문은 없는 독특한 설계 도면에 ‘예스’를 외친 것일까. 이들이 꿈꾸던 정, 은설에서의 삶은 어떻게 입체적으로 무르익고 있는지 물었다. 이 집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BRIQUE Magazine

 

한적한 동네군요. 이 자리는 어떻게 찾으셨어요?

정슬기ᅠ고향이 부산이에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신혼 살림도 차렸는데 일 때문에 다시 내려왔어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가끔이라도 부모님 손을 빌리려면 부모님 댁과의 거리가 차로 30분 이내이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마침 아내의 지인도 대부분 해운대 쪽에 살고 있어서 후보 지역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었어요. 이 땅에 온 건 순전히 우연이에요. 동네가 조용하고 예산 범위에도 들어가는 터라 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죠. 2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옥상에 올라가 보니 광안대교가 보이더라고요. ‘부산불꽃축제를 집에서 볼 수 있겠군’ 그 정도의 믿음이었어요.

설윤형ᅠ남편이 이 땅을 정하고는 저를 꼬드기며 일단 보라고, 광안대교 뷰라며 씩씩하게 자랑하더라고요. 실상은 저 멀리 빼꼼 보이는 거지만요. (웃음) 그래도 땅거미가 내려앉고 광안대교에 조명이 켜질 때면 도심 전경이 예뻐서 저도 한참을 봐요. 테라스에 앉아 그 순간을 보는 맛이 있어요.

 

, 은설의 첫인상이 꽤 독특해요. 집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정슬기ᅠ맞아요. 그래서 골조가 올라갈 때 동네 공인중개사가 슬쩍 오셔서 세 놓으라고 많이들 말을 거셨어요. 오피스나 다가구주택인 줄 아신 거죠. 이렇게 4층짜리 건물에 한 가족이 살 거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우니까.

설윤형ᅠ집 안에 들어와도 다들 놀라세요. (웃음) 아무튼 참 잘 오셨어요. 지금이 딱 정, 은설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때거든요. 저는 10월 이맘때를 가장 좋아하는데 특히 식탁에 앉아 코너의 ‘ㄱ’자 창문을 올려다보는 게 쏠쏠한 낙이에요. 청량한 가을 하늘을 끼고 사는 것과 다름없죠. 추석 전후 무렵에는 달의 궤적도 프레임 안에 쏙 들어와서 달이 이동하는 모습도 다 보여요. 아이들이 저녁밥 먹다가 외쳐요. “엄마, 달이 저리로 갔어!” “달이 뚱뚱해졌어! 소원 빌자!” 하고요.

 

ⓒBRIQUE Magazine
ⓒBRIQUE Magazine

 

왜 정영한 아키텍츠였어요?

정슬기ᅠ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소개됐지만 오랜 지인이에요. 제대 후 복학하면서 혼다 ‘줌머’라는 스쿠터를 한 대 샀거든요. 신나게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제 것과 같은 오토바이가 한 카페 앞에 주차되어 있더라고요. 반가워서 멈춰 인사했는데, 그 오토바이 주인이 정영한 소장님이었어요. 그렇게 서로를 알았죠. 정영한 아키텍츠의 전작도 다 봤어요. ‘평범한 작업을 하는 분은 아니네. 그렇다면 같이 해보자’ 싶었어요.

 

이왕이면 독특한 집을 요청하셨다고요.

정슬기ᅠ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하게 특별하려 했던 건 아니지만, 통상적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요즘은 건축가에게 특별히 ‘내 집’을 의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요. 시공사에서 보여주는 여러 단독주택 타입 중에 하나를 고른다거나. 하지만 분명한 건, 저희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의 요청을 단순하게 전달했고 이 모습을 만들어주셨죠.

설윤형ᅠ저는 햇빛이 잘 들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추위를 많이 타고, 또 볕 쬐는 걸 좋아하거든요. 다른 부분에서는 전문가의 결정을 전적으로 신뢰했죠.

정슬기ᅠ건축주로서 나름의 준비라면 한 1년 반 정도 국내외 여러 잡지를 뒤적이면서 원하는 집의 모습을 스크랩한 거예요. 여기에는 이런 장면이, 저기에는 저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정도의 취향을 스스로 파악하는 일이었죠. 저희 둘 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고, 도면이라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주는 평면도를 본 게 다였던 사람이어서요. 다시 돌아가도 이렇게 입체적인 공간을 상상하고 요청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BRIQUE Magazine

 

두 분 모두 줄곧 아파트에서 생활하셨다면서요. 그렇다면 주택 건축 과정의 선택 하나하나가 도전이었겠어요.

정슬기ᅠ집을 짓자는 선택부터 도전이었죠. 사실 아내는 아파트를 선호했어요. 그런데 단독주택에 살아야겠다는 제 생각이 워낙 완고했던 터라 손을 들어준 거죠. 서울에 살 때 왕십리에 있는 한 주상복합에서 살았는데 갑갑하더라고요. 창문을 열어도 환기가 안 될 뿐더러 열면 여는 대로 미세먼지나 소음과 싸워야 하고요. 아이들도 자라고 아드와 모모 두 반려견에게도 단독주택이 훨씬 좋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단독주택에 살아보고 싶더라고요. (웃음)

설윤형ᅠ저는 사실 우려스러웠죠. 아직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면서 건물 유지·관리부터 시작해 어떻게 다 신경 쓰고 살까 싶었죠. 물론 대부분의 걱정이 사실이 됐고요. (웃음) 아이들 등하원하는 일만 해도 단독주택지이다 보니까 셔틀버스 탑승 위치를 다시 한 번 살펴야 하고, 대나무 화단 관리만 해도 전문업체에 연락해 때마다 영양제를 주고 아픈 곳 없는지 보살펴야 하죠. 난간 유리는 아무리 닦아도 뒤돌아서면 또 손때가 묻고요.

정슬기ᅠ워낙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래요. 그래서 저는 말하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순간도 받아들이자!” (웃음) 단독주택이란 공간은 그런 관용과 이해의 능력치도 키우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선택과 타협을 매 순간 하게 되죠. 저기 거실 벽에 아이들 그림이 어지럽게 붙어 있잖아요. 가까이 가서 보면 긁힌 자국도 많아요. 저희 입장에서는 그 구역이 타협 중 하나였어요. 그곳은 아이들을 위한 벽, 이렇게 인정하면 한결 편해지죠.

 

ⓒBRIQUE Magazine
거실 벽에 붙은 아이들의 그림 ⓒBRIQUE Magazine

 

주택에서의 삶은 매 순간이 깨어있는 시간이겠어요. 판단하고 선택하고 인정하고.

설윤형ᅠ맞아요. 사실 말은 힘들다, 귀찮다 해도 또 금세 그러려니 해요. 이 집에서의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거든요. 가장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아드와 모모가 행복해하고 그 모습에 제가 또 행복해요. 한번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창문을 가리키며 “엄마, 빗물이 나한테 달려와”라고. 그 표현에 놀랐어요. 저 나이 때의 감수성이 있는데 그걸 잘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집인 것 같아요.

 

시적인 표현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군요!

설윤형ᅠ코로나19 유행이 지난해 봄부터였는데 저희는 감사하게도 갑갑한지 모르고 지냈어요. 테라스에 텐트 펼치고 비누방울 불고, 천창 열고 욕조에서 물놀이하고 달도 별도 보고요.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아이들을 묶어두는 게 아니구나 깨달았죠. 이 시기를 아파트에서 보냈다면 속상했을 것 같아요. 아이에게 ‘하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라고만 말하는 시간이었겠죠.

 

그런데 벽과 문이 없는 집, 살기에 정말 괜찮나요?

정슬기ᅠ다들 물어보시는데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괜찮은 것 같아요. 놀이방에서 침대방에서 또 공부방에서 엄마, 아빠가 어디 있는지를 볼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좋아라 하고요. 대신 전동 블라인드를 설치해 잠자리에 들 때면 방을 감쌀 수 있도록 했어요. 아무래도 아이들은 소음이나 작은 빛에도 예민해서요.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냉난방이 꽤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정슬기ᅠ저희 집은 냉난방 공조 시스템이 빌트인으로 세팅되어 있어요. 통창은 두어도 여닫는 창문을 두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설계 때 요청드렸죠. 사실 첫해에는 난방과 냉방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층고가 이리 높은 집에서는 처음 살아보니까요. 이젠 요령을 터득했어요. 냉난방 비용은 아마 동일 평수의 웬만한 아파트랑 비슷할 거예요.

 

ⓒBRIQUE Magazine

 

이 집에서 각자 가장 좋아하는 순간에 대해 말해주세요.

정슬기ᅠ1층에 작업실 겸 창고가 있어요. 거긴 어두워요. 2층부터 4층까지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백색의 공간이라 할 수 있지만 1층은 층고도 상대적으로 낮고 분위기가 차분한 편이죠. 거기에 캠핑의자 같은 게 하나 있는데, 아드와 산책 다녀온 다음 그 의자에 앉아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올라오거든요. 저는 그 순간을 되게 좋아해요.

설윤형ᅠ제가 좋아하는 공간은 테라스. 그리고 거실도 좋아해요. 천창 바로 아래에 빈백beanbag을 두고 그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요. 또 아이들 다 재우고 ‘육퇴(육아 퇴근)’한 다음 시원한 맥주 한 병 들고 거실 폴딩도어 쪽 청죽을 바라보며 앉아 한 모금 들이키면 그만한 힐링이 없어요. 가로등 불빛에 은은하게 나부끼는 청죽 실루엣이 거실을 한껏 운치 있게 만들어줘요.

 

집 안에서도 아이들도 저마다 애정하는 장소가 있을까요?

설윤형ᅠ온 사방을 뛰어다니느라 정신 없는데요. 요즘에는 소파 쿠션을 얼기설기 모아서 집 짓는 놀이에 빠졌어요. 그 안에 둘이 들어가서 놀아요. 귀엽죠?

 

ⓒYoon, Joonhwan

 

, 은설에 살면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요?

정슬기 집 안에 층이 여러 개 있잖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움직여요. (웃음) 생각 없이 움직였다가는 금세 지치거든요. 그래서 침실에서 잠을 깨 하루를 시작할 때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앞으로의 일정을 되새기는 습관이 생겼어요.

설윤형ᅠ초기에는 4개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둘 다 고생을 좀 했어요. 다리 근육이 뭉칠 정도였으니까요.

정슬기ᅠ저는 여전히 집에 대한 생각이 변함없어요. 집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집을 어떤 재산이나 물질의 개념으로만 셈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요. ‘어느 아파트 값이 올랐대’ 그런 말도 종종 듣지만 그래도 제게 더 중요한 가치는 지금이에요. 오늘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재미있게 행복하게 사는 것. 그래서 정, 은설은 제게 너무도 매력적인 집입니다.

 

새해에는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

정슬기ᅠ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든요. 아마 곧 자기 방을 갖고 싶다고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각자 방을 만들어 줄 방법을 슬슬 궁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BRIQUE Magazine

 

 

‘정, 은설 井, 銀雪’  전체 이야기 담은 <브리크brique> vol.8 더 알아보기

 

 

You might also like

건축에도 올드머니룩Old Money Look이 있을까?

[정해욱의 건축잡담] ⑩ 정통과 퓨전의 변증법에 관하여

스테이 창업 전, 반드시 두드려보아야 할 돌다리 ‘스테이 스쿨’

스테이 스쿨 강사진으로부터 미리 들어보는 생존 전략

일상의 웰니스 라이프 큐레이터에게 묻다

[Wellness Lifestyle] ⑧ Life Curators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Portrait] 호텔을 만드는 사람 한이경

‘왜 홀리스틱 웰니스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Interview] 상하 리트릿 CCO & 총괄 건축가 — 캘빈 싸오Calvin Tsao

짓기 전에 꼭 넘어야 할 스무고개가 있습니다

[다시 만난 브리크의 공간] ① 서교동 카페 ‘콤파일Compile’ 황지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