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이현준 에디터
지난 2017년, 반년을 프랑스 리옹 인근의 소도시 생테티엔 Saint-Étienne에서 보냈다. 당시 세 들어 살았던 연극배우 줄리앙Julien의 집엔 그의 구미와 안목이 오롯하게 반영돼 있었다.
‘프랑스 집’이라 하면 값비싼 파리의 요지에 호화스러운 가구, 유명한 아티스트의 미술품, 하다못해 고급 내외장재라도 떠올릴 수 있지만, 그의 집에는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갖춰진 게 없었다. 프랑스 지방 소도시의 소박한 아파트엔 그가 손수 제작해 무대 소품으로 올렸던 목제 가구와 집기들이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장난스럽게 칠하다 만 벽, 선반 위에 대충 기대어 놓은 쉴레의 엽서들, 노후해 삐걱대는 나무 바닥과 그 위를 누비는 강아지, 그리고 그가 집안 곳곳에 무심히 놓아둔 초록 식물들이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건물 안 줄리앙의 집이 내게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질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자아낸 특유의 공기 탓도 있었지만, 제 좋을 대로 자라나 공간을 장악하다시피 한 초록색 식물들이 왜인지 감각에 깊이 각인됐다. 추측건대 혼자 그 집을 지키는 동안 초록을 응시한 절대 시간, 집안에서 사부작거리며 자꾸만 눈에 밟혔던 그 형상과 색을 거듭해서 떠올리는지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제 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는 것은 풀과 꽃이 아니던가. 해가 뜨면 전복하길 거듭하는 세상 속에서 이들은 웬 별종인가 싶기도 했다. 지난한 관계의 늪에서 우리는 때로 혼자여야만 했다. 창가에, 식탁에, 베란다에, 침대 맡에 가만한 생명은 언제부턴가 그냥 거기 있다. 어쩐지 걸어오는 말이 좀체 노골적이지 않다. 목이 타서 낯빛을 노랗게 드리우거나 등허리를 굽힐지언정, 그들은 초록색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줄리앙의 집은 머릿 속에 마치 녹색 외상처럼 남아 식물과 공간에 천착케 했다. 마침내 독립해 마련한 공간은 꽃과 초록에 거의 양보하다시피 했고, 자연스레 ‘라이프 인 그리너리Life in Greenery’ 시리즈를 떠올렸다.
보르도나 그르노블, 때때로 릴이나 파리를 동분서주하며 줄리앙은 오늘도 무대에 섰을 터다. 그의 작은 집으로부터 이만큼의 이야기가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처럼 기뻐할 텐데. 새 <브리크 brique> 책을 줄리앙의 집으로 부친다.